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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문화 답사

한반도 the Korean Peninsula

 

북적북적 금관가야를 상상할 수 있는 <김해 봉황동 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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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헌
작성일
2024-09-11 23:01
조회
107

 

경남 김해시 봉황동 일대에 있는 봉황동유적은 구도심에 자리한 수로왕릉과 대성동고분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대성동유적은 왕을 중심으로 한 최상위계층의 공간이라면 봉황동유적은 번영했던 가야인들의 중심주거공간이다. 봉황대라 불리는 작은 언덕 주변지역 일대와 무덤유적, 회현리 패총을 포함하여 봉황동유적이라고 부른다. 언덕 서쪽에서는 가야 토성과 창고형 건물터가 확인되었으며, 남쪽에서는 가야시대 배가 발견되어 해반천을 통해 선박이 왕래했음을 추정할 수 있게 해 준다. 봉황대 남쪽으로는 넓은 김해평야와 낙동강이 펼쳐져 있고, 북쪽으로는 분산성을 비롯하여 크고 작은 산들이 있다. 봉황대 서쪽 낙동강의 지류 해반천으로 일본과도 교류를 했을 것으로 추측한다.



 

봉황대 공원은 금관가야(1세기 중엽 ~ 4세기 말) 최대의 생활유적을 재현한 곳이다. 수혈주거 가옥은 난방을 위해서 반지하식으로 땅을 파고 그 위에 벽과 지붕을 올리는 형태이며, 고상가옥은 건물바닥이 지면보다 높게 만든 건축물인데, 주로 곡식 등을 저장하는 창고나 제의 등과 관련된 특수 용도의 건물이다. 가야시대의 접안시설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입지 조건, 구조 등으로 미루어 고상가옥(창고)들은 대외교역에 사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오래전 이곳은 온갖 사람들이 드나들며 매일 북적북적 시끌시끌한 장면을 연출했을 것이다. 높은 망루 위에서 사람들은 무엇을 보고자 했을지, 그 위에서 느끼는 공기는 어땠을지, 저 멀리 보이는 바다를 보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지 상상의 나래를 펴기 좋은 장소이다

 

  김해지역의 해수면은 4,100년전 후빙기에 최고도로 상승하여 이 시기 김해지역은 거대한 고김해만이었는데 이와 같은 해진(海進)1,700년 전까지 이어졌으며 당시의 해수면은 해발 0~2m 선에 이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가야의 김해 봉황동유적, 인제대학교 가야문화연구소 2013, 81)

 

  봉황대 동남쪽에 위치한 회현리 패총에서는 토기, 뼈나 뿔로 만든 도구, 석기, 가락바퀴, 탄화미, 중국 동전, 동물뼈 등이 출토되었다. 특히 중국 동전은 왕망의 신나라 때(기원전 14)에 만든 것으로 유적이 형성된 시기와 당시 중국과의 교류를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와질토기(瓦質土器)는 두드림 기법으로 만들어진 회청색 토기와 적갈색 토기인데 기법의 특별함으로 출토 유물 중 가장 주목을 받는다. 탄화미는 기원전·후에 김해지역이 이미 성숙한 쌀농사의 단계에 돌입하였으며, 철과 함께 금관가야가 성장할 수 있었던 또 다른 경제적 기반을 보여준다.

  빼곡한 도심 가운데에 위치한 봉황동 유적을 걷노라면 근처 해안으로 배를 타고 방문하는 외국인, 그들을 맞이하는 주민들이 어우러진 번성했던 생생한 교역의 현장을 떠올리게 된다. 급경사라는 지형적 조건으로 패총의 층위가 뒤집히기도 했지만 발견된 토기와 유물, 그리고 다양한 종류의 동물뼈는 무엇을 어떻게 먹고, 이용했는지 그들의 생활 모습을 더 선명하게 느낄 수 있다. 

전체 1

  • 2024-09-12 18:36

    아. 우리가 여기를 갔었나요. ㅎㅎㅎㅎ. 엄청 더워서 이글이글 제 팔이 구워지고 있었다는 느낌, 그곳에서 일하시는 분들이 우리 무리를 보고, 우리는 일이나 한다 쳐..저 아줌마들은 이 더위에 여기를 구경온거여 하는 표정이셨죠. 유적을 보러 온 아줌마들을 구경하는 아줌마들의 모습으로요.
    “빼곡한 도심 가운데에 위치한 봉황동 유적을 걷노라면~~생생한 교역의 현장을 떠올리게 된다” 그때 그 김해 바다에서 벌어졌을 일들도 생각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