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학 탐구생활》 편집실
답사 가고 글을 쓰고!
[인류학을 나눌레오]선으로서의 배우기
선으로서의 배우기
이상한 공부
우리 집에는 학생(學生)이 둘 있다. 오로지 좋은 대학 진학을 목표로, 시험에서 고득점을 얻기 위해 공부하는 수험생과 인문공간세종에서 세미나를 하고 책을 읽고 숙제 하고 답사를 가며 공부하는 내가 그 주인공이다. 공부는 뭣보다 많이 아는 게 제일이기에 아이는 오늘도 책상에 머리를 파묻고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학교에서 배운 내용을 복습하고 중요한 개념들을 열심히 외운다. 그날그날을 허투로 보내지 않으려고 들어야 하는 강의와 학습해야 할 내용, 풀어야 할 문제집의 계획표를 짜고 실행 여부에 따라 ○, ×, △를 체크하며 모든 일과를 공부에 집중하고자 애쓴다. 입시결과가 좋다는 학원을 알아보고 유명하다는 선생님을 수소문하고 적중률이 높은 컨텐츠를 제공한다는 수업을 수강하며, 전략적인 공부도 놓치지 않는다. 외식 한 번 하자 해도 시간이 아깝다, 책을 추천해줘도 그럴 바엔 문제집을 풀겠다며, 대학 합격 전까지는 공부에 필요한 것 외에 어떤 것도 안 하겠단다. 나 또한 어떻게 하면 좋은 결과가 나올까를 고민하며, 시험 점수가 인생의 성적표인 마냥 노심초사다. 그래서 공부를 잘하느냐는 둘째로 하고서라도, 아이의 모든 일상은 좋은 성적 내기에 올인(all in)되어 있다.
인문공간세종에서 인류학을 공부하는 나는 책을 읽고 세미나를 하고 글을 쓰고 답사를 간다. 그리고 공부한 것을 나누기 위해 잡지를 만드는 등 시스템이 갖춰진 곳에서 공부하는 게 아니기에 공부하는 장(場)을 함께 만들어가는 다양한 활동들을 한다. 아이는 엄마가 매일 공부를 한다며 분주하게 지내긴 하는데, 자기들처럼 학교나 유명한 선생님한테 수업을 듣는 것도 아닌 것 같고 뭘 물어봐도 대답을 척척 못해내는 게 별 볼 일 없어 보였는지, 공부를 왜 하냐고 꿈이 뭐냐고 물어 온다. 복잡한 개념과 원리를 배우고 아는 것을 늘려가며 지식을 차곡차곡 쌓아가는 자신과 달리, 엄마가 뭔가 열심히 읽고 공부하긴 하는데 별로 아는 지식도 없고, 공부하러 간다며 박물관이나 다니고, 작가가 될 것도 아니라면서 무슨 글을 그렇게 쓴다고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지, 딴에는 이해가 안 되는 모양이다. 아이의 눈에만 그런 게 아닌 것이, 주위 사람들도 무슨 자격증 공부를 하느냐 그럴 바엔 대학원에 가는 게 어떠냐 등단할 일만 남은 거냐며, 모두들 비슷한 이야기를 한다.
어느 날 아이가 내게 국어 모의고사 문제집을 주며 그것보다 이걸 공부해 보는 게 어떠냐고 했다. 얼떨결에 그런 공부도 좋아한다며 문제집을 받아 챙겨놓고 생각해보니, 그래도 그 공부보다는 내가 하는 공부가 삶을 배우고 성장하는 데 더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 눈에는 공부같이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세상을 보는 눈이 좋아진다고 느끼는 이 배움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런 질문을 품고 있던 중 나는 인문세에서 『라인스Lines』(팀 잉골드 지음, 김지혜 옮김, 포도밭, 2007)의 일부분과 『모든 것은 선을 만든다 The Life of Lines』(팀 잉골드 지음, 차은정 권혜윤 김성인 옮김, 이비, 2015) 전체를 읽고 진행된 <선인류학:line-anthropology> 특강을 들었다. 팀 잉골드는 알아야 할 지식을 많이 집어넣는 기존의 배움과는 달리, 배움을 ‘자기 자리에서 벗어나는 것’으로 정의한다. 나는 이 글에서 그의 ‘선학(線學)’을 간략하게나마 소개하고 이를 통해 그들과 나의 만나지 않는 이 배움에 대해 설명해보려고 한다. 먼저 생명을 선으로 정의하고, 세상을 선의 뒤얽히는 생성의 공간으로 바라보는 그의 관점부터 따라가 보자.
덩이 말고 선
우리는 생명을 체적을 가진 덩어리의 모습으로 떠올린다. 어떤 형태를 띠고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생명은 자기 신체를 가지고 있으며, 이 몸을 유지하고 자기 자리를 지켜내는 것이 살아남는 길이다. 이를 잃어버리는 순간 생명은 이 세상에 사라진 것으로 여겨진다. 팀 잉골드는 생명의 이런 모습을 ‘덩이’라고 하며, 외부와 구별되는 명확한 경계가 있는 덩이의 형태가 아닌, 선의 뒤얽힘으로 생명을 이해하고자 한다. 그는 자신의 저서 『라인스』에서 균사체를 생명의 전형으로 삼는데, 균사체는 내부와 외부가 없고 그 모습이 덩이로 형태화되지 않으며 균사체의 선들은 온갖 방향으로 뻗어가며 주변에 침투한다. 생명을 덩이로 바라보는 관점은 너와 나를 구분하게 하고 자기 자리와 서로의 경계만 확고히 할 뿐 각 개체들이 서로 얽혀드는 삶의 모습을 보지 못하게 하고 그 모습을 설명할 수도 없게 한다고 그는 말한다. 그에게 삶이란 너와 나를 구분하고 자기 영역을 지키고 확장하는 일이 아닌, 서로의 경계가 중첩되고 상호 침투하는 동적인 이미지다.
생명을 덩이가 아닌 선의 얽힘으로 바라볼 때 달라지는 것을 뭘까? 덩이는 눈에 보이는 형체를 가지고 있고 그것이 사라지면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겨진다. 지금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하고 다른 생명이나 물질에게 남긴 어떤 흔적이나 영향은 거의 고려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개체의 삶에서 어느 한 쪽이 자신을 지키거나 상대를 무화시키는 방식이 중요한 존재의 방식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선으로서의 삶the life of lines’은 주위의 생명과 사물, 온갖 것들을 붙잡기도, 쓸고 지나가기도, 침투해서 빠져나가기도 하며 서로 뒤얽힌다. 이때 선으로서의 생명은 대기, 날씨, 분위기와 같이, 덩어리의 형태를 가지고 있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것들까지도 포함된다. 온갖 생명들과 연결되고 뒤얽히는 선으로서의 삶에서 중요한 것은 나를 고집하고 불리는 일이 아닌, 쉼 없이 움직이고 서로 연결되는 뒤얽힘 속에서 다른 선들의 흔적을 주의 깊게 파악하는 일이다.
생명을 덩이와 선의 조합으로 정의하게 되면 배움의 이미지도 달라진다. 덩이는 배움에 있어 주체와 대상,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 배움의 목적과 배워야 할 것이 명확히 정해져 있다. 즉 나와 너의 경계를 명확히 하고 구분하며, 자신의 영역을 고정시키고 확장시키기에 덩이에게 잘 배운다는 것은 자신의 자리에 주어진 일들을 얼마나 잘 수행하며 나를 확고히 하는가이다. 하지만 선에게는 이 모든 것들이 선재해 있지 않다. 선은 누구에게나 선생님이 될 수 있으며 누구에게서나 배울 수 있고, 배워야 할 것이 따로 없으며 어떤 것으로부터도 배울 수 있다. 선에게 잘 배운다는 것은 자신과 뒤얽힌 선들 속에서 배울 것을 찾아내는 상상력의 힘에 있다.
선으로서의 인류학 공부
인문세에서는 ‘인류학’을 공부한다. 이번 시즌 인류학 세미나에서는 빙하 시대 이후 급변하는 자연환경에 적응하며 살았던 현생 인류의 삶을 그려낸 『빙하 이후』(스티븐 마이든 지음, 성춘택 옮김, 사회평론아카데미)를 주교재로, 그들의 흔적을 지금 우리의 관점에서 자의적으로 해석하지 않기 위한 몇 권의 참고도서를 부교재로 함께 읽으며 구석기 인류를 공부했다. 또 인류학 세미나에서 공부하고, 책에서 읽은 인류의 흔적을 집적 보기 위해 유적지나 박물관을 방문하고, 거기에서 떠오른 생각거리를 답사기로 마무리하는, 인문세의 3단 콤보 ‘인류학 답사’를 네 번 떠났다.
나는 이번 시즌 인류학 세미나에서『빙하 이후』 과제를 하며 가끔 어려움을 느꼈는데, 팀 잉골드의 선학(線學)으로 그때를 해석해보니 스스로 덩이적 사고에 갇혀 있음을 알게 된다. 이 책의 저자 스티븐 마이든은 존 러복이라는 역사가를 여행자로 내세워 구석기로 시간여행을 하게 한다. 존 러복은 빙하 이후 사람들의 유적지를 따라 대륙을 이동하고 함께 생활하며 당시 그들이 어떻게 지냈는지를 보여준다. 그리고 러복의 유적지 여행 다음에는 이 생활상을 뒷받침하는, 유적지를 발견하고 유물들을 발굴한 고고학자들의 연구와 주장들이 이어진다. 이들의 견해는 다른 고고학자나 스티븐 마이든에 의해 지지를 받거나 반박되기도 한다. 내가 보기에 이 책에 등장하는 역사가 존 러복과 고고학자들, 저자 스티븐 마이든은 그들의 견해가 미래에 발굴될 유적지나 유물에 의해 언제 뒤집어질지 모른다는 점에서 모두 정답을 말하고 있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나는 진실이 아닐 수도 있고 확실하지도 않은, 단지 유물에 남겨져 있는 흔적을 통해 당시의 생활을 유추해 볼 뿐인 이야기를 왜 공부해야 하느냐는 생각이 들었고 이 중 명확해진 진실이 무엇인지를 찾으려고 애썼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 남겨지지 않은 것은 믿을 만한 것이 되지 못했고 알 필요가 없는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빙하 이후』를 읽으며 대륙 곳곳의 구석기인들의 삶을 따라가던 중, 책상에 마주앉은 딸아이가 시험을 앞두고 역사 공부를 하고 있었다. 겨우 한두 페이지로 구석기와 신석기를 묘사하고 설명한 교과서와 달리, 주먹도끼만큼의 타격감을 가졌다고 해도 될 정도로 두꺼운 『빙하 이후』로 석기 시대 인류의 생활을 공부하고 있는 나로서는, 드디어 내 공부의 위력을 드러낼 때가 왔구나 싶었다. 하지만 막상 아이에게 내가 책에서 만났던 구석기인들의 생활을 이야기해주려 했을 때, 나는 학교의 역사 공부와 인류학 공부의 결이 다르다는 것을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교과서는 인류에게 남겨진 역사 기록으로 선사와 역사의 시대를 구분하고 시대를 석기, 청동기, 철기와 같이 남아 있는 도구의 발달을 기준으로 구분하는 반면, 인류학 세미나에서 내가 읽는 책들은 지금은 사라지고 없지만 그들이 남긴 흔적으로부터 생활을 유추하며, 인류의 역사를 기록과 문명과 같이 형태를 남기는 것으로 보는 것의 의미를 생각해 보라고 했다. 둘은 분명히 관점을 달리 했으며, 형태를 남기는 덩이를 중심으로 사고하는 교과서의 관점과 유적지나 유물에 남아 있는 흔적으로부터 인류가 지나간 길을 유추해내는 인류학의 선적인 사고가 대비되어 내게 다가왔다.
이런 선으로서의 배움은 답사에도 이어진다. 이번 시즌 인류학 세미나의 답사는 구석기인들의 만능 도구 주먹도끼를 보기 위해 공주 석장리 박물관과 연천 전곡리 유적지를, 동굴벽화를 그린 인류를 이해해보기 위해 한반도의 암각화를, 이 시대를 함께 살고 있는 이들로부터 구석기인들을 이해해보기 위해 ‘우리가 인디언으로 알던 사람들’ 전시에도 다녀왔다. 책을 통해 바라본 구석기인들의 생활은 지금과는 그 간극이 너무 커 직접적으로 와 닿지도 않지만, 유물을 직접 본다고 해서 드라마틱하게 그들이 삶이 이해되거나 현실적으로 다가오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세미나에서 공부한 내용을 확인하고 그 앎을 확실히 하고자 답사를 가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답사 3단 콤보를 통해 하고자 하는 일은 그들의 삶을 이해함을 통해 내가 있는 이곳으로부터 멀어지기, 내 삶을 낯설게 보기이다. 나의 경우 인류학 수업을 통해 갖게 된 관점과 정보는 사실 답사에서 여러 유물들(정말 많은 유물들을 본다)을 보는 동안 더욱 산만하게 흩어진다. 그러다 답사가 진행되는 동안 또는 마무리하며 학인들과 나누는 이야기들 중 생각들이 서로서로 연결되며 저 이야기를 들으니 이걸 좀 더 생각해 볼 수 있겠다는 아이디어가 몇 가지 떠오르면서 좁혀진다. 이때 내가 처음 떠올렸던 생각거리는 버려지기도 하고 다른 학인의 생각으로부터 또 다른 생각거리가 떠오르기도 하는데, 내 생각이 따라가고 얽히게 되는 방향을 결정하는 것이 상상력이라고 팀 잉골드는 말한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의 주제로 매듭지어지는 것은 답사기를 쓰면서부터인데, 그것이 뭐가 될지는 정말이지 써봐야 알게 된다.
내가 주로 공부하는 인류학은 내 시선을 지금 여기로부터 확장시킨다. 학인들과 함께 하는 세미나는 서로의 생각이 얽혀들게 한다. 이렇게 뻗어나간 배움을 통해 나는 지금 여기를 다시 보게 된다. 나는 앎과 동시에 내 앎이 깨지는 경험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