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문화 답사
한반도 the Korean Peninsula
[한반도 중남부의 선사유적 답사기] 재생의 빛깔
태양, 팥죽, 도장, 산타클로스, 투우사의 공통적인 상징은 무엇일까? 바로 붉은색이다. 불덩어리 같은 강렬한 빛, 삿된 기운을 막는 핏빛 죽, 약속을 분명하게 새기는 붉은 표식, 선물을 가져다주는 빨간 옷의 할아버지, 소와 관중의 이목을 끌기 위해 빨간 천을 든 사람. 뿐만아니라 세계 국기에 가장 많이 사용된 색은 빨간색이고, 매일 지나는 도로에서 위험을 경고하는 신호등과 표지판도 빨간색을 쓴다. 인류에게 빨간색은 열정, 환희, 각인, 벽사(辟邪), 삶과 죽음 등을 표현하는 중요한 색채로 사용되어왔다. 인류학 답사를 준비하면서 오래전 인류에게도 붉은색이 특별하게 사용되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생각의 시작은 일본의 신석기를 대표하는 조몬 문화 유적지에서 발견된 옻칠한 붉은 그릇이었다. 그릇 색깔이야 이런 색, 저런 색 다양할 수 있지만 이 그릇이 유독 인상적이었던 이유는 ‘왜 붉은 덧칠을 했는가’였다. 옻칠은 까다롭게 수액을 채취하고 독성 제거가 선행되어야 한다. 여러 번 정제한 수액은 마르면서 흑색을 띤다. 조몬인들은 붉은색을 표현하기 위해 자연에서 얻은 붉은 색소를 첨가했다. 붉은색을 쉽게 얻을 수 있어서 그릇에 덧칠한 것이 아니라 꼭 붉은색으로 표현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으로 답사를 떠나니 자연스레 오래전 인류에게 붉은색은 어떤 의미가 있었는지 질문을 품게 되었다.
죽음과 붉은색
<부산 박물관>과 <국립 김해 박물관>에는 청동기 시대의 붉은간토기Red Burnished Pottery가 전시되어 있다. 붉은간토기는 무덤의 껴묻거리로 우리나라 곳곳에서 발견되었다. 질 좋은 바탕흙에 붉은 안료를 개어 발라 윤을 내는 방식으로 정성스럽게 만들었다고 한다. 각각의 토기들은 모양도 천차만별이고, 붉음의 정도가 약간씩 달라 보인다. 옻칠처럼 선명한 빨간색을 띄지는 않고 황토와 가깝거나 그보다 진하고 혹은 그보다 흐리다. 아마 그때의 날씨나 말리는 시간, 다듬는 정도, 준비한 재료 등 상황에 따라, 그리고 당면한 필요에 따라 만들었기 때문에 모두 다른 모습, 다른 색으로 만들어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현재 <국립 진주 박물관>에서 VR방식으로 운영중인 ‘빛 × 색 = 홍도 × 채도’ 전시회(https://embed.360vrmuseum.com/showcase/mqfqVkRjiGm)에 따르면 청동기시대의 붉은간토기는 앞선 신석기시대에서 계승되었음을 잘 보여준다. 박물관에서 보여주는 붉은간토기는 주로 제의용으로 사용되었고, 일반 살림살이로 사용하였던 토기와 차별되는 아름다운 형태와 색으로 유추하여 부와 권력의 상징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청동기시대 무덤에서 발견되는 부장품에서 붉은간토기 안에는 농사에 쓸 종자, 술, 영혼이 담겼을 것으로 추정한다. 또한 붉은간토기는 죽은 사람의 시신을 담는 독널로도 사용되었다. 이때 사자의 영혼이 드나드는 통로로 토기 바닥에 구멍을 내었다고 한다.
앞서 이야기한 신석기 시대 조몬의 옻칠된 붉은 목기도 제의로 사용되었던 그릇이다. 오늘날도 제사에서 붉은 목기를 사용한다. 예나 지금이나 인류에게 붉은색은 죽음과 깊은 관련성을 보인다. 연천군 <전곡 선사 박물관>에는 후기 구석기시대 무덤을 재현하고 있다. 이는 이탈리아 리구리아 아레네 칸디데Arene Candide 동굴에서 발견된 어린 소년의 무덤으로, 독특한 점은 인골이 붉게 물들어 있다. 가만히 보고 있으면 마치 피가 돌고 살이 곧 돋아 오를 것 같은 이상한 기분이 든다. 주검 위로 뿌린 붉은색의 정체는 산화철이 섞인 흙으로 시신에 뿌리기 위해 일부러 멀리 가서 구해왔다고 안내되어 있다. 오래전 인류가 죽음 근처에서 붉은색을 정성스럽게 다루고 가져다둔 이유는 피와 살을 상징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망자를 죽음의 세계로 보내지만 다시 돌아올 것을 상상할 때 핏빛의 붉은색만큼 생명력을 잘 표현할 수 있는 색이 또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피의 제의
말리 도곤족의 성인식은 특별한 장소에서 이루어진다. 도곤족의 역사를 나타내는 붉은색 벽화가 그려진 장소(동굴 또는 높은 곳)에서 거행된다. 도곤족 조상인 놈모들은 하늘의 신 암마에 의해 처음 창조될 때 암수 한몸으로 태어났다. 이런 사상으로 도곤족은 사람이 태어날 때 성적으로 양성성을 갖고 태어난다고 믿는다. 도곤족에서 여자의 몸에서 남자의 상징을 떼어내고 여자의 몸에서 남자의 상징을 떼어내는 것이 성인이 되기 위한 통과 의례가 된다. 피를 흘리는 엄청난 고통을 통과해야 다른 존재로 태어나게 되는 것이다.
프랑스 라스코나 스페인 알타미라 동굴에서도 붉은색을 특별하게 생각한 구석기 인류를 만날 수 있다. 샤먼 의식인지 사냥을 나서기전 제의인지 잘 알 수는 없지만, 구석기 인류는 이 깊은 동굴에서 그림을 그렸다. 알타미라에 그려진 들소는 목탄을 이용해 검정색으로 밑그림을 그리고 산화철을 이용해 붉은색으로 살아있는 듯 표현했다. 먹고 먹히는 관계 속에서 역동적인 동물들의 뜨겁고 신성한 피가 느껴지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