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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인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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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숭이와 초밥 요리사] (1) ‘동물 중심의 의인화’로 인간 중심주의 해체하기

작성자
조재영
작성일
2024-09-23 17:44
조회
135

동물 중심의 의인화로 인간 중심주의 해체하기

 

 

 

인류 중심의 의인화 vs 동물 중심의 의인화

동물을 인간처럼 대하는 일, ‘의인화는 익숙한 주제다. 특히 어린 시절 예외 없이 경험하는 일이다. 물론, 이 의인화는 사춘기 이후, 성인이 되면서 멈춘다. 원숭이와 초밥요리사에서 저자 프란스 드발은 인간이라면 대체적으로 어린 시절 겪는 의인화와 조금 다르게, 성인이 되어서 우리가 의식적으로 실천할 수 있는 또 다른 의인화를 언급한다. 이를 성숙한 의인화라고 저자는 말하는데, ‘인간의 관점을 동물의 관점으로 대체하는’(62), ‘동물 중심의 의인화이다. 인간이 인간이라는 위치에서 동물을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스스로 동물이 되어보는, 동물의 관점을 갖는, 그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를 말한다.

저자는 이 책에서 행동주의 심리학자들을 비판하는데, 이들에게 동물은 인간에게 있는 감정, 심리, 사고 등이 없는 존재다. 이들은 오직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행동으로만 동물을 분석하며 그 행동들을 데이터 삼아 과학적으로 동물이라는 존재를 증명해 낼 수 있다고 본다. 이와 같은 행동주의 심리학자들은 과학적 실험 대상으로의 동물들 각 개체들 사이의 차이와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저 무리로 똑같은 대상으로 취급하며 한 동물 실험에서 얻은 결과는 다른 동물에게 곧바로 적용하며 성급하게 일반화시킨다. 비둘기가 그러했으니 쥐도 그렇다. ‘동물이라는 이름 아래 비둘기도 쥐도 차이 없는 존재들로 취급한다.

저자 프란스는 우리가 어린 아이 시절 그랬듯, 수렵 채집 생활을 하던 인류들 역시 의인화에 능숙했던 존재들이었다고 말한다. 먹을 수 있는 동물과 식물을 엄선하며 생활할 수 박에 없었던 인류는 당연히 그들에 대해서 면밀히 관찰하여 자세히 알아두어야 했다. 동물을 관찰하고 예측하면서 인류는 동물에게 의사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으며, 그들이 무엇을 느끼고 바라는지 그들의 관점이 되어 보지 않으면 안 되었다. 수렵 채집민에게 의인화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였다.

그렇다면 행동주의 심리학자들의 의인화에 대해 왜 이토록 부정적인가? 이는 과학적 연구에 방해가 되어서가 아니라, ‘인간과 동물 사이의 연속성을 인정하기를 원치 않기 때문이다. 인간과 동물 사이에 선명한 경계를 만들어, 인간 중심적 사고를 만들고, 인간을 우위에 동물을 지배 가능한 위치에 두려한다. 의인화 거부에는 인류 중심주의가 깔려 있음을 강조한다.

저자가 말하는 성숙한 의인화가 무엇일까? 의인화도 여러 형태가 있다. 인간의 관점을 고집스럽게 유지하면서 인간의 요구에 맞게 자의대로 동물을 해석하는, 즉 인류를 중심에 두는 순진한 의인화는 경계 되어야 한다. ‘동물 중심의 의인화인류 중심의 의인화는 분명히 다르다. 인류 중심의 의인화는 여전히 인간의 관점이라면 동물 중심의 의인화는 동물의 관점을 취하고 있다. 저자는 말과 대화하는 남자의 저자, 조련사 몬티 롤버츠를 소개하면서 인간의 성향을 동물에 중첩시키는 것이 아니라 동물의 시점, 그곳에 인간이 서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동물을 동물의 시점에서 이해해야 한다. 해서 철학자 토머스 네이절이 던진 질문의 형식이 흥미로웠다. “박쥐가 된다는 것은 어떤 걸일까?” 그리고 이 같은 동물 중심주의 접근법의 중요한 요소 중 하나는 인간과 동물의 심리 구조가 다르다는 것을 전제해야하는 것이다. 동물이 되려면, 그들의 관점을 가지려면 먼저 각 동물이 인간인 우리와 다르다는 것을 먼저 이해하고 접근하기 시작해야한다.

 

동물을 바라보는 관점이 곧 인간을 바라보는 관점

저자 프란스의 보노보 연구가 재미있었는데, 기존의 통념과 달리 그는 보노보가 아주 효과적이고도 색다른 방식으로 경쟁자를 견제하고, 공격 대신 섹스를 해서 긴장을 해소한다고 말한다. 프란스에 따르면 보노보는 모든 상대를 짝으로 생각하면서 그 모두와 모든 체위의 섹스를 하고 이들 섹스 중 3/4는 번식과 무관한 것이다. 그런데 엄청난 양과 종류의 섹스가 번식이 아니라 서로 간 경쟁이 생길때 그리고 싸우고 나서 화해하 때라는 것이 새로웠다. 인간에게 가장 사적인 것이 섹스인 반면, 이들에게 섹스는 사회적인 활동이 된다.

인간보다 훨씬 에 개방적인 보노보를 대하는 인간의 관점들을 보면, 인간이 인간을 어떻게 대하는지가 보이는 듯하다. 프란스는 미국인들에 대해 언급하는데, 그들이 보노보를 대할 때 청교도주의적 태도가 있다고 꼬집는다. 왜 그들이 침팬지 연구를 활발히 한 것과 달리, 보노보에 대해서는 차별적 태도를 가지며 보노보가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았는가? 왜냐면 보노보에게 인간들 스스로 죄악시 하는 면이 있기 때문이다. , 미국 청교도주의자들은 섹스를 죄악과 동일시하면서 애써 그것을 억압한다.

성에 대한 미국의 태도를 보여주는 사례를 소개하는데, 1999<타임>의 커버스토리였다. 타이틀은 여성이 몸에 대한 진실이었고, 6장의 여성 누드 사진이 실렸지만 유두와 음부는 노출되지 않았다. 타이틀이 무색하게, 여성의 몸, 여성성은 사실상 삭제된 기사였다. 미국 사회에서 진실된 여성의 몸은 들어 설 자리가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어디까지 미국 사회가 바라는 바에 의해 각색된 여성의 신체만 허용될 뿐이다. 보노보가 암컷 중심의 사회라는 것도 이들 미국 청교도자들에게 마땅치 않다. 미국 사회를 철저히 남성 중심의 사회로 구성하고 발전시켰으며, 이 관점이 동물 연구에도 투영되어 동물 사회 역시 수컷 편향의 진화 시나리오’(165)로 쓰여졌다. 보노보 암컷들간의 성교에 대한 불인정 역시 미국사회가 인간 동성애를 혐오하는 태도와 연결된다.

미국 사회에서 인간은 곧 인간이성애자남성만을 지칭하는 것이었는지 모른다. 이들은 그 대상이 동물이든, 여성이든, 동성애 남성이든 자신들의 청교도적 태도에 위배되는 것은 흡사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가리고 억압하며, 선택적으로 세상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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