동화인류학 연구실에서는 이렇게 지금 여기의 삶을 완전히 긍정하는 주인공들의 세계를 탐험합니다. 동화 속 주인공들은 정황에 따라 즉흥적으로 자신을 만들어갑니다. 주인공의 삶이 어디로 이끌릴지는 아무도 모르고 정해진 것도 없습니다. 어떤 것으로도 규정 지을 수 없는 존재들이 온갖 살 궁리로 복작거리는 숲에서 깔깔 웃고 떠들며 놀다 옵니다. 그리고 돌아온 그 자리에서 지금 여기의 삶에 감사하며 한 걸음 더 낯선 길을 나서봅니다. 필요한 것은 모든 우연을 수용하고 마음껏 상상하는 것 뿐!
[애니미즘과 영혼 관리술]
2024.8.9. 최수정
애니미즘과 영혼 관리술
만물에 ‘영’ 있다는 ‘영’의 개념은 인류가 죽음을 사고하기 위한 원시 철학의 개념이었다. 인간이 죽음을 사고하기 위해 발달시킨 인간 영혼의 개념이, 더 낮은 등급의 다른 영혼에 관한 관념뿐 아니라 긴 풀숲에서 즐겁게 노는 가장 작은 요정으로부터 천상에 있는 세계의 창조자이자 통치자, 위대한 영에 이르는 일반적인 영적 존재들에 관한 관념까지 확장되었다.
애니미즘적 사고에서 ‘영’은 시공간을 넘나들지만 어떤 실제적 조건에 갇혀 있다. ‘영’은 신체, 몸체적 조건에서 가시적 존재가 된다. 그래서 거꾸로 생각해보면 형태적, 물체적 조건을 만나지 못한 단계에서 ‘영’은 동등하고 위계가 없다. ‘영’이 어떤 형태의 사물에 거주하기로 결정하느냐에 따라 ‘영’의 모습이 드러나고 그 형태에 따라 임시적 위계가 설정된다. 그런 의미로 ‘영’은 인간의 몸도 ‘물체’처럼 쓴다. 영에 의해 선택된 인간의 몸은 ‘영’이 선택한 임시 거주지가 된다. 그렇다고 나는 완전히 ‘영’에 의해 선택되고 지배받는 수동적 존재인가 하면 그렇지 않다. 나는 내 몸을 소유한 이 ‘영’을 어떻게 잘 관리하여, 나를 찾아온 좋은 영이 나를 떠나지 않게 하고 좋은 영이 더 좋은 영을 부르도록 나의 영력을 높일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문제가 남는다. 나의 삶에 활기를 불어 넣어주는 ‘영’은 어떤 영이고 그것과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선악의 저편 세계
애니미즘 세계에서 세계는 이원적으로 표상된다. 산 자들은 죽음을 사고하며 망자들의 땅을 상상했다. 산 자들의 세계와 죽은 자들의 세계가 있다. 절벽과 숲이 있는 고요하고 엄숙한 장소에 있는 ‘동굴’, ‘구멍’과 같은 은밀한 장소가 망자들의 땅으로 가는 입구였다. 산 자들의 땅과 죽은 자들의 땅이 있는 두 세계는 ‘평행 세계’다. 각자의 질서체계를 유지하며 서로 ‘불연속’ 하는 동시적 세계는 섞이면 안 된다. 하지만 세계를 연결하는 통로가 있다. 동굴, 강과 같은 입구를 통과해 자기가 이전에 경험한 모든 것을 두고 저편으로 건너가는 사람이 있다. 어쩌다 저쪽 세계를 여행하고 돌아오는 자는 금기를 지켜야 한다. 뒤돌아보지 말고, 저쪽 음식을 먹지 말아야 한다.
‘영웅’은 저쪽 세계에 한 번 갔다 온 존재다. 이편에서 무언가 답답함을 느끼고, 갇혔음을 깨닫고 다른 욕망이 시작된 자가 입구를 발견하게 된다. 이 여행은 도덕적인 여행이 아니다. 애니미즘 세계에서 저편은 천국과 지옥 개념이 없다. 이편이나 저편이나 ‘죄의식’이 없는 세계다. 자연에 심판자가 따로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애니미즘 세계를 그리는 동화는 ‘선악의 저편’에 있다.
태양이 지는 서쪽의 기준은 태양을 보는 사람이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그 자리에서 해가 지는 쪽이 서쪽이다. 선과 악의 관점도 마찬가지다. 그가 어디에 누구와 어떤 관계에 있느냐에 따라 선악의 질서는 얼마든지 변한다.
달님은 해가 뜨고 지는 것을 기준으로 삶의 교리를 삼고, 태양신과의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가을 추수에 큰 의미를 두는 것은, 농경문화의 사고방식이라고 했다. 수렵채집민들은 낮과 밤, 가을의 의미가 크지 않다. 낮은 낮대로 밤은 밤대로 활동하는 동물들을 사냥하면 된다. 굳이 가을을 기다리지 않아도 되는 세계는 이미 풍요로움으로 넘치는 영원한 여름이다. 있어야 할 것과 없어도 될 것을 따로 구분하지 않아도 되는 세계다. 인간 중심의 관점으로 낮이나 가을이 중요할 뿐이다. 자연 속 형태를 옮겨 다니는 ‘영’들에게는 밤이나 겨울도 낮과 가을만큼 똑같이 중요하다. 애니미즘 세계에서는 주인공들이 어디 서 있느냐에 따라 그의 관점이 달라진다. 그것은 하나의 관점으로 끌어당기는 힘이 없는 세계, 무수한 관점들이 공존하는 곳이다.
‘인격성’을 잃은 ‘상품’의 세계
애니미즘을 공부하면서 만물의 ‘영’의 개념이 인간 ‘영혼’에서 왔음을 알 수 있다. ‘영혼’에 사로잡힌 인간처럼 ‘영’도 어떤 물체적 조건 속에서 가시화된다. ‘영혼’과 ‘영’은 그 물체적 조건이 다를 뿐 똑같은 인간과 같은 ‘인격적’ 성격을 가지고 이들의 위계는 동등하다. 애니미즘 세계에서는 이 동등한 것들의 다채로운 관계가 활기를 만든다.
그런데 우리는 왜 지금 이런 오래된 원시문화인들의 종교적 교리에 대해 공부하고 새롭게 알 필요가 있는 것일까? 지난 시간 우리는 애니미즘의 하위 분류인 ‘페티시즘’에 대해 이야기했다. 페티시는 숭배자가 어떤 물체에 특별한 영이 있다고 생각하며 숭배하는 현상이다. 페티시 물체에는 어떤 원인과 효과가 있고 숭배자에게 상상적인 부적으로 작용한다. 페티시 숭배자는 그것이 자기 삶에 ‘영’적 영향력을 끼친다고 생각한다. 그럴 때 페티시즘도 영혼 관리술의 일부가 된다. 이것은 현대의 상품 숭배와 다르다.
달님은 상품의 물질성에 ‘영’이 들어있지 않다고 했다. 원시문화의 페티시는 ‘영’의 거주지였지만 현대사회의 상품에는 ‘영’이 거주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영’이란 ‘영혼’과 동등한 ‘인격성’이었다. ‘영’은 ‘영혼’에게 영향을 끼치고, ‘영혼’을 병들게 하기도, 영력을 키우게 하기도 한다. 따라서 ‘영’의 세계에 있는 ‘영혼’은 들어온 영을 잘 관리해서 치유되고 건강해지기 위해 다른 ‘영’의 힘을 빌어오기도 하고 이용하기도 한다. 상품은 영력과는 상관없이 화폐적 척도에 의해 그 가치가 평가된다. ‘인격’이 있는 존재로서 인간과 동등한 위계에 있지 않다. 그것은 ‘영’을 담는 용기나 거주지가 아니고, 인간의 대상으로서 이용되고 폐기된다.
애니미즘 세계에서 ‘건강’의 실제적 의미는 영혼 관리술을 통한 영력의 증가와 같다. 이를 위해 ‘선물’을 주고받는 일이 중요하다. 물건에 나의 ‘영’을 실어 보내 그 사람의 집에 내가 들어간다. 만약 그 선물을 받는 사람에게 그 물건이 필요 없는 것이라 하더라도 ‘선물’로 관계를 개시해 나의 ‘영’을 그 집에 심어놓는다. 그 사람의 삶의 질서에 내 자리를 만들어 놓는다. 특히 잉여를 남기는 선물을 주고받을수록 나의 영력을 더 키울 수 있다. 잉여는 언젠가는 더 큰 힘으로 되돌아오기를 믿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언젠가 부쩍 더 커져서 나에게 되돌아올 영을 기다리며 선물을 해보자.
상품도 ‘의례’를 통하면 ‘영’이 들어간다. 예를 들어 이름 붙이기와 같은 ‘관계’를 맺는 의례가 필요하다. 이름을 부를 때마다 목소리가 ‘영’을 불러온다. 그런 이름 부르기의 의례를 통해 그 물체에 ‘영’이 들어가 상호관계를 맺을 수 있는 물체적 존재가 된다. 아이들은 장난감에 자기 방식대로 이름을 붙이고 그 이름을 부르며 논다. 그래서 장난감에는 ‘영’이 들어있다.
장남감의 애니미즘
어른들은 어떤 목적으로 아이에게 장난감을 줄까? 달님은 인간의 모든 장난감은 ‘교육용’이라고 했다. 교육용이라는 말을 의심해 본 적은 없다. 그런데 애니미즘과 장난감을 같이 떠올리게 되자 무엇을 교육한다는 것인지 생각해보게 된다. 아이들은 놀이를 통해 언어와 사회성을 학습한다. 아이들은 장난감을 가지고 놀며 그 물체에 이름을 붙이기도 하고 말을 걸고, 함께 이야기하며 웃기도 하고, 나무라기도 한다. 그런 모습을 보며 어른들은 ‘참 잘 노네’라고 하며 흐뭇해하기도 하는데, 그것이 다가 아니다. 장난감의 애미니즘을 생각해보면 아이들의 노는 장면이 다르게 보일 수 있을 것 같다.
특히 사람을 닮은 인형을 갖고 노는 아이들을 자세히 관찰해보자. 인형은 그 자체로 사람의 ‘영’을 비유하고 있다. 아이는 분명 장난감에 들어있는 ‘영’과 놀고 있다. 아이가 인형을 갖고 노는 것인지, 인형을 소유한 ‘영’이 ‘아이’를 가지고 노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애니메이션 영화 ‘토이 스토리’를 생각해보면 쉽다. 그 영화는 인형의 ‘영’이 깨어나 아이들의 ‘영’과 어울려 노는 일을 그리고 있다. 영화 속 아이들이 인형의 ‘영’에 사로잡혀 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해보면 아이들 손에 장난감을 쥐여준 어른들은 무의식적으로 아이들에게 ‘영’의 존재를 가르치고 있는 애니미스트들이다.
청소의 애니미즘
아무리 치워도 끝이 없고, 돌아서면 또 치울 게 나오는 청소는 힘들다. 달님은 청소 또한 애니미즘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했다. 물건에 들어있는 ‘영’들이 제멋대로 돌아다니기 때문이라고 했다. 청소는 가만히 있지 않은 ‘영’들에게 제자리를 앉히는 일이라는 것이다. 내 공간에서 맘대로 돌아다니는 ‘영’들을 따라 다니며 붙잡아 다니는 일이기 때문에 힘들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영’들은 언제나 투쟁하고 싸우느라 바쁘다. 청소는 중단없이 움직이는 ‘영’의 힘들의 장에 내가 인위적으로 개입하는 일이기 때문에 힘에 부칠 때가 있다. 따라서 청소는 ‘영’들의 힘과 대결하는 일이다. 내 삶의 주도권을 다른 ‘영’들에게 넘겨주지 않기 위해 그 힘들과 전투를 치르며 삶의 영역을 지키는 일이 ‘청소’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선한 자들이란 훌륭한 전사들과 사냥꾼들이다.”(에드워즈 버넷 타일러, 유기쁨 옮김, 『원시문화』, 아카넷, 242쪽) 애니미즘 세계에서 건강하고 선한 자들이란 ‘영’의 힘을 적극적으로 충돌하며 싸우는 자들이다. 힘들의 투쟁에 적극 참여하며 자기 영력을 높이기 위해 수많은 ‘영’들과의 관계를 잘 구성하는 자가 건강한 승리자다.
상관없어 보이는 장난감과 청소를 애니미즘 관점으로 본다면 공통점이 있다. 힘겨루기를 통해 ‘질서’를 만든다는 것이다. 질서는 관계를 이해하고, 그 관계들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는 일이다. 어딘가로 튈지 모르는 아이들의 행동과 생각을 장난감을 통해 교육해 자신을 둘러싼 세계의 질서를 배우게 한다. 마찬가지로 청소도 어질러진 물건들과 힘겨루기를 하고, 주변 세계를 재구성하며 질서를 상기한다. 두 가지 방식 모두 각 ‘영’들에게 자기 자리를 시험할 기회를 준다. 그런 면에서 장난감과 청소는 ‘영혼 관리술’의 도구다. 사방 어디로 튈지 모르는 어린이와 물건들의 영을 미리 교육하고 배치하면서, 그들의 영을 관리하는 동시에 나의 영을 관리한다.
애니미즘 세계에도 좋고 나쁨 혹은 선악은 있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행동이나 사건 자체에서 오는 절대적 도덕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때마다 관계 배치에 따라 달라지는 좋고 나쁨이다. 애니미즘 세계에서 말하는 ‘악’이란 지금 여기서 맺는 관계에 문제가 생겼다는 것이다. 따라서 ‘악’과 ‘불행’을 막기 위해서는 좋은 관계를 끌어들이려는 시도와 노력이 필요하다. 자기에게 좋은 것, 자기 생명의 고양감을 느낄 수 있는 영과 상호작용할 수 있는 관계를 발견하고 실천하는 일, 이것이 바로 애니미즘 세계에서 말하는 ‘영혼 관리술’이 아닐까. 나에게 그것은 <인문공간세종>에서 선생님들과 인류학 공부를 하는 일이다.
번호 | 제목 | 작성자 | 작성일 | 추천 | 조회 |
26 |
[학술제 후기] 안데르센 동화의 세계 속으로! (3)
남연아
|
2024.12.29
|
추천 0
|
조회 70
|
남연아 | 2024.12.29 | 0 | 70 |
25 |
[안데르센] 동화로서 영원을 꿈꾸다 (1)
오켜니
|
2024.12.21
|
추천 0
|
조회 48
|
오켜니 | 2024.12.21 | 0 | 48 |
24 |
[안데르센] 안데르센과 동화(2)
최수정
|
2024.12.13
|
추천 0
|
조회 38
|
최수정 | 2024.12.13 | 0 | 38 |
23 |
[까마귀 농부의 동화 읽기(마지막)] 겨울 축제 이야기 (1)
coolyule
|
2024.11.29
|
추천 0
|
조회 64
|
coolyule | 2024.11.29 | 0 | 64 |
22 |
[모던한 바다 엄마의 동화 읽기] 동화 속 먹고사니즘 (2)
남연아
|
2024.11.22
|
추천 1
|
조회 65
|
남연아 | 2024.11.22 | 1 | 65 |
21 |
떡갈나무에 대한 추도사 (1)
오켜니
|
2024.11.16
|
추천 0
|
조회 66
|
오켜니 | 2024.11.16 | 0 | 66 |
20 |
안데르센 동화의 힘 (1)
최수정
|
2024.11.08
|
추천 1
|
조회 72
|
최수정 | 2024.11.08 | 1 | 72 |
19 |
[뚜벅이의 동화 읽기] 독극물 낚시와 빨간 신 (1)
콩새
|
2024.11.01
|
추천 0
|
조회 102
|
콩새 | 2024.11.01 | 0 | 102 |
18 |
[까마귀 농부의 동화 읽기] 이야기한다는 것 (1)
coolyule
|
2024.10.25
|
추천 0
|
조회 128
|
coolyule | 2024.10.25 | 0 | 128 |
17 |
안락의자에 누운 낡은 가로등 (3)
오켜니
|
2024.10.19
|
추천 0
|
조회 111
|
오켜니 | 2024.10.19 | 0 | 111 |
16 |
미야자와 겐지와 안데르센의 의인화 (1)
최수정
|
2024.10.11
|
추천 0
|
조회 148
|
최수정 | 2024.10.11 | 0 | 148 |
15 |
[뚜벅이의 동화 읽기] 프레임을 깨는 미야자와 겐지 (3)
콩새
|
2024.10.04
|
추천 0
|
조회 96
|
콩새 | 2024.10.04 | 0 | 96 |
14 |
[까마귀 농부의 동화 읽기] 미야자와 겐지의 가난관 (4)
coolyule
|
2024.09.27
|
추천 0
|
조회 144
|
coolyule | 2024.09.27 | 0 | 144 |
13 |
[모던한 바다 엄마의 동화 읽기] 미야자와 겐지라는 새로운 렌즈 (4)
남연아
|
2024.09.20
|
추천 0
|
조회 167
|
남연아 | 2024.09.20 | 0 | 167 |
12 |
상상력의 리얼리티 (1)
최수정
|
2024.09.13
|
추천 0
|
조회 168
|
최수정 | 2024.09.13 | 0 | 168 |
11 |
참인디언 애니미즘의 일상 (1)
콩새
|
2024.09.07
|
추천 0
|
조회 176
|
콩새 | 2024.09.07 | 0 | 176 |
10 |
[까마귀 농부의 동화 읽기] 대나무, 달, 소녀–가구야 공주 이야기 (6)
coolyule
|
2024.08.30
|
추천 1
|
조회 170
|
coolyule | 2024.08.30 | 1 | 170 |
9 |
[모던한 바다 엄마의 동화 읽기] 나에서 빠져나오는 기술, 애니미즘 (2)
남연아
|
2024.08.23
|
추천 0
|
조회 135
|
남연아 | 2024.08.23 | 0 | 135 |
8 |
하늘 가까이, 추운 겨울의 푸른 생명 (2)
오켜니
|
2024.08.16
|
추천 0
|
조회 132
|
오켜니 | 2024.08.16 | 0 | 132 |
7 |
[애니미즘과 영혼 관리술] (1)
최수정
|
2024.08.09
|
추천 1
|
조회 140
|
최수정 | 2024.08.09 | 1 | 140 |
주변을 보면 청소를 잘하는 사람이 다른 일도 잘하는 것 같습니다. 사물의 영과 힘을 겨루어 질서를 잘 부여하는 것이 자신의 영혼을 관리하는 기술이라니 먼저 청소를 잘하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해야겠어요.
하찮은 ‘물건’에서 영력을 찾는 주술사의 시선과 ‘자신’을 빛낼 물건을 찾는 현대인의 시선은 정반대 방향을 향해 있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