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학 탐구생활》 편집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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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학을 나눌레오] 일관성 없는 사람들
일관성 없는 사람들
2024.9.23. 최수정
주제문: 일관성 없는 사람이 되자
글의 취지와 의의: 형식이 무엇인지 그것이 왜 필요한지 생각해 보자
형식이 중요하대
나는 ‘형식’이라는 것을 싫어했다. 형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마음이 중요한 것이지 겉으로 보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내게 있어 형식이란 어쩐지 빈약한 마음을 부풀리고 애써 그럴싸하게 보이기 위해 쓰이는 화려한 포장지 같았다. 그뿐만 아니라 살다 보면 지켜야 할 형식이 또 얼마나 많은지. 그것을 다 지키고 살다 보면 나의 일상이 온통 정체불명의 형식에 붙들려 있게 될 것만 같았다. 이런저런 형식에 신경쓰는 것보다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내 마음 가는 대로 살고 싶었다.
뒤늦게 공부를 시작한 것도 이런 생각과 무관하지 않다. 제도권의 형식을 벗어나 그때그때 마음이 이끄는 대로 공부 과목을 선택하는 것이 좋았다. 어디에 어떤 형식에 묶여 있지 않았기 때문에 공부 과목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내가 그만두면 끝이었다. 취미로 하는 공부에 누군가가 나에게 특별한 형식을 요구하지도 않았고 들고나는 것을 신경 쓰지 않아서 좋았다. 그렇게 느슨하게 공부하는 도서관에서 오선민 선생님을 만났다. 그리고 그 인연으로 어쩌다 나는 인문세라는 공부 공동체의 스텝이 되었다. 도서관보다야 어려운 주제로 공부량이 많았고 꼭 해야되는 숙제도 있었지만 어쩐지 나는 쉽게 그만두지 않고 제법 잘 따라갔다.
그런데 작년 겨울 가족 중에 투병하는 사람이 생겨 공부에만 집중할 수 없게 됐을 때, 나는 나의 상황과 관계없이 시도 때도 없이 울리는 단체 카톡방을 조용히 나왔다. 모두 나의 사정을 들어 알고 있었기 때문에, 따로 어떤 말이나 형식을 취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남아 있던 사람들은 내가 단톡방을 나간 사실도 한동안 모르고 있었다. 나는 정말 이것이 문제가 될 줄은 몰랐다.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 내가 아무 말 없이 사라진 사실을 안 사람들이 나를 향해 성토하는 말들이 들렸다. 도대체 함께 공부하는 장을 무엇이라 생각했기에,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기에 그럴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야말로 황당했다. 우선 내가 인문세를 들어갔을 때 내가 어떤 형식을 치렀었나 떠올려 봤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런 기억이 없었다. 그냥 친구들과 함께 공부하자고 해서 그러자고 한 것이 전부였다. 함께 일하는 스텝이 되어달라고 제안을 받아서 그러겠다고 한 것이 다였다. 말 한마디로 모든 것이 결정됐던 자리를 나오면서 이미 알고 있는 말 외에 어떤 형식을 따져야 한다고는 생각해 보지 않았다.
그리고 그때 나는 정말 다른 생각을 할 마음의 여유가 없지 않았는가. 나의 절박했던 마음을 몰랐다는 것인가. 내가 있던 자리를 돌아보고 제대로 된 형식을 따지고 나올 그런 상황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지 않은가. 아무 말 없이 나간 나에게 섭섭했다 해도 그 정도는 이해할 수 있지 않은가. 도대체 형식이 뭐길래. 그것이 왜 그렇게 중요하다는 말인가. 어떤 형식이 필요했다는 말인가. 나는 이제 내가 떠났던 곳으로 다시 돌아오기 위해 치렀던 형식을 통해 그것이 무엇인지 왜 필요하고 중요한 것인지 생각해 본 것을 이야기해 보려고 한다.
형식이 뭐길래
내가 형식 없이 나가면서 인문세도 어떤 전환점을 맞이했다. 갑자기 누군가 들고나는 ‘형식’을 만들어야겠다고 했다. 그리고 새삼 형식이 얼마나 중요한지 강조했다. 도대체 ‘형식’이 무엇이길래 뒤늦게 왜 그것이 필요하다는 것일까.
형식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기 전에 일단 쉬운 이해를 위해 졸업식의 형식을 빌어와 보자. 졸업식은 어떤 배움의 과정이 끝나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단계를 표시해 준다. 그 시기에 겪을 수 있는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고 졸업식을 통해 무사히 다음 단계로 나아감을 축하한다. 졸업식의 형식을 누가 왜 만들었는지 모르지만, 전통처럼 내려오며 배움의 과정 하나를 마치면 누구나 참여하는 것이 관례다.
졸업식만 봐도 그 형식을 만든 사람이 누군지 우리는 알 수 없다. 누가 어떻게 만들었든 형식을 만들 때 형식의 일차적 수행자는 형식 만들기에서 배제되었다는 것만 알 수 있다. 또한 그것은 이미 ‘주어진’ 형식이라는 점에서 다분히 나를 ‘수동적’으로 만든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나를 제외한 사람들이 다가올 누군가를 위해 만든 오래된 형식에 내가 떠밀리듯 참여한다. 그러나 이것이야말로 겉으로 보기에 별 것 아닌 것 같은 형식의 가장 큰 의미다.
나는 나라는 개인보다 높은 층위의 공동체가 만들어 준 형식의 문을 통과해서만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다. 모든 형식은 누군가가 뒤에 따를 다른 사람을 위해 만들어 놓은 통로다. 나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그 통로를 따라가 그들의 정체성에 합류하는 것처럼 보인다. 내가 형식을 싫어한다고 할 때도 나는 형식의 이런 일방적이고 강제적 성격을 말하고 싶었다. 나의 스타일과 상관없이 하라는 대로, 시키는 대로 해야 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었다. 하지만 형식이 정말 그런 것일까. 형식이 나를 완전한 수동 상태에 놓이게 하고 나를 억압하는 장치일까. 공동체가 나를 단순히 종속시키기 위해 형식이라는 것을 만들까.
형식은 그것을 통과했을 때 다음 단계에 이르게 한다. 졸업식에 참여하는 것은 다음 단계에 다가올 어떤 것도 감당하고 겪어 낼 결단에 이르렀음을 암시한다. 그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사람은 대학생이 취업 불안으로 졸업을 유예하듯이 졸업식을 유예하고픈 마음에 졸업식에 가지 않을 수도 있다. 마치 형식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나처럼 그 형식 자체를 피하려 들 것이다. 따라서 ‘형식’이 나를 수동적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거부하는 내가 자신을 수동적으로 만든다. 형식이란 겪어내야 할 그 자리에서 겪어야 할 것을 모두 겪고 나서 ‘내’가 되는 것임을 명시한다. 드디어 모든 결정이 끝나고 형식을 통과하는 순간 나를 허물고 타인과 함께하는 존재로서 더 큰 자신이 된다. 공동체가 나를 위해 만든 형식은 그들 안에서 그들과 동등해질 자격을 준다. 그 자격으로 새로운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나를 지지하고, 나에게 공동체를 따를 책임과 약속을 얻는다.
인문세 공부 형식
인문세를 나오고 나서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고 상황이 좀 나아지자 나는 다시 책을 보고 싶었다. 그래서 나에게 섭섭해했던 친구들과 선생님께 사과하고 다시 돌아가 세미나에 참석했다. 형식 없이 스텝방을 나와 스텝에서 제명되었기에 중심에서 멀어져 공부했다. 누가 뭐라 하지 않아도 어쩐지 마음이 위축되었다. 그때의 그 기분을 뭐라 할 수 있을까. 그것은 정말 내가 내 삶에서 소외된 것 같았다. 내 앞에 펼쳐져 있는 현실에 직접 발을 내딛지 못하고 어정쩡하게 발을 걸치고 기웃거리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것은 정말이지 견디기 힘들었다. 그때 나는 이도 저도 아닌 존재였다. 누구의 눈에도 보이지 않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내가 그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그 자리에서 겪어야 할 모든 것을 겪고, 감당해야 할 모든 것을 감당하며 공부할 뿐이었다.
나는 스스로 보이고, 살아있는 존재로 드러나고 싶었다. 내가 지금 여기 있다는 실재적 감각을 얻기 위해 당장 뭐라고 해야 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 수동성에서 벗어나기 위해 공부에 매달렸다. 고독한 나로부터 멀어져 나 바깥의 무엇을 만나고 싶었다. 그것이 책이었다. 하지만 쉽지는 않았다. 아직 투병 중인 가족을 돌보고 그와 함께 병원을 다니는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에 자주 세미나를 놓쳤다. 인류학이라는 어려운 과목을 혼자 공부하고 따라가는 일은 마음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선생님들의 호흡을 따라가고 리듬을 맞추기 위해 애를 썼지만 점점 뒤로 처지는 느낌은 어쩔 수 없었다. 이때는 정말 내가 말없이 인문세를 나갔던 절박함과는 또 다른 초조함이 있었다. 빈 시간만큼 따라잡아야 했기 때문에 어느 때 보다, 누구보다 더 많이 스스로 공부했다. 간절한 나를 위해서 누군가 가르쳐 줄 수도, 나를 위해 대신해 줄 수도 없었다. 스스로 그들이 있는 곳에 도달해야 했다. 오로지 내 힘만으로 나의 한계, 문턱을 넘어 새로운 시작의 출발점에 서야 했다. 그것은 마치 어떤 경계도 깊이도 없는 컴컴한 바다속을 홀로 헤엄치고 있는 것 같은 경험이었다.
오선민 선생님은 내가 언제나 무언가 ‘가르쳐 주세요’라고 하면 ‘모르는데요?, ‘저는 모릅니다’로 일관했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다 알면서, 왜 더 가르쳐주지 않으려고 하실까. 선생님이면서 왜 자세히 알려주지 않는 것일까 되물으며 불만 가득했었고, 그 어려운 인류학을 맨 땅에 해딩하는 것처럼 온몸으로 격렬하게 공부했다. 그런데 지금 혼자 공부할 때는 그보다 몇 배는 더 힘들었다. 인문세를 떠나 그곳의 공부방식을 혼자 재현해 보려 하니 이것이 인문세의 공부 형식임을 이해하게 됐다. 누가 누구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자기 공부를 하는 사이였다. 그때야 나는 내가 어디 있는지 돌아보았다.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스스로 공부하는 자리에 있었다. 어느새 나도 모르게 따르고 있었던 인문세의 숙제 형식처럼, 나는 나도 모르게 스스로 자기 공부를 엮는 신체로 살고 있었다.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가 따로 없고, 시키는 자와 따르는 자가 따로 없는 곳에서 이상한 활기를 느꼈던 이유가 이것이었다. 주어진 조건이 어떤 것인지도 모른 채 몸으로 부딪히고, 어찌됐든 뭐든 해보면서 시간 가는 줄 몰랐던 이유가 이것 때문이었다.
어쨌든 그렇게 시즌 에세이를 무사히 끝내고 인문세의 높은 숙제의 형식을 통과하면서 나도 모르게 만들어져 있던 인문세의 형식 스텝(step)1, 공부 문턱을 넘었다. 그래서 스텝 2, 신체적 형식에 참가할 자격이 주어졌다.
범고래 체력장
나는 스스로 스텝(step)1의 형식을 넘어섰다지만 아직 인문세를 나간 그 상태에서 멈춰 이도 저도 아닌 존재였다. 인문세 사람들도 이도 저도 아닌 나를 어떻게 대할지 난감해했고, 나 또한 어떤 포지션을 취해야 할지 난처했다. 서로 어쩌지 못하는 이런 난제를 풀기 위해 인문세로부터 스텝(step)2의 형식이 준비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렸다. 스텝(step)2는 체력 테스트였다. 공부를 위한 신체 조건을 충족했을 때 스텝의 자격으로 넘어갈 수 있는 문턱을 만든다는 것이었다. 나는 공부하는 신체 형식을 만들기 위해 그날부터 몸을 준비시켰다. 매일 규칙적으로 가까운 운동장을 돌면서 체력을 키웠다.
그리고 드디어 그날이 도래했다. 스텝(staff) 모두가 인문세 ‘밖’에 모였다. 모두 함께 인문세 밖으로 나갔다 다시 들어오자. 모두가 밖에서 위계 없이 동등한 출발점에 서 보자. 그리고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그동안의 인문세가 뭐하는 곳인지 모르게 했던 그 모호함을 벗어던지고 정해진 형식을 갖추고 잠깐 ‘범고래 부족’이라는 모습을 드러내 보자.
형식은 그것을 행하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시작의 의미를 준다. ‘범고래 체력장’이라는 형식을 치르고 나서 우리는 다시 스텝이라는 지위와 이름을 갖는다. 하지만 왜 꼭 달리기인가. 이유는 없다. 꼭 달리기가 아니어도 좋았고 어떤 것이어도 상관없었다. 범고래 부족답게 수영이어도 좋았을 것 같다. 그러나 일단 달리기로 결정됐다. 그것이 무엇이든 ‘밖’에서 하는 ‘신체적 형식’이면 된다. 신체를 쓰는 일은 일단 무엇이든 재밌다. 누구나 따라 할 수 있는 전염성이 있고, 묘한 자기 확장성을 느끼게도 한다. 게다가 그것이 ‘밖’이라는 외부라면 안에서보다 훨씬 많은 것과 함께 호흡을 나눌 수 있다.
나 ‘밖’에서 누군가와 함께 같은 동작으로 몸을 움직이며 마음껏 낄낄댔던 즐거움을 생각해 보라. 이유 없이 서로를 바라보며 웃게 되고 그 기쁨이 감정의 고양을 일으킬 때 우리는 어떤 일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이 갖게 된 것처럼 자신감에 차오른다. 강한 기쁨에 사로잡히는 이런 상태는 또한 인문세의 형식 스텝(step)3, 답사를 떠났을 때 함께 신체의 리듬을 맞추고 서로를 이끄는 힘과도 연결될 수 있다.
‘범고래 체력장’이라는 형식은 인문세가 만들었다. 이 형식으로 인문세가 규정되고 다른 공동체와 구분 지어진다. 하지만 또한 ‘범고래 체력장’이라는 형식을 통해 인문세의 범위가 확 넓혀지기도 한다. 어떤 힘이 미국, 일본, 스웨덴, 서울, 부천, 저 멀리 남도 땅 장흥. 돌 지난 아이에서부터 나이 지긋한 어른까지 연령과 상관없이 장소와 상관없이 함께하게 했을까. 처음에는 이게 뭐야, 애들 장난처럼 유치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하나 둘, 강제인 듯 아닌 듯, 옆에서 누군가 하니까 나도 함께 떠밀리듯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범고래 부족의 옷을 입고 인문세와 연결되었다.
이것이 바로 ‘형식’이 갖는 힘과 의미를 보여주는 것이다. 주어진 형식에 사로잡혀 자기 바깥을 경험하며 자기가 확장되는 느낌 말이다. 다른 사람의 졸업식에 참석하며 졸업생과 함께 감동하고 다짐하는 하객처럼 ‘범고래 체력장’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인문세의 형식에 사로잡혀 같이 공감했다. 같은 옷을 입고, 같은 형식으로 신체를 움직이며 자기를 떠나, 나 바깥에서 인문세와 하나가 되는 경험을 했다. 인문세의 신체 형식을 따라 하고 함께 겪으며 리듬을 맞추는 신체의 기억을 공유하며 즐거워했다.
그들이 범고래 체력장을 치렀다고 해서 겉으로 보기에 무언가 눈에 띄게 이전과 이후가 달라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이것을 통해 만들어내야 할 명백한 목표도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통과하면 ‘자격’이 주어졌다. ‘범고래 부족’이라는 자격이었다. 이 자격은 사실 스스로 자신에게 부여한 것일 수 있지만, 그들은 언제 어디서라도 누구와 함께하고 있다는 감각을 얻었다. 자기 신체로 따라 한 그 감각의 기억이 나와 그들이 서로 어떤 관계인가를 되묻고, 관계를 상기하며 힘을 얻는다. 홀로 있지 않다는 감각, 누군가와 함께 있다는 감각이 ‘형식’을 행하는 사람들의 정서에 흐른다.
일관성 없는 사람들
어떤 형식도 그것을 행하는 사람에게만 의미가 있다. 직접 실행되는 형식과 떨어져 멀리 있었더라도 자기 신체로 그것을 따라 해 본 사람에게는 어떤 힘이 작용한다. 인류학이란 정해진 것이 없는 공부다. 마땅히 배우고 따라야 할 절대적 개념 같은 것이 있다기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해보고 자기 신체로 체험하고 글을 써보는 공부다. 그것은 마치 범고래 체력장처럼 가벼운 형식의 문턱을 넘는 일과 같다. 그 문턱에 서서 내가 왜 이 공부를 하는지. 왜 이 일을 해야 하는지 생각해 보게 된다. 그 생각을 통해 제도화된 공부, 장치, 형식을 걷어내고 정해진 것이 따로 없는 새로운 형식, 약속된 질서나 형식이 없는 형식을 만들어간다.
나는 나의 인문세 탈퇴 사건을 계기로 ‘형식’이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게 되며 이 글을 쓰게 됐다. 내가 글을 쓰며 내린 형식에 대한 잠정적 정의는 그 형식 안에서 ‘나’라는 존재가 형식을 만든 큰 주체와 섞여서 그 둘을 구분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나’라는 정체성을 잃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전체에 종속되지도 않는 동등한 위계를 갖게 된다. 같은 생각을 나누고 같은 곳을 바라보는 존재가 된다고 할까. 형식을 만들고 그것을 행하는 사람들은 형식이 작동할 때마다 하나의 모습으로 드러난다.
누군가는 묻는다 인문세 ‘스텝(staff)’이 뭐예요? 왜 스텝이 되려고 하나요? 그냥 스텝이 아닌 채로 공부만 하면 안 되나요? 사실 나도 처음 그 질문을 받았을 때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나 범고래 체력장을 치르고 난 후 대답할 수 있을 것 같다. 스텝이란 ‘일관성 없는 사람들’이다. 언제나 어떤 일도 겪을 준비가 돼 있고, 어떤 것도 배우고 받아들일 준비가 된 사람들이다. 일관되게 고집하는 ‘나’라는 것이 없다. 언제나 변하는 문제에 따라 자기 삶의 형식을 실천하며 자기 존재 자체에 대한 긍정을 만들어낸다.
인문세의 스텝들은 누구보다 공부를 많이 하는 사람들이다. 자기 삶의 형식을 위해 새로운 공부 형식을 시험한다. 스텝이 인문세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만든 삶의 형식에 따라 인문세라는 형식이 달라진다. 따라서 인문세라는 공동체는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때에 따라, 문제에 따라, 스텝들이 스스로 만든 형식에 따라 눈앞에 새로운 모습이 드러난다. 형식이 작동할 때마다 다르게 보이는 일관성 없는 모습 때문에 밖에서 보면 거기 뭐하는 곳이냐고 묻게 된다. 각자의 능력의 한계를 경험하며 부서지고 깨지기도 하면서 만들어졌다 사라졌다 하는 것처럼 보인다. 누군가의 형식이 새로운 형식을 불러오고 수시로 변하기 때문에 정확한 어느 누구의 형체도 쉽게 알아볼 수 없다.
내가 인문세에 돌아오고 싶었던 이유는 여기 있는 사람들이 옳고 좋아서가 아니다. 이들은 아무것도 걸러내지 않는 바다에서 헤엄치는 범고래와 닮았기 때문이었다. 주어진 조건에서 어떤 것도 걸러낼 생각이 없고, 피하고 싶은 일도 없다. 어떤 것도 겪어낼 준비가 되어 있다. ‘범고래 체력장’이라는 형식을 통과하며 나는 형식의 중요성을 알게 되었다. 주어진 그 자리에서 무엇이든 겪어 보리라. 형식은 나의 신체가 열어야 하는 문과 같았다. 그 문을 열고 형식에 참여하는 것은 약속하고 책임을 지고 실행하는 자가 되겠다는 의미다. 나를 비우고 새로운 관계 속으로 들어갈 결단을 내리는 것이었다. 나는 이들과 함께 일관성이 전혀 없는 존재가 되기로 약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