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문화 답사
한반도 the Korean Peninsula
[한반도 중남부 선사유적 답사기] 시간을 이어주는 사람들
한반도 중남부 선사유적 답사기/2024.09.09/손유나
시간을 이어주는 사람들
시간을 품고 흐르는 느림보 강물
충북 단양군은 중기 구석기부터 사람들이 살았던 흔적이 남아 있다. 곳곳에 석회동굴과 바위 그늘이 많아 사람이 쉴 수 있는 장소를 마련해주었고, 강물이 굽이쳐 흐르면서 유속이 느리고, 곳곳에 퇴적물이 쌓여 만들어진 넓은 충적지대는 구석기인이 살기 좋은 지리적 환경이었다. 마지막 날 <단양강 잔도>를 방문했다. 단양강을 따라 잔도길을 걸으니 유유히 흐르는 강물에 맞춰 내 마음도 평온해졌다. ‘느림보 강물’이라는 별명도 있다는데 과연 유구한 자연 앞에서 인간사의 조급함이 무슨 소용인가 싶었다. 잔도길을 걸으며 강 너머 맞은편 기슭을 바라보니 4만 년 전의 시간이 흐르고 있다. 모래와 자갈돌이 있는 강변에 앉아 돌을 만지작거리며 흐르는 물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을 4만 년 전의 사람들이 그려졌다.
문득 지금의 내가 4만 년이란 긴 시간을 뛰어넘어 어떻게 그들을 알고 만날 수 있었을지 궁금해졌다. 조선 시대 실록에 보면 ‘벼락도끼’라는 기록이 여러 번 나오는데 당시 사람들은 아주 오래전 이곳에 살던 사람들이 있었음을 알지 못했다. 그래서 선사시대 사람들이 만든 석기를 발견하면 벼락이 떨어진 곳에서 발견되는 천둥과 번개의 신이 만든 도끼로 나쁜 기운과 병을 물리친다고 믿었고 임금님에게 진상하는 귀한 물품이었다. 하지만 이제 현대의 우리는 벼락도끼가 선사시대의 유물임을 안다.
수양개 선사유물 전시관
근방에 있는 <수양개 선사유물 전시관>에 방문했다. 박물관에 들어서자 거대한 매머드와 코뿔소 뼈가 전시되어 눈길을 끌었다. 1전시실은 근처 구낭굴 유적지에서 발견된 인골과 사슴, 호랑이, 하이에나 등 다양한 동물의 뼈와 화석이 전시되어 있었다. 이렇게 다양한 동물 뼈는 다른 박물관에서는 보지 못했던 터라 상당히 흥미로웠다. 2전시실에는 수양개 유적지에서 발굴된 석기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감탄했던 부분은 석기에 대한 설명이 간결하고 이해하기 쉬웠다.
하지만 <수양개 선사유물 전시관>이 나에게 특별한 이유는 따로 있다. 2전시실 한쪽 바닥에 수양개Ⅰ유적지에서 발견된 50여 개의 석기제작소를 복원해두었다. 약 1,250㎢의 Ⅰ지구 유적지를 1/10으로 축소하여 복원해두었다. 투명한 유리를 밝고 올라서면 빼곡히 들어찬 둥근 돌무더기가 보였다. 생생함에 순간 내가 고고학자로 느껴져 유심히 전시된 돌을 보고 또 보아도 대체 뭘 봐야 할지 모르겠더라. 당시 현장에서 발굴팀이 쭈그리고 앉아 내 눈에는 이리 저리보나 돌멩이로 밖에 보이지 않는 돌을 하나하나 골라내었을 것을 상상하니 그들이 쏟았을 노고에 정신이 아득해진다. 그러면서 도대체 이 발굴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궁금해졌고, 보통이라면 흘끗 보고 지나쳤을 발굴 당시의 소개와 사진을 유심히 보게 되었다.
발굴 과정의 노고
충북 단양군 수양개 유적지 발굴을 쉽지 않았다. 우리나라 다른 구석기 유적지인 공주 석장리와 연천 전곡리는 외국인이 찾아내어 각기 서울대, 연세대와 합동으로 학술발굴을 했다면, 수양개 유적지는 충주댐 수몰지역으로 단지 구제발굴 조사에 그쳤다. 당시 충북대학교를 교수이자 발굴 책임자였던 이융조 현 한국선사문화연구원 이사장은 사전 조사 당시의 상황을 전했다. 숙소도 먹을 것도 마땅치 않았고, 뱃사공이 말릴 정도로 폭우 속에서 남한강을 겨우 건너 “다음날 주변을 돌아보니 고추밭, 마늘밭, 감자밭 곳곳에서 ‘까만돌‘이 보였다. 모두 석기였다.”
충주댐이 건설되고 있었으니 이곳에서 문화재가 발굴되기를 누가 바랬을까. 문화재관리국의 비협조 속에서 어렵사리 설득하여 발굴이 이루어졌다. 유적지 Ⅰ지구에서 2만여 년 전 50개의 석기제작소를 발견했고, 다량의 좀돌날몸돌과 슴베 찌르개를 발굴했지만 1985년 충주댐이 완공됨에 따라 수몰되었다. 당시 발굴 책임자였던 이융조 이사장은 Ⅰ지구 전체 유물 출토 면적의 10%도 건지지 못하고 수몰되고 말았다며 당시의 허망함을 소회했다.
뒤어어 수양개 유적지 Ⅱ,Ⅲ,Ⅳ 지구를 발굴하였으나, 현재 Ⅳ지구 외에는 모두 수몰되었다. 아마도 긴 시간이 흘러 댐이 허물어지거나 가뭄으로 땅이 드러날 때 다시금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수양개 선사유물 전시관>도 1998년에야 박물관 공사에 착수하여 2006년 개관을 하였으니 얼마나 힘들게 발굴을 하고 남은 것들을 추려 전시관을 설립하기 위해 노력했을지 그려진다.
유리 진열장 너머의 이야기
선사시대 사람들은 막대기, 나무줄기로 짠 광주리, 나무창, 뼈로 만든 창, 접시처럼 쓰인 조개껍데기 등 석기는 선사시대를 대표하는 유물이 이미 부식되어 사라진 물건들과는 달리 거의 유일하게 현재까지 남아 선사시대 사람을 생활을 구체적으로 추정할 수 있게 해주지만 사실 석기와 친해지기란 쉽지 않다.
그토록 유적지의 발굴과 박물관 건립이 어려웠던 탓일까. 박물관 부지에 발굴 조사에 참여한 학생과 인부들의 이름이 적힌 기념비가 있다. 멀리서 보고는 그저 후원한 사람들의 이름이라고 생각한 자신이 부끄러워진다. 그제서야 이 박물관이 있기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마음이 담겼는지 그리고 어째서 다른 박물관보다 더 이해하기 쉽고 마음에 와닿는 석기에 대한 설명을 제공할 수 있었는지를 이해했다.
이제 그저 옛 유물을 만날 수 있는 전시관이 아니라 많은 이들의 정성과 노고, 마음이 담긴 복합건물이 되었다. 유리 진열장 너머로 보이는 석기는 여기까지 오기까지의 서사가 그려진다. 돌 너머의 사람들을 그려볼 수 있자 그저 밭에 깔린 돌멩이라고 생각하고 적당히 던져버리거나 무시했을 농사 짓는 사람들과 벼락도끼로 영험함을 믿었던 사람들, 그리고 이 석기를 직접 제작하여 나무를 깎고, 동물을 사냥하고 무두질을 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었을 사람들이 더 생생하게 다가온다.
박물관을 나서 차를 타니 다시 단양강이 보인다. 이제 돌멩이로 보이던 작은 석기에 뒤에 담긴 이야기가 보이면서 보다 생생하게 구석기인들을 그려볼 수 있었다. 어릴 때 강변에서 강으로 물제비를 날리기 좋은 돌라 골라 던졌는데, 어쩌면 4만 년 전의 아이들도 우리와 똑같이 호수와 수평으로 돌을 던져 통통통 물제비를 날리며 누가 더 멀리까지 가나 내기를 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들을 기억할 수 있도록 자신의 자리에서 애써준 모든 이들을 떠올려 본다.
참고문헌
신문기사의 출처 표기법??
https://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32681
(기자, 기사제목, 신문 이름, 날짜, 게재 면, 링크)
최익현, 스승 당부 안고 살아온 50년 고고학 인생 “학생·동료 교수들 있어서 가능했다”, 『교수신문』, 2016.06.28, https://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326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