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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강남의 생각>에서는 만물이 하나임을 통찰하는 오강남 선생님의 ‘아하’ 체험을 매월 게재합니다. 비교종교학자이신 선생님께서는 종교란 우주의 모든 것이 서로 연결되고 의존하고 있음을 알아차리는 순간의 연속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아하’ 체험이 가능하도록 깊은 성찰의 기회를 주는 것이 종교의 역할이라고요. 오강남 선생님은 캐나자 리자이나대학교 명예교수로 북미와 한국을 오가며 집필과 강의, 강연을 하고 계십니다. 선생님의 저서로는 『예수는 없다』, 『진짜 종교는 무엇이 다른가』, 『오강남의 그리스도교 이야기』, 『세계 종교 둘러보기』, 『종교란 무엇인가』, 『불교, 이웃 종교로 읽다』 등이 있습니다.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한 몇 가지 제언

작성자
inmoonse
작성일
2024-06-21 12:15
조회
286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한 몇 가지 제언


오강남(캐나다 리자이나 대학교 종교학 명예교수)

 

2024년 4월 17일 KMA(Korean Mangement Association)이 주최하는 수.지.향 (수요일에 만나는 지혜의 향연)에 와서 이야기하라는 초청을 받았습니다. 강남에 있는 노보텔 앰배서더에서 새벽 6:40에 모여 아침 식사를 하고 7:20부터 8:40까지 강연, 8:40부터 9:00까지 질의응답 시간을 가졌습니다.

저에게 주어진 제목은 “우리는 두려움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강연에서는 PPT로 강목을 보여주면서 이야기한 것을 다시 말하는 투로 바꾸어보려고 합니다.

 

서론

저를 이렇게 큰 모임에 초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보고 “두려움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가?”하는 제목으로 말하라고 부탁하셨는데, 제가 이 자리에 서니 영광스러움과 함께 두려움이 엄습해 오는 것 같습니다.(웃음)

사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불안과 예측불가의 시대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특히 우리나라는 행복지수가 OECD 국가 38개 중 35위라고 합니다. 이런 시대, 이런 사회에 살면서 조금이라도 두려움이 없이 살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제언이 두려움을 극복하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비교종교학자로서 일단 중요 종교의 가르침에서 얻을 수 있는 제언을 생각해보았습니다. 그리스도교, 노장사상, 불교에서 도움이 되는 생각들을 소개하고, 여러분이 권장 도서로 채택하신 저의 『오강남의 생각 』이라는 책에서 한 두 가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1. “진리를 알지니”


예수님: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8:32)고 했습니다. 여기서 진리라는 것은 어떤 이론이나 교리가 아니라 사물이 있는 그대로의 본모습, 실재, 사실, fact, reality를 의미합니다. 근거 없는 두려움은 우리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할 때 생기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느 사람이 칠흑 같이 어두운 밤길을 가다가 낭떨어지에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용케 나뭇가지를 붙들었습니다. 소리를 질러도 들어줄 사람도 없고 죽을 힘을 다해 나뭇가지를 붙들고 있다가 결국 힘이 빠져 나뭇가지를 놓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제 죽는구나 생각하고 있었는데, 지금껏 자기가 붙들고 있던 곳에서 땅까지는 겨우 몇십 센치에 불과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옛날에는 바다에 끝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항해가 자유스럽지 못했습니다. 멀리 나갔다가는 바다의 끝에 이르면 물결에 휩쓸려 나락으로 떨어질지 모를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바다에 끝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바다 끝에서 떨어진다는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한 가지만 더 예를 들면 아기를 낳고 못 낳고 하는 것이 삼신 할머니에 의해 결정된다고 생각했을 때는 삼신 할머니가 무서웠지만 이제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니 그만큼 자유스러워지고 두려움도 없어졌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실재를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을까요. 무엇보다 시각주의(視角主義 perspectivism), 다원주의 시각(多元主義 視角 pluralism)의 함양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시각주의란 한 가지 사물을 여러 가지 시각에서 관찰하는 것입니다. 찻잔을 위에서 보면 동그랗지만 옆에서 보면 직사각형입니다. 어느 한 가지 시각을 절대화하지 않고 다원주의적 관점에서 사물을 보는 일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뿐만 아니라 이웃과의 대화를 통해 다른 의견도 알아보는 것입니다. 이른바 화이부동(和而不同)입니다.

 

2. “이 또한 지나가지라”

두려움을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 태도는 무엇이나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생각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노자(老子)님이 썼다고 알려진 『道德經』 제40장에 보면 “되돌아옴이 도의 움직입니다.”(反者道之動)고 했습니다. 반(反) 환(還) 복(復) 귀(歸) 등은 『도덕경』전체를 통해 일관되게 흐르고 있는 사상입니다.

어느 사물이 한쪽으로 치달아 어느 시점에 이르면 그것이 되돌아온다는 것입니다. 그네와 시계추가 가장 쉽게 볼 수 있는 예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달도 차면 기울고 기울어 없어지면 다시 차고, 바다도 밀물이 극에 달하면 썰물이 시작되고 썰물 끝까지 가면 다시 밀물이 시작되고, 밤도 가장 어두우면 다시 밝아지기 시작하고, 가장 밝은 시점에는 다시 어두어지기 시작하고, 계절도 가장 더우면 다시 추워지기 시작하고 가장 추우면 다시 더워지기 시작하는 것과 같은 현상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현상을 말해주는 사자성어가 새옹지마(塞翁之馬), 전화위복(轉禍爲福), 고진감래(苦盡甘來), 영고성쇠(榮枯盛衰)입니다. 삶은 한 가지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청실홍실 엮이며 진행된다는 것입니다.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습니다. 영어로 Ups and Downs라고 합니다.

『도덕경』 제58장입니다. “화라고 생각되는 데서 복이 나오고 복이라고 생각되는 데 화가 숨어 있습니다.”(禍兮福之所倚 福兮禍之所伏). 지금 불행하다고 너무 걱정하지도, 지금 행복하다고 너무 기뻐하지도 말 일이라는 것입니다. 일희일비(一喜一悲)하거나 두려워하지 않는 자세, 의연(毅然)함, 평정심(平靜心)을 유지할 수 있는데 도움이 되는 생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같은 도가 사상가 장자가 썼다는 『莊子』라는 책에 보면 내가 나를 여의었다, 나는 나와 사별했다는 오상아(吾喪我), 나 중심적인 이기적 마음을 굶긴다는 심재(心齋), 앉아서 모든 것을 잊어버린다는 좌망(坐忘) 등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모두 우리의 자의식에서 해방된 새로운 의식, 의식의 변화를 경험하게 되면 사물을 제대로 볼 수 있고 이에 따라 근거없는 두려움이나 불안 불만에서 해방될 수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3. 삶이 본래 괴로움임을 인정한다

두려움을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되는 가르침 중 하나는 부처님의 가르침이라 생각합니다. 부처님의 처음 가르침이 이른바 ‘사제(四諦) 팔정도(八正道)’입니다. 네 가지 진리와 여덟겹의 길이라는 뜻입니다. 사제를 한문으로 고집멸도(苦集滅道)라 합니다. 삶이 본래 괴로움이라는 것, 괴로움이 생기는 원인, 괴로움을 없앨 수 있다는 것, 그 괴로움을 없애는 길, 이 네 가지입니다.

첫째 진리는 삶이 본래 괴로움이라는 것을 알라는 것입니다. 괴로움을 산스크리트로 ‘두카’라고 하는데 바퀴의 축에 기름이 들어가 두드럽게 돌아야 하는데, 거기 모래가 들어가 삐걱거리는 상태를 말한다고 합니다. 괴로움은 구체적으로 여덟 가지라 봅니다. 이른바 사고(四苦)팔고(八苦)라는 것입니다. 생로병사(生老病死)가 사고(四苦)이고 싫어하는 것을 만나는 괴로움이라는 원증회고(怨憎會苦), 사랑하는 것과 멀어지는 괴로움이라는 애별리고(愛別離苦), 구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구부득고(求不得苦), 모든 것이 결국 괴로움이라는 오온성고(五蘊盛苦), 이렇게 모두를 합해 팔고(八苦)라 합니다.

둘째 진리는 괴로움의 원인이 ‘목마름’이라고 진단합니다. 집착, 욕심, 정욕 등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셋째 진리는 괴로움을 없앨 수 있다는 진리입니다. 우리의 탐욕이나 정욕의 불꽃을 ‘확 불어 끈(blown-out)’ 상태가 열반(nirvana)입니다. 무거운 집을 지고 산으로 올라가 산 꼭대기에서 짐을 내려 놓을 때의 시원함입니다. 자유입니다. 이 셋째 진리는 두려움을 포함한 모든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인간 승리의 선언입니다.

넷째 진리는 괴로움을 없애는 길입니다. 이른바 여덟 가지의 준수 사항을 따르면 결국 괴로움을 없애고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여덟 가지는 정견(正見), 정사(正思),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 정정진(正精進), 정념(正念), 정정(正定)입니다. 정업은 바른 행동, 정명은 바른 직업이라는 뜻이고 정념은 요즘 많이 알려진 ‘마음 챙김(mindfulness)’ 곧 우리의 생각이나 움직임을 최선을 다해 관찰하라는 뜻입니다. 영어로 Watch yourself.라 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불교에서 많이 알려진 『보왕삼매론(寶王三昧論)』의 처음 두 절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1. 몸에 병이 없기를 바라지 말라. 몸에 병이 없으면 탐욕이 생기기 쉽나니,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되 병고로써 양약을 삼으라 하셨느니라.

       2. 세상살이에 곤란함이 없기를 바라지 말라. 세상살이에 곤란함이 없으면 업신여기는 마음과 사치한 마음이 생기나니, 그래서 성인이 말씀하시되 근심과 곤란으로 세상을 살아가라 하 셨느니라.

 

4. 노년의 특권을 인지하라

인간 사회에는 여러 가지 차별이 있습니다. 인종차별(racism), 성차별(sexism)이 그 대표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연령차별(ageism)이라는 말이 많이 회자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노인이라고 기죽어 살 필요가 없습니다. 인간을 다른 동물과 비교하여 지칭하는 말로 지성을 강조하는 homo sapiens, 공작하는 점을 강조하는 homo faber, 종교성을 강조하는 homo religiosus, 상징 사용을 강조하는 homo symolicus 등이 있습니다.

그런데, 네덜랜드의 철학자 Johan Huizinger(1875-1945)는 인간과 동물의 차이를 지적하는 말로 homo ludens(놀이하는 인간)라는 말을 제창했습니다. 그에 의하면 인간은 놀이에서 가장 창조적이고 생산적이 될 수 있고, 이런 점 때문에 인간이 다른 동물과 구별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놀이를 하려면 시간적 여유가 있어야만 합니다. 젊었을 때는 생활전선에서 정신을 차릴 여유가 없었지만 은퇴 후에는 시간적 여유가 더욱 많을 수 있고, 따라서 놀이를 더욱 즐길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은 은퇴 후 더욱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삶을 영위할 가능성이 그만큼 커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기죽어 의기소침해 있거나 공원 벤치에 앉아서 벤치만 따뜻하게 하는 대신 무엇이나 창조적이고 사회에 도움이 되는 일을 찾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죽음이란 어짜피 오는 것, 장자가 한 말처럼 4계절이 바뀌는 것처럼 자연스런 현상이니 죽음을 껴안는 안명(安命)의 태도를 갖는 것이 좋을 것이라 여겨집니다.

 

 5. “누구도 외딴 섬일 수 없다” – 존 던

하버드 대학교 2018년 졸업식에서 졸업생 대표로 나온 박진규 학생의 연설이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박 군은 하바드 대학 재학 중 세계에서 가장 권위있는 로즈 장학생(Rhodes Scholar)으로 선발되어 규정에 따라 옥스퍼드 대학에서 일년간 공부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하버드 대학 졸업생 대표로 연설하면서 자기도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입학할 당시 “나는 나의 재능을 가지고 무엇을 할까 What am I going to do with my talents?”고민했는데, 학교 생활을 하면서 자기의 오늘이 자기 혼자의 노력으로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재능은 부모의 덕, 학교 식당에서 일하는 분들, 도서관에서 재료를 찾아주시는 분들, 학교 미화원들, 친구 등등 우리가 알지 못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사회적 협력’과 ‘합동 프로젝트’로 얻어진 ‘공동의 자산’이라는 것을 알고 이제 질문은 “나는 나의 재능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무엇을 할까 What am I going to do ‘for others’ with my talents?”로 바뀌었다고 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덕택을 감지하는 이 정도만 해도 훌륭합니다. 이런 생각을 좀 더 확대하면 우리는 우리 주위의 사람들의 덕만 보는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먹는 쌀을 생각해 보면, 쌀이 있기 위해서는 물이 있어야 하고 물이 있기 위해서는 구름이 있어야 하니, 쌀 속에는 구름이 있는 셈입니다. 구름 뿐 아니라 햇볕도, 땅도, 바람도 있어야 하고 농사짓는 농부도, 농부의 부모도, 농기구도, 농기구를 만드는 대장간 주인도, 쇠를 품은 광산도, 그것을 찾아내는 광부도, 쌀을 실어나르는 기차도, 기차를 만든 사람도, 철로를 깐 사람도…. 이렇게 무한히 계속될 수 있습니다. 동학에서는 이런 현상을 두고 이천식천(以天食天)이라 합니다. 우리가 먹는 밥으로 하늘을, 우주를 먹는다는 뜻입니다.

이런 현상을 불교에서는 일미진함시방(一微塵含十方)이라고도 하고 이렇게 얽히고 설킨 관계를 화엄사상에서는 인드라망 세계라고 합니다. 상즉상입(相卽相入)이니 일즉다 다즉일(一卽多 多卽一), 일중다 다중일(一中多 多中一)이라는 말도 온 우주가 다 서로 연결되고 서로 의존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세계관을 가지고 살아간다면 나 혼자 외톨이라든가 무의미하게 떠다니는 부평초같은 인생이라는 생각도, 결국에는 두려움도 외로움도 사라지게 될 것이라 믿습니다.

 

결론

결론적으로 벼락이나 뱀 같은 실질적 두려움이기보다 우리의 형이상학적이고 근본적이고 실존적 두려움을 줄이기 위해서는 우리가 모두 ‘하나’라는 확신을 공고히 하는 것입니다. 모두 인류라고 하는 하나의 공동체의 일원으로 서로가 서로를 위한다는 동체대비(同體大悲)의 윤리적 원칙에 충실하고, 모두 동고동락(同苦同樂)하게 되면 오늘 우리를 위협하는 외로움, 불안, 두려움에서 좀 더 자유스러워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전체 1

  • 2024-07-29 16:13

    누구도 외딴 섬일 수 없다. . 너무 힘이 되는 말씀이십니다. 두려움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하나’, 충만한 우주 질서의 한 부분으로서 나를 볼 줄 알아야 되겠습니다. 동체대비와 동고동락. 도덕 교과서에나 있는 말로 그저 당연하게만 여겼던 구절이 오늘, 신선하게 다가옵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