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 인류학
두 손으로 도구를 다듬었던 인류의 지혜를 배우자
[어떤 동사의 멸종(2)] 인공지능 시대의 문학옹호론
『어떤 동사의 멸종』(2) / 기술인류학 김유리 2024-9-25
인공지능 시대의 문학옹호론
『어떤 동사의 멸종』(시대의창 2024)은 새로운 기술이 사람의 일을 대체해가는 현실을 다룬다. 사라져가는 일자리의 목록 중에 작가라는 직업이 포함되어 있다. 작가 한승태는 멸종 위기 직업군에 소속되어 21세기판 “문학 옹호론”을 펼친다.
“아빠 뭐해?”
“뭐하긴, 글 쓰지.”
“그니까 그걸 왜 하는 건데?”
“왜 하냐고?”
“어. 왜 해 그거? 그거 하면 돈 돼?”
한승태가 아들에게서 수백 번 들었던 질문이지만 이번엔 평소와 같은 비난조도, 무시하는 기색도 없었다. 그는 이 대답이 아들의 관심사에 책을 집어 넣을 수 있는, 어쩌면 자신의 삶을 전달할 수도 있는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다.(398)
부자 간의 문답을 듣다 보니 나에게도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밥 하는 일의 의미를 물었던 적이 있다. 서른이 되도록 압력솥에 밥 짓는 방법을 몰라도 됐던 어느 딸의 질문이다. 삼십 년 동안 매일 밥을 짓고 있는 사람한테 그게 무슨 질문이냐고 엄마는 반문했다. 먹을 수 없는 것을 먹을 수 있는 것으로 ‘요리’하는 행위는 근원적인 것이다. 때와 장소에 따라 다른 모습이지만, 인류가 갈고 닦아 매 세대 전수해온 ‘기예’다. 그 기예가 절실할 때도 있고 부차적일 때도 있다. 추앙받을 때도 있고 허드렛일 취급당할 때도 있다. 그렇지만 요리가 계속되는 한 세상은 풍요롭다. 어떤 오래된 행위가 어느 순간 안 해도 되는 일로 여겨질 때, 우리는 그걸 왜 하느냐는 물음 앞에 선다.
“왜?”라는 질문은 실은 삶의 의미를 묻는 것이다. 이 모든 겪음의 의미가 대체 무엇인지 알지 못해서 묻는다. 그런데 한 순간 별안간 내 앞에 의미가 나타나는 경험을 할 때가 온다.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 우리는 그 의미를 붙잡으려고 가지고 있던 모든 기법을 동원하게 된다. 기억술, 문자, 그림, 노래, 영상 등으로 그것을 담으려고 애쓴다. 그렇게 해서 기억하고 담아놓은 표현물을 통해서가 아니면 전달될 길이 없기 때문이다.
“오직 나에게만 말을 거는 듯한 아름다움과 마주했을 때……. 그 순간 우리는 삶이 극도로 단순해지는 것을 느낀다. 삶에서 무엇이 의미가 있고 의미가 없는지가 명확해진다. 인생의 온갖 ‘경우의 수’가 말끔히 사라지고 단 하나만이 눈앞에 남는다. 바로 그 아름다움에 응답하는 일이다.”(364)
글을 왜 쓰느냐는 질문 앞에서 한승태 작가는 글을 통해 삶의 의미를 전달할 수 있다고 답한다. 작가는 자기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삶의 의미를 담아내기 위해 글을 쓴다. 그러려면 “내 글을 쓸 줄 안다는 것, 스스로를 온전하게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을 터득”(399)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자신의 문장으로 무언가를 담아내는 법”(391)을 더 잘 익히기 위해 매일 글을 쓰고 있는 것이다. 작가는 “아무 상관없어 보이는 두 가지를 솔기 하나 없이 이어 붙여 전혀 새로운 무언가로 탈바꿈”(364) 시키는 시적 비유 기법을 애용한다. 인류가 “연금술이나 양자역학” 이전부터 “단단하고 빈틈없는 현실을 초월하기 위해 사용해온 가장 아름다운 방법”(364)이라고 칭송한다. 그동안 이유도 모르고 처박혀 있던 현실 안에서 다른 시선을 경험하고 다른 공기를 호흡하게 해준다. 각자의 여건에 속한 서로 다른 사람들이 타인, 그리고 타자의 입장에 서는 기적이 발생한다.
작가가 글을 쓰는 목적은 ‘치유’다. 작가가 보기에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병은 단절이다. “나랑 상관없어”라는 말이 지배하는 세상은 나와 나 이외의 모든 것 사이를 막는다. 작가는 글을 통해 세상을 ‘상관있게’ 만들고 싶은 야심이 있다. 작가가 사용하는 전략은 치유자로서의 글쓰기가 아니라 환자로서의 글쓰기다. 작가 자신이 “중증의 환자”가 되어 “치유와 회복”의 “열망”을 글에 담는다. 작가 자신이 고름을 흘리는 “환부”가 되는 것을 역할을 수행한다. 논픽션이란 “공동체의 투병기”(381)가 되어야 한다고 작가는 주장한다.
작가는 “우리 세대와 시대”가 “세계”가 아닌 “나”에 몰두하는 병에 걸렸다고 ‘자가 진단’하는 것으로 보인다. “나”를 세상과 상관없도록 지켜주는 이중삼중의 경계벽들을 뚫기 위해 작가가 사용하는 방법은 “나”의 벽을 낮추는 작업이다. (작가는 “스스로를 잊어버렸을 때만 온전하게 자신의 삶에 몰두한다는 느낌”(360, 병영도서관 이야기)이 든다고 말한다.) 작가는 자신의 못난 모습을 드러내기를 좋아한다. “노동의 무게 아래서 비틀거리는, 나약하고 이기적인 인간의 진실”을 담은 비열한 자기 모습들이 오히려 의미를 전달할 수 있는 방편이 된다는 것이다. 이와 달리, 인공지능을 보유한 글공장에서 주문 생산되는 글은 고객이 “읽고 싶은 글”이지 “진실을 담은 글”이 아니다.
“저마다 자신만의 전속 작가를 두고서 읽고 싶은 게 있으면 그 즉시 쓰게 만드는 시대가 됐다. 스토리텔링 엔진에는 한계가 없는 듯 보였다……. 더는 남이 만든 이야기에 목멜 필요가 없었다. 내 의도대로 내가 설정한 이야기를 바로 내 얼굴이 담긴 캐릭터를 통해 즐길 수 있었다.”(390)
인공지능의 시대에 인간은, 인공지능이 대신 써준 글 속의 멋진 모습을 자신이라고 믿고자 하는 독방 수감자로 살아간다. 신기한 것은 이 멋진 감옥 안쪽 벽에는 죄수들이 손수 새긴 글자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작가는 정치범수용소 굴라그 막사의 벽과 취업준비생들의 고시원 가구에 쓰여진 말들을 소개한다. 글쓰기라는 직종이 사라진다고 해도 “왜?”라든가 “내가 정말로 원하는 것은 뭘까?”라는 삶의 의미에 대한 물음을 담은 글쓰기가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는다는 것을 반증한다.
작가라는 직업의 소멸을 예고하는 이 책의 결정적인 장면은 한승태 작가가 직접 쓴 글과, 같은 인물, 장소, 줄거리로 인공지능이 쓴 글을 비교하는 장면이다. 결론은 작가 자신의 케이오 패다.
“그 안에는 한승태가 쓰고 싶었던 이야기가 그가 쓰고 싶었던 문장에 담겨 있었다. 다만 그중에 어느 것도 한승태가 쓴 것이 없었을 뿐이다. 실력 차가 너무나도 확연했기에 화가 나지도 억울하지도 않았다.”(395)
기술 변화로 일자리를 잃는 멸종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쓰던 작가 한승태 자신도 그들의 대열에 서게 되었다. 어느새 자신의 젊은 아들도 대열에 합류해 있다. 멸종의 속도가 가속된 것이다. 빙하기의 시작인 듯, 작가는 한기를 느끼며 더 추워질 것을 예상하는 것으로 책을 마무리 한다. 노동의 문제는 생존의 문제로 바뀌었다. 그러나 작가에게 일의 소멸이란 생존의 문제만이 아니라 그 “일을 통해 성장하고 완성되어 가는 특정한 종류의 인간이 사라지는 것”(10-11)을 뜻한다. 그러니까 작가가 느끼는 한기는 자기 직업의 소멸에 대한 두려움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다. 삶의 의미와 인간의 진실에 대한 답 없는 답에 더듬거리며 대답해가는 글쓰기 과정을 통해 조금씩 성장하고 완성되어 가는 작가적 인간형의 소멸이 초래할 영향에 대한 위기의식인 것이다. 노동의 소멸은 실업이 아니라 실존의 문제가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