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학 탐구생활》 편집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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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학을 나눌레오]선으로서의 배우기
선으로서의 배우기
뒤늦게 공부를 좀 해보겠답시고 매일 책을 읽고 숙제를 한다. 회사 나가랴 집안일 하랴 아이들 챙기랴 바쁜 와중에 공부라니, 하던 일이나 제대로 하지 그것도 못하면서 일을 만들어 매일 바쁘다를 달고 산다며 주위에서 성화다. 친정 엄마는 공부하랄 때는 그렇게도 안 하더니 이제야 뒷북이라며, 네 공부하기보다 애들 공부나 좀 시키라고 핀잔이시다. 친구들은 도대체 무슨 공부를 하고 다니느냐고, 나중에 뭘 하려고 그렇게 공부를 하냐며 그럴 거면 돈 되는 자격증 시험이나 대학원에 가는 게 어떠냐고 묻는다. 그들의 말이 일면 틀린 것도 아니라, 나는 별 반박을 하지 못하고 그냥 웃어넘긴다. 내가 생각해도 나는, 지금 내게 주어진 일도 버거워하면서 공부까지 하겠다고 달려들어 ‘힘들다’를 연발하고 있고 간절한 상황이고, 학교 다닐 때는 놀기 바빠 이제야 그 간극을 메꾸려다 보니 아바타가 몇 개가 있어도 모자랄 지경이다. 그렇다고 내가 딱히 어떤 목표가 있어 공부를 하느냐면 그것도 아니어서, 공부를 왜 하냐는 사람들의 질문에 답을 하지 못한다.
사실 내가 하는 공부는 우리 사회에서 ‘공부’를 떠올릴 때의 이미지와 뭔가 어긋나는 부분이 있다. 우리는 공부한다고 할 때 보통 진학이나 자격증을 위한 교과목을 배운다거나 인문사회 분야의 지식을 습득하는 것을 떠올리지만, 내가 공부를 한다면서 하는 일이란 인문공간세종(이하 ‘인문세’)에서 열리는 세미나에 참석해서 책을 읽고 숙제를 하고, 인문세에서 진행되는 활동과 공부 들이 잘 이뤄지도록 ‘인문세 스텝’이라는 이름을 달고 흔히들 잡일이라고 부르는 일을 도맡아 하는 일이다. 내가 하는 공부는 모두가 자기개발에 힘을 쓰고 돈 되는 일을 찾아나서는 시대가 흔히 말하는 공부와는 분명히 다른 배움을 목표로 한다. 그렇기에 나는 그들의 질문에 답을 하지도, 내 공부가 그들에게 이해되기에는 어려운 지점이 있다.
내가 하는 공부를 그들에게 설명할 수 없고 그들이 내가 하는 공부를 납득할 수 없다는, 이 만날 수 없는 엇갈린 이해관계를 어떻게 풀어갈 수 없을까 하는 질문을 품고 있는 중 나는 인문세 특강으로 팀 잉골드의 <선인류학:line-anthropology>을 만났다. 『라인스Lines』(팀 잉골드 지음, 김지혜 옮김, 포도밭, 2007)의 일부분과 『모든 것은 선을 만든다 The Life of Lines』(팀 잉골드 지음, 차은정 권혜윤 김성인 옮김, 이비, 2015) 전체를 읽고 진행된 세미나에서 나는, 생명을 선으로 정의하고 세상을 선의 뒤얽히는 생성의 공간으로 바라보는 그의 관점에 매우 흥미를 느꼈다. 『모든 것은 선을 만든다』에서 그는 알아야 할 지식을 많이 집어넣는 기존의 배움과는 다른 교육 방식을 제시하는데, 나는 그의 이론을 통해 그들과 나의 만나지 않는 이 배움에 대한 이해를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이 글에서 그의 ‘선학(線學)’을 간략하게나마 소개하고 내 공부와 연결해보는 시도를 해보려 한다.
덩이 말고 선
먼저 선인류학이란 뭘까? 팀 잉골드는 생명을 덩이가 아닌 선의 뒤얽힌 모습으로 그려내며 둘을 구별한다. 그는 자신의 저서 『라인스』에서 균사체를 생명의 전형으로 삼고자 했다. 균사체는 내부와 외부가 없고 그 모습이 덩이로 형태화되지 않고, 균사체의 선들은 온갖 방향으로 뻗어가며 주변에 침투한다. 그는 생명을 외부와 구별되는 명확한 경계가 있는 덩이의 형태가 아닌, 덩이와 선의 조합으로 보고자하며, 생명을 덩이로 봐라봐서는 각 개체들이 서로 얽혀드는 사회적인 삶을 설명할 수 없다고 한다. 그에게 삶이란 서로 상호침투하는 동적인 이미지다. 너와 나를 구분하고 서로의 경계가 중첩될 수 없는 ‘덩이의 세계’에는 ‘상호침투하는 삶’이 존재할 수 없다.
생명을 덩이가 아닌 선의 얽힘으로 바라볼 때 달라지는 것을 뭘까? 덩이는 다른 덩이들과 함께 할 때 자신의 영역을 지키거나 서로를 무화시키는 방식으로 존재하게 되지만, ‘선으로서의 삶the life of lines’은 주위의 생명과 사물, 온갖 것들을 붙잡기도, 쓸고 지나가기도, 침투해서 빠져나가기도 하며 서로 뒤얽힌다. 삶이란 이렇게 쉼 없이 움직이고 서로 연결되는 선의 뒤얽힘이다. 이때 선은 눈에 보이는 것에만 해당하지 않는다. 그는 대기, 날씨, 분위기와 같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것들까지도 선으로서의 생명으로 끌어온다. 온갖 생명들과 연결되고 뒤얽히는 선으로서의 삶에서 중요한 것을 나를 고집하고 불리는 일이 아닌 다른 선들의 뒤얽힘의 흔적을 주의 깊게 파악하는 일이다.
생명을 덩이와 선의 조합으로 정의하게 되면 배움의 이미지도 달라진다. 덩이는 배움에 있어 주체와 대상,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 배움의 목적과 배워야 할 것이 명확히 정해져 있다. 즉 나와 너의 경계를 명확히 하고 구분하며, 자신의 영역을 고정시키고 확장시키기에 덩이에게 잘 배운다는 것은 자신의 자리에서 이미 정해져 있는 이것들을 얼마나 잘 수행하는가이다. 하지만 선은 이 모든 것들이 선재해 있지 않다. 선은 누구에게나 선생님이 될 수 있으며, 누구에게서나 배울 수 있고, 배워야 할 것이 따로 없으며 어떤 것으로부터도 배울 수 있다. 선에게 잘 배운다는 것은 자신과 뒤얽힌 선들 속에서 배울 것을 찾아내는 상상력의 힘에 있다.
누가 가르치고 누가 배우는가
인문세에서는 ‘인류학’을 공부한다. 이번 시즌 인류학 세미나에서는 빙하 이후 인류가 걸어간 길을 따라갔다. 빙하 시대 이후 급변하는 자연환경에 적응하며 살았던 현생 인류의 삶을 그려낸 『빙하 이후』(스티븐 마이든 지음, 성춘택 옮김, 사회평론아카데미)를 주교재로, 그들의 흔적을 지금 우리의 관점에서 자의적으로 해석하지 않기 위한 몇 권의 참고도서를 부교재로 함께 읽으며 공부했고, 책에서 읽은 인류의 흔적을 집적 보기 위해 유적지나 박물관을 방문하고, 거기에서 떠오른 생각거리를 답사기로 마무리하는, 인문세의 시그니처 3단 콤보 ‘인류학 답사’를 네 번 떠났다.
나는 이번 시즌 인류학 세미나에서『빙하 이후』의 발제글 과제를 하며 스스로 덩이적 사고에 갇혀 어려움을 여러 차례 느꼈다. 이 책의 저자 스티븐 마이든은 책에서 존 러복이라는 가상 인물을 여행자로 내세워 시간여행을 하게 하지만, 모든 이야기를 그에게 의존해 이끌어가지 않는데, 존 러복을 바라보는 스티븐 마이든이 있고, 존 러복이 바라보는 빙하 이후의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그 빙하 이후의 생활상을 뒷받침하는 유물들과 그 유물들을 발굴하고 그로부터 당시의 생활상을 유추하고 그려내는 수많은 고고학자들 또한 등장한다. 이 책에서 화자는 너무나 많이 등장했고 나는 누구를 따라가고 누가 말하는 이야기를 들어야 할지 갈팡질팡했는데, 각 화자의 생각은 다른 화자들과 연결되어 수긍되어 다른 방향으로 발전되기도 하고 뒤집히기도 해서 어디까지가 이 사람의 생각이고 저 사람의 생각인지가 명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팀 잉골드의 선학에 따르면 생각이나 견해란 누구의 것인지 명확하게 경계 지어지거나 끊어지지 않는 것이었다. 나는 책의 논의해서 계속해서 진실을 알려주는 선생님이 누군지를 알아내려고 하고 있었다.
인류학 세미나는 오선민 선생님께서 진행하시고, 책에서 주목해야 할 논의와 유물, 유적지에 대해 설명해주신다. 학인들은 선생님의 이야기를 하나라도 놓칠 세라 귀를 쫑긋 세우고 열심히 받아 적기도 하며 세미나에 집중한다. 하지만 세미나에서 선생님은 오선민 선생님뿐만이 아니다. 세미나는 정해진 책의 분량을 읽고 쓴 학인들의 발제글을 중심으로 진행되기에, 학인들의 발제글 또한 선생님이 되고, 공부의 시작은 책을 충실히 읽고 생각거리를 학인들과 공유할 수 있도록 과제에 풀어내는 데 있다. 그렇기에 각자의 과제는 배워야 할 것을 예습하고 복습하며 반복적으로 머릿속에 넣는 공부 방식과는 달리, 인문세 공부에 있어 그 어떤 것보다 중요한 일이다. 같은 책을 읽고 갈피를 못 잡는 내게 학인들의 과제는 그야말로 좋은 선생님이 되었다. 책의 여러 지점에서 생각거리를 가져오는 학인들의 과제와 세미나 시간에 오선민 선생님이 공유해주시는 자료들, 책의 행간을 풀어주는 설명과 학인들과의 토론은 서로 연결되고 얽히며 상호침투한다.
이런 선으로서의 배움은 답사에도 이어진다. 이번 시즌 인류학 세미나에서의 답사지는 공주 석장리 박물관, 연천 전곡리 유적지, 울산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 국립중앙박물관의 ‘우리가 인디언으로 알던 사람들’ 전시였는데, ‘3단 콤보’로 이루어지는 인류학 답사는 책을 통해 공부하고 이해한 것을 확인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지 않는다. 사실 유물을 직접 본다고 해서 생활 방식이 완전히 달라진 그들의 삶을 온전히 이해하기란 그 시간의 간극이 너무 컸고, 박물관의 유물이나 유적지를 둘러봐도 정리되지 않는 이런저런 생각들만 부유할 뿐 인류학 수업을 통해 갖게 된 관점과 정보는 사방으로 뻗어가기만 하고 하나로 모아지지 않는다. 이런 생각들이 하나의 키로 엮이는 것은 답사기를 쓰면서부터다. 세미나 시간에 배웠던 내용과 자료집, 답사가 진행되는 동안 또는 마무리하며 학인들과 나누는 이야기들 중 내 생각이 따라가고 얽히게 되는 방향은 상상력이 결정한다.
무엇을 배워야 할까
나는 인문세에서 스텝으로 활동한다. 스텝의 역할은 한마디로 인문세 공부의 장이 잘 돌아가도록 뒤에서 잡다한 이들을 도맡아 하는 것이다. 누군가는 스텝이 되면 어떤 혜택이 있냐고 묻지만, 이렇게 물을 때 흔히 떠올리는 어떤 이익은 전혀 없다. 인문세에서 하는 공부의 관점에서 말하자면, 더 많이 일하고 더 많이 공부하는 것이 혜택이라면 혜택이다. 혜택이라면 자고로 적게 일하고 더 가져가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닌가. 그런데 더 많이 일하고 더 열심히 공부하는 것이 혜택이라니, 이건 또 어떤 배움이길래 그럴까.
인문세에서는 ‘장’일수록 공부를 더 열심히 해야 한다. 이는 말 그대로 일을 많이 하는 자가 공부도 더 열심히 해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그 일로부터 배움이 따라와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인문세 공부에서 배움이란 유용한 지식이나 정보를 집어넣는 일이 아니기에, 많이 일하고 많이 공부함으로써 가능해진다. 그렇다고 해서 그런 활동이 바로 배움으로 연결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활동을 많이 할수록 배움의 기회가 많아진다는 의미에서 더 많이 일하고 더 열심히 공부하는 일은 인문세 스텝에게만 주어지는 특별 혜택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활동에서도 모범이 되는 어떤 기준으로 두고 그것을 그대로 따라가려고만 한다면 이는 절대 배움으로 이어지지 않고 오히려 무능해지는데, 이반 일리치에 의하면 이때 따라오는 것은 ‘좌절하는 능력’뿐이다.(『학교 없는 사회』, 이반 일리치 지음, 안희곤 옮김, 215쪽) 도달하고자 하는 목표에 미치지 못해 스스로의 무능력만 확인할 뿐 어떤 배움도 얻지 못한다.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해나가는 데 있어 앞서 간 이의 길을 주의 깊게 살펴보고, 스스로에게 닥친 문제를 풀어가는 데 있어서는 얽힌 고리를 풀기 위해 주변의 엮인 선들의 오고가는 방향을 주의 깊게 살펴보는 힘이 배워야 할 것을 찾아내게 한다.
반면 덩이에게 배움이란 사회에서 통용되는 지식을 많이 쌓는 일이다. 잘 배운다는 것은 배워야 할 것을 많이 아는 일로, 덩이는 이것을 많이 집어넣을수록 커진다. 이때 배워야 할 것은 이미 정해져 있게 된다. 또 덩이는 자신의 자리를 확고히 하고 확장해야 하는데, 이는 흔히 경력이나 자리의 위계로 사람들 앞에 내세워지며 덩이적 사고에는 이런 것들이 어떤 힘을 가진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팀 잉골드에 의하면 이런 식의 사고는 경계를 더욱 확고히 하여 스스로를 고립시킬 뿐이며, 어떤 배움도 이끌어내지지 않는다.
어떻게 배워야 할까
팀 잉골드는 교육을 의미하는 동사 ‘educate’의 어원으로 두 가지를 언급하며, 그 중 하나를 선으로서의 배움의 이미지로 제시한다. ‘기르기나 키우기, 더 나은 행동 패턴과 그것을 뒷받침하는 지식을 불어넣는’ 의미를 가지는 ‘educare’와 ‘ex(밖으로)’와 ‘ducere(이끌다)’가 합해진 ‘신참자를 세계 속으로 끄집어내는’ 의미가 있는 ‘educere’ 중 후자의 ‘educere’가 그것으로, 우리는 이 단어를 통해 배운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생각해보게 된다. (『모든 것은 선을 만든다』, 팀 잉골드 지음, 차은정 권혜윤 김성인 옮김, ㅇㅣㅂㅣ, 255쪽)
‘educere’는 선을 세상 속으로 펼쳐내도록 끄집어내는 교육이다. 선에게 배움이란 뻗어가고 끌어내서 서로 엮이기이다. 선이 잘 배우려면 세상 속으로 자신을 펼쳐내고 다른 선들과 서로 뒤얽혀야 한다. 이 배움은 세상의 모든 것으로부터 가능하다. 주위의 생명과 사물, 날씨와 대기, 분위기와 같은 눈에 보이지 않는 온갖 것들에도 이끌리면서 위험한 것은 없는지 살피고 붙잡아야 할 것과 살짝 피하고 돌아가야 할 것들을 잘 판단해야 하는데, 이때 필요한 것이 주의력이다. 주의력은 세상의 온갖 것들로부터 배울 수 있는 힘으로, 배움은 그 배움의 자리에서 벗어날 때 일어난다. 선의 이 ‘자리에서 벗어나기’는 ‘그’ 자리에 어떤 스승들과 배울 것들이 있었는지를 아는 것으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인문세에서 고래부족 체력장을 열었을 때의 일이다. 고래 디자인이 찍힌 티셔츠를 참가자들에게 발송하는 일을 이기헌 선생님께서 맡아 하셨는데, 폭주하는 참가 신청으로 티셔츠 발송량이 너무 많아 내가 그 일에 힘을 보태게 되었다. 사실 택배 발송이야 손쉬운 일이라 별 일이 아니라고 생각될 수 있지만 이 일은 여느 택배 발송과는 달리, 인문세 고래부족 되기에 참여해주신 선생님들과 함께 공부하는 선생님들에게 감사의 인사로 전달하는 것이기에 주의 깊게 살펴야 할 것들이 자잘하게 있었다. 이기헌 선생님이 닦아주신 길을 따라 인사말을 프린트하고 거기에 받는 사람의 이름을 손으로 적었고, 티셔츠를 그냥 박스에 넣어 보낼 수는 없기에 티셔츠를 담을 수 있는 깨끗한 비닐도 티셔츠 사이즈에 맞게 준비해야 했다. 그리고 티셔츠를 보내고 나서 몇몇의 선생님들께 인문세 고래부족 체력장 이벤트에 대한 소개와 티셔츠 발송에 대한 메시지를 보내는 일도 여러 조건을 고려해 고민을 꽤 해야 하는 일이었다. 나는 이 일에서 굳이 하지 않아도 문제가 되지 않을 일을 세세하게 챙기고 정성을 다하는 이기헌 선생님의 흔적을 통해 그 마음이 닦은 길을 보게 되었다.
팀 잉골드는 이런 배움을 등에 사로잡히는 배움이라고 한다. 등에 사로잡히는 배움은 앞 사람의 뒤를 쫓아가면서 ‘이미 있는’ 수많은 것에 모든 감각을 열고 주의를 기울일 때 일어난다. 그리고 우리 주위에는 사로잡을 온갖 것들이 넘쳐난다고 그는 말한다. 방향은 있지만 정해진 경로가 없이, 앞선 사람들의 등을 보고 그들의 행로를 따라갈 때 배움이 일어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