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학 탐구생활》 편집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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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학을 나눌레오] 하나가 되는 형식
하나가 되는 형식
2024.8.25. 최수정
나는 ‘형식’이라는 것을 싫어했다. 내가 정한 것도 아니고 원하지 않는 삶의 형식으로 나의 자유로운 행동이나 사고가 규제를 받는다고 생각했다. 바쁜 일상 속에서 1년 내내 명절이나 제사, 일가친척들의 경조사에 동원되며 기쁜 마음도 잠시뿐, 반복되는 형식 참여가 힘들고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누군가는 그 형식들이 있어서 가족 간, 마을 간, 이웃들 간 연대가 만들어진다고 하는데, 때로 그것은 연대는커녕 불화의 장이 되기도 했다. 명절, 제사, 결혼, 장례식을 위해 며칠씩 고단한 노동에 시달리고 지치면서 다툼이 늘어나고 원망이 커지는 것을 보며 도대체 전통이라는 형식이 무엇인데, 그 때문에 지금을 사는 사람들이 이토록 힘들게 하는 일이 옳은 일인지 의심이 들었다.
애초에는 누군가를 기억하고, 감사하고 축하하기 위한 형식들이었을 것이지만 지나치게 의례화되어 있고, 그것을 위해 누군가의 희생이 필요한 것 같은 모습에 반감이 들었다. 또한 가족을 위해, 사회를 위해, 공동체의 명분을 위해 강제적으로 행해지는 형식에 참여하며 개별적 존재로서의 ‘나’의 자리가 사라지는 것 같아 불편하기도 했다. 나는 나의 개성을 강조하며 원하지 않는 형식에 붙들리지 않고 자유로운 영혼인 된 것처럼 수많은 형식을 무시하고 살고 싶었다. 형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마음이 중요한 것이지 겉으로 보이는 것이 뭐 그렇게 중요하다고. 보이기 위한 겉치레를 위해 들이는 시간과 노력 대신 차라리 잠이나 자는 것이 좋지 않을까 생각했다. 형식을 치르느라 번거롭고 수고스러운 시간이 부질없고 아깝게 느껴졌다.
그것은 누군가의 형식에 참여하는 것도 그렇지만 내 삶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사회생활을 위해 간혹 누군가의 형식에 참여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지만, 내 삶의 형식은 내 맘대로 걷어내며 살고 싶었다. 독립된 어른이 된다는 관문을 통과하는 결혼식도 굳이 하고 싶지 않았지만, 해야 한다고 하니까 후딱 해치우는 마음이었고, 결혼 후도 기념일을 따로 챙기지도 애써서 생일이나 기억할 일을 드러내지도 않았다. 해마다 돌아오는 그날이 뭐 그렇게 특별하나 싶었다.
돌이켜보면 나의 이런 사고방식에는 세상은 혼자서도 잘 살 수 있다는 생각과 중요한 것은 따로 있고, 그중에서도 가장 소중한 것은 나의 감정과 생각이라는 사고가 깊게 자리 잡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나에게 어떤 일이 생겼을 때 아무것도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역시 어떤 형식도 절차도 중요하지 않았다.
갑자기 집에 환자가 생기자 나는 내가 있던 공부의 장에서 모든 형식을 일방적으로 무시하고 관계를 단절했다. 그때 그것은 나에게 너무나 당연하고 두 번 생각해 볼 일이 아니었다. 그 순간 나의 감정만큼 중요한 것이 있을 리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곧 얼마 지나지 않아 느끼던 고립감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나는 그때 처음으로 내가 살고 있었던 자리를 돌아보았다. 인생 최대의 고비라고 생각했던 때 비로소 내가 살아온 삶의 형식들을 돌아보게 된 것이다.
그리고 내가 <인문공간세종>에서 공부하는 것을 좋아했던 이유가 그 공부 공간 사람들이 만들어가는 형식 때문이었다는 것을 생각해 보게 됐다. 그 형식들은 내가 겉치레라고 여겼던 그런 것이 아니었다. 같이 말하고 행동하며 그 순간 그 상황 속에서 함께 무언가 되어가고 있는 듯한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거기 있는 사람들이 말과 행동으로 만들어내는 형식은 내가 되고 싶고 흉내내고 싶은 것들이었다. 지금과는 다르게 살고 싶었고, 내 삶에 변화가 필요하다고 느꼈기 때문에 나는 그곳에서 공부하는 것을 좋아했고, 언제나 거기 있고 싶었던 것이다. 어쩌면 내가 그곳에서 공부했던 것은 나의 본능적 감각이었을 수도 있었다. 활기 넘치는 삶의 흐름 형식에 동참하고 싶은 본능이었을 수도 있었다.
형식을 통해 되어가는 나
인류학 공부를 하다 보면 몸과 사회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나와 사회의 관계는 어떤 것일까. 나의 몸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나’로만 존재할 수 없다. 태어나면서부터 부여된 형식들에 의해 닦여진 ‘나’라는 존재가 있다. 지금의 내가 있기까지의 수많은 형식적 의례가 있었다. 내가 좋았던 싫었던 나는 그 과정을 통과해서 지금의 내가 되었다.
형식들이 겉치레가 아니라 반복을 통해 사회에서 자기 자리를 확인하고 새기는 일이다. 개별적 존재로서의 ‘나’가 있을 수 있는가. 수많은 의례 형식을 함께 치르면서 공동체의 일원으로 ‘새롭게 태어난다’는 의미를 생각해 보게 된다. 일상 속 나의 존재가 의례에 참여하며 새로운 존재가 된다. 형식적 의례에서 자기 존재 의미를 자각할 수 있다. 반복되는 의례로 형식을 몸에 새기며 억지 형식으로라도 다시 한번 자기 자리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의례의 형식, 범고래 체력장
생명이 있는 것들은 모두 숨을 쉰다. 그러나 이토록 당연한 생각을 깊이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 <인문공간세종> 범고래 체력장을 위한 준비를 하면서 참으로 오랜만에 숨을 헉헉 대며 ‘숨’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답답한 가슴을 빨리 비우기 위해 맹렬하게 새로운 공기를 빨아들이고 내쉬면서 현기증을 느낄 때, 머리 속에서 무언가 뒤섞이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생명은 모두 하나의 폐로 연결되어 있다’는 말이 떠올랐다. 그렇다. 호흡을 해야 살 수 있는 생명은 모두 누군가 내뱉은 숨을 들이마셔야 한다. 내가 들이마신 숨은 내가 그토록 증오하는 사람의 숨일 수 있고, 혐오스럽고 징그럽다 생각하는 파충류의 숨일 수도 있다. 내가 그들이 싫다고 해서 그들이 내뱉은 숨을 들이마시지 않을 수 없다.
2024년 6월 18일 화요일, 새벽 5시 40분에 부천팀 4명은 진진샘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세종으로 출발했다. 이유는 단지 함께 걷고 달리기 위해서였다. 함께 보조를 맞추며 그들의 숨을 바로 곁에서 느끼고 그들이 내뱉은 끈끈한 숨을 받아 내가 다시 숨을 쉬기 위해서였다.
약속된 장소에서 8시 40분에 모두 함께 출발! <인문공간세종>이 있는 건물 1층에서 시작해서, 세종 호수 공원 4Km를 돌아 50분 안에 돌아와야 한다. 별로 어려운 미션이 아닌 것 같지만, 기온은 빠르게 오르고 햇빛은 더욱 하얗고 눈부시게 타오른다.
이게 뭐라고 긴장이 된다. ‘범고래 체력장’이라는 것이 형식일 뿐일 수 있지만, 이 형식을 통과하는 데 나에게는 누구보다 큰 의미가 있다. 나는 지금 숨 쉬는 일을 잊고 사는 것처럼, 너무나 당연하고 평범한 형식을 멈췄을 때, 그것일 얼마나 커다란 파장을 가져오는지 깨닫고 있는 중이기 때문이다. 마치 숨 한 번으로 모든 관계를 들이마시듯 단 하나의 형식에 얼마나 많은 절차와 의례적 관계가 얽혀 있는지 생각하게 된다.
<인문공간세종>의 스텝 모두가 모였다. 그러나 나는 아직 스텝이 아니다. 나와 옥현샘은 이 형식을 통해 새로운 스텝이 될 것이다. 우리는 모두 흰 바탕에 검은 범고래가 그려진 티셔츠를 입고 있다.
이 티셔츠야말로 정말 <인문공간세종>의 성격을 가장 잘 말해준다. 동화인류학팀은 얼마 전 ‘타카하다 이사오 전’이 열렸던 세종문화회관 미술관에 다녀왔다. 전시 관람 수 그날 미술관 카페에서 달남과 이기헌 선생님, 나와 남연아 선생님이 웃고 떠들며 즉흥적으로 티셔츠를 제작해보자. 스티커를 그려 다리미로 다려 붙여서 범고래 티셔츠를 만들어 보자고 농담 삼아 했던 이야기가 이렇게 현실이 되어 우리가 모두 함께 입고 있다. 말의 실행력! 이것이 <인문세>의 저력이다. 말한 하면 현실이 된다. 우리는 현실을 창조하는 사람들~
인문세 회원 정혜숙 선생님이 직접 디자인하고, 이기헌 선생님이 바로 제작 주문하신 검은 범고래가 그려진 흰 셔츠를 입고 햇빛 속으로 유영하듯 나아간다. 각오는 단단하다. 오늘 이 체력장 형식의 의례를 통과해야 말의 힘을 지닌 이들과 계속할 수 있다. 올라가는 기온에 따라 곁에 있는 사람들의 후끈후끈한 열기도 강해진다. 곁에 있는 사람들과 호흡을 맞추고, 숨을 섞으며 하나됨을 느낀다. 지금 여기 있는 선생님들과 4년 가까운 시간을 함께 공부하고 글을 썼다. 개인적인 문제로 잠시 이들을 떠났을 때 어떠했던가.
멀리서 <인문공간세종>을 떠올릴 때 나는 달님을 떠올렸던가? 아니다. <인문세>의 대외적인 모든 일에 직접 나서며 언제나 발 빠르고 손 빠른 강평 선생님, 그야말로 우리의 금손 연금술사 이기헌 선생님, 누구의 빈자리도 빈틈없이 채우는 이진진 선생님, 아름다운 동영상과 카드뉴스 제작자 조혜영 선생님, 누구에게나 힘이 되어주고 언제나 적극적인 안보나 선생님, 영어 번역 세미나를 이끌어 주시는 윤연주 선생님. 이들 모두가 자기 재능이 되는대로 혹은 안되더라도 그냥 한번 해보면서 모든 일에 즉흥적으로 모였다 흩어지는 그곳. <인문공간세종>에 돌아가고 싶었다. 그들 옆에서 그들이 훅훅 내뿜는 활기의 숨을 들이마시고 싶었다.
오늘 <인문공간세종>의 범고래 체력장은 나를 위한 체력장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위주로 생각하는 법! <인문세> 선생님들의 숨을 나누는 이 입문식을 통해 새로운 마음으로 스텝의 리듬을 맞추는 중이라는 것을 느낀다. 주인이 따로 없는 이 리듬에 섞여 들어가기 위해 발맞추어 호흡을 따라가는 이 의식을 꼭 통과해야 한다. 그래야 <인문세> 스텝의 일원으로서 한가닥 활기를 보탤 수 있다.
누군가는 묻는다. <인문세> 스텝을 하면 뭐가 좋아요? 무거운 책무만 있는 것 같은데 꼭 그것을 하고 싶나요? 가볍게 스텝 밖에서 공부만 해도 되지 않나요? 그러나 그것은 모르는 말씀. 스텝 밖에서 몇 달 있어 본 제가 잘 압니다. <인문세> 스텝 안에서만 느낄 수 있는 생동감, 말을 하면 모든 것이 현실이 되는 그 현실성이 얼마나 나를 살아있다고 느끼게 하는지! 그동안 <인문세>에서 공부하시던 최옥현 선생님은 근거리에서 이를 알아보셨다. 그래서 그녀도 오늘 스텝에 도전! 꼭 함께 통과해서 새로운 스텝 동기가 되어 보아요.
나는 오늘 범고래 체력장을 나의 입문식이라 생각하고 누구보다 열심히 뛰었다. <인문세>라는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는 이 공간은 때에 따라, 문제에 따라, 스텝들이 스스로 자기 자리를 만들어 갈 때 눈앞에 드러난다. 이곳은 모두가 함께할 때만 드러나는 장소다. 우리가 만들어가는 현실적 공간이다. 이 얼마나 놀라운가! 나는 이곳에 꼭 들어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