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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문화 답사

한반도 the Korean Peninsula

 

[한반도 중남부 답사기] 토기, 삶과 죽음 사이의 증여물

작성자
조재영
작성일
2024-09-27 22:53
조회
78

토기, 삶과 죽음 사이의 증여물

 

 

일상에서 부재하는 죽음

아버지가 돌아가신지 약 3년의 시간이 흘렀다.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전 지병이 있으셨고, 그 지병이 수년간 지속되던 터라 돌아가실 때쯤 가족들은 이미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숨을 거두시기 서너 달 전부터 서울에 사는 나는 아버지가 계신 부산을 수시로 들락날락거렸다. “누나야, 마음의 준비를 하고 내려와야겠다.” 그렇게 동생으로부터 전화가 오면 두근거리는 심장을 붙잡고 눈물을 흘리며 부산행 기차에 몸을 싣기를 두어 차례 20213월 코로나가 기승을 부리려던 그쯤 아버지는 마지막 숨을 거두셨다. 아버지가 오랜 지병을 앓는 동안에도 나는 아버지의 죽음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마지막이라는 동생의 전화를 처음 받을 때부터였던 것 같다. 나는 아버지의 진짜 마지막을 준비하며 그해 겨울 몇 개월을 늘 아버지의 죽음과 함께 살았다. ‘어떻게 보내드려야 하나?’, ‘보내드릴 때 나는 어떤 마음이어야 할까?’, ‘돌아가시고 나서 아버지는 어떻게 되는 걸까?’, ‘죽음’, 그 전과 후를 생각하니 온갖 질문들이 떠오르며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아버지의 죽음 이후 3일간의 장례, 여전히 따뜻한 아버지의 몸이 관 속에 들어가고, 아버지는 얼마 후 하얀색 항아리에 가루가 되어 우리 품에 안겼다. 그렇게 장례를 마치고 나는 평상복으로 갈아입고, 일상생활로 돌아왔다. 이후 몇 달, 몇 년이 흘러갔다. 살아생전 아버지의 모습, 또 내가 잘해드리지 못했던 부족함들이 종종 생각나기는 하지만 내 생활을 하는데 크게 지장이 없고, 아버지의 부재가 크게 낯설지도 않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고 했던가? 아버지의 시체는 이제 내 눈앞에 없고, 산소는 내 생활 터전인 서울에서 한참 떨어진 대전에 있다. 잠시 내 삶 가운데 있었던 아버지의 죽음은 그렇게 또다시 나와 무관한 것이 되었다.

그렇게 일상을 보내 중, 지난달 동료 작가들과 프로젝트를 위해 전라도 신안 증도에 가게 되었다. 그곳에서 지내는 내내 심심찮게 여러 무덤들을 봤다. 삼겹살 가게 옆에도, 곡식이 익어가는 논밭 옆에서도 말이다. 무덤은 곧바로 죽음, 시체들을 연상시킨다. 처음에는 살짝 섬뜩하면서 조심스럽더니 짧지 않은 기간 머물며 반복적으로 보다 보니, 그 무덤들에 익숙해졌다. 그저 밥 먹고, 일하고, 잠자는 그 일상의 한 부분에 불과한 것으로 말이다. 아버지의 죽음을 일상에서 사유하던 그 몇 개월이 떠오르며 궁금해졌다. 일상에서 죽음을 잊지 않고 사유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그럴 때 내 삶은 어떻게 달라질까? 이 같은 질문을 안고 한반도 중남부 유적 답사길에 올랐다.

 

토기, ()과 사()를 운반하다

인간은 무엇을’, ‘어떻게’, ‘등으로 시작되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고, 그 질문에 답을 찾기 위해 쉼 없이 손을 움직인다. 그 질문의 과정에서 사유하고 상상하고 꿈꾸는 그 무언가를 손을 통해 형상화한다. 이번 답사 길에 방문했던 대부분의 박물관과 유적지에서 토기가 빠지지 않았다. 토기는 흙은 물론 물, , 공기 등 자연 재료와 사람의 손이 만나 탄생한다. 자연의 원초적 힘으로 흙, 공물, , 공기가 지상 위에 흩어져 있지만 그것을 결합하여 구체적 몸체로 빚어내는 것은 인간이다. 그리고 구체적 몸체를 가진 것에는 그것이 무엇이든 그 몸체에 맞는 영혼이 담긴다. 해서 인간이 자신의 손으로 흙이라는 질료를 빚어 만든 토기는 단지 음식을 보관하거나 담긴 내용물을 운반하는 기능 이상으로, 인간의 상상, 사유, 염원을 담고 있다. 자연물로서의 은 인간의 손을 거치고 마음을 담아냄으로써 토기가 되는 존재론적 변이를 거친다. 한반도 답사 길에 만난 토기들이 저장과 운반의 용도는 물론, 인간의 마음과 혼을 담는 사물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특히 장례를 위한 별도의 토기가 만들어졌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이 토기들을 통해 한반도 인류에게 죽음은 무엇이었는지, 그 사유의 흔적들을 찾아보자.

한반도 신석기 시대 무덤들은 땅을 판 후 시신을 매장하는 움무덤과 항아리에 시신을 넣어 땅에 묻는 독무덤이 많았다. 땅에 시신을 묻을 때는 장신구, 토기 등을 함께 넣는다. 무덤의 위치도 집터, 패총 등 생활 반경을 벗어나지 않았다. 이후 청동기 시대, 국가의 모습을 갖추면서부터는 무덤에 산 사람을 함께 매장하는 순장 풍습이 생기고, 무덤도 집터로부터 거리를 두기 시작한다. 그러나 청동기, 철기 시대에도 무덤에 토기를 함께 묻는 풍습은 사라지지 않았다. 부산 <복천 박물관> 야외 전시장에는 옛 복천동 고분군 내부 모습이 생생히 살아 있었다. 이들 무덤 내부에도 직접 세기 어려울 만큼 많은 양의 토기들이 있었다. 토기를 무덤 안에 함께 묻는 것 외에도 <국립 김해 박물관>에서 여러 개의 독무덤유적도 확인할 수 있었다. 태어날 때 신생아가 웅크린 그 모습과 같은 자세로 토기 안에 시체를 담아 땅에 묻는다.

토기가 죽음, 무덤, 장례 등과 분리되지 않다 보니 흡사 이 토기들이 영혼의 운반 수단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몸은 죽었지만 여전히 살아있는 조상의 영혼을 담아 하늘에 보내니 이 영혼에 새로운 생명, 새로운 몸을 주고 이를 토기에 담아 다시 지상으로 잘 돌려보내달라는 염원을 토기를 통해 표현한 것이 아닐까. 모든 영혼이 새 생명으로 지상에 다시 태어날 때는 여성의 자궁을 통한다. 하늘로부터 받은 생명을 잉태해 담고, 출산하여 지상 위로 이동시킨다는 점에서 여성의 자궁은 토기의 또 다른 형태이다. 토기는 그렇게 지상에 사는 인간의 사를 담고 생을 담고 염원을 담는다.

한반도 신석기 인류는 영혼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불멸하며 현생과 이생을 때에 따라 이동하며 순환하는 것으로 이해했을 것이다. 그러나 동일한 영혼이 이전의 몸을 버리고 다음의 새 몸을 받는, 그 사이의 시공간은 인간의 능력으로는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다. 해서 인간은 손으로 흙을 빚어 생과 사, 자연의 순환에 자신들의 마음이 가닿기를 그저 빌고 빌 뿐이다. 토기 표면에 문양을 새기는가 하면, 새로운 형상을 덧붙이기도 하고, 또 이들과 함께 의례를 치르기도 한다. 행여 영혼의 배달사고(?)가 나는가 하면, 영영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르고, 돌아와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해코지를 할지도 모르지 않는가. 해서 이 의식을 통해 자연의 힘에 복종하고, 감사하며, 겸허해지는 마음의 자세는 필수이다.

상형(象形) 토기, 생과 사 사이의 중간자들

생과 사를 분리되는 것으로 보지 않고, 영혼을 그 사이의 순례자로 생각하는 한반도 인류의 사유는 동물을 비롯한 구체적 형상을 표현한 토기들에서 더 선명해진다. 복천 박물관> 민무늬 토기, 빗살무늬 토기 외에도 사물의 형상을 표현한 상형 토기들이 돋보였다. 상형 토기에는 오리, , 거북 등의 동물 모양을 비롯해, 수레, , , 신발 등의 사물 모양도 표현되어 있다. 특히 <국립 김해 박물관> 전시장 한 벽면을 가득 메운 새 토기들이 기억에 남는다.

흙을 빚어 만든 모양의 토기에서 땅에 있는 인간의 뜻이 하늘에 있는 신에게 가닿기를 바라는 염원을 느낄 수 있다. 하늘에 직접 가닿을 수 없는 인간은 이 같은 대리자를 흙으로 빚어 하늘에 보낸다. 새는 땅의 뜻을 하늘에 전하는 일종의 전달자로 역할 한다. 새가 죽은 자의 영혼을 이승에서 저승으로 날라다 준다고 믿었다. 나아가 새로운 생명도 이 새를 통해 이 땅 위로 전달되지 않을까? 서양과 동양의 여러 우화들에서 새가 아기를 물어 주머니에 싣고 나르는 장면들이 우연이 아니라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새는 인간과 달리 날개가 있어 하늘에 갈 수 있지만 그렇다고 마냥 하늘에서만 머무르지 않는다. 때가 되면 땅으로 내려와 먹이를 구하고, 쉬거나 잠잘 때는 나무 위에 내려앉는다. 이렇듯 새의 이동 반경은 하늘과 땅 구분 없이 자유롭다. 수레와 배 모양의 토기도 이승에서 저승으로 이동하는, 일종의 교통수단을 상징한다.

답사 중에 함께 읽었던 나카자와 신이치(なかざわしんいち) 조몬 성지 순례에도 중간자로서의 동물이 등장한다. 스와( すわ) 지역에서 발견된 많은 토기에서 뱀 모양을 발견할 수 있었는데, 나카자와는 이 점에 주목하며 스와의 뱀은 생과 사, 재생을 상징한다고 언급한다. 나카자와는 돌과 나무를 세워 하늘과 땅 사이를 연결하며 전체적인 우주를 형성하는데 그 사이들을 묶는 것이 뱀이라고 한다. 뱀에 의해 우주 전체가 묶이고 연결되며, 생과 사는 분리되지 않고 연결되어 순환되는 인류의 세계관을 일본 스와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이처럼 지상 위에 살면서도 인간은 절대 하늘을, 우주 전체를 잊지 않는다. 천상과 늘 연결된 존재로서 스스로를 인식한다. 그러나 지상과 천상 그 사이에 인간인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거리, 미지의 공간이 있음도 안다. 이는 스스로의 한계를 인정하는 것이기도 하다. 천상이 내려준 뜻에 순종하면서도, 손에 잡히는 질료로 구체적 형상을 만들고 자신들의 뜻을 담아 지극히 겸손한 자세로 전달한다. 그렇다, 지상에서의 마음이 하늘에 가닿기를 바라는, 그 염원은 그저 마음으로 조용히 빌기만 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질료로 특정 형태로 중간자를 빚어내 겸손히, 그러나 적극적으로 그 마음을 드러낸다. 한반도 인류는 우리에게 말한다. 하늘에 뜻이 가닿기를 바라는가? 그렇다면 질료를 이용해 형상을 만들어라라고. 땅과 하늘, 생과 죽음은 그렇게 구체적 몸체, 구체적 형상을 가진 매개자들 덕분에 단절 없이 서로 소통하며 삶의 가운데서 공존하는 중이다.

 

차이를 생성하는 죽음

조몬 성지 순례는 나카자와 신이치가 사카모토 류이치(さかもと りゅういち)와 함께 떠난 한 조몬 유적 순례길에서 그와 나눈 대화를 싣고 있다. 신이치는 조몬 유적 중 제일 먼저 방문했던 스와에 대해 소개하며, 이곳이 생과 사의 순환이 느껴지는 성지였다고 말한다. 스와인들은 수렵 채집 생활을 했기에 매일 동물을 죽이고 먹는 것에 의해 자신들이 생과 사의 순환 가운데 있다는 것을 선명하게 의식하고 있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스와의 건축도 그렇다. 스와 대부분의 건축은 나무나 짚 등 식물이 주재료다. 유약하고 곧잘 썩는 식물로 만든 집이 영구적일 것이라 기대할 리 만무하다. 때가 되면 부서질 것을 염두에 두고, 집의 제한된 수명이 다할 때까지 그저 고치고 수리하며 집의 유한한 생명, 의심의 여지없는 집의 죽음과 함께 살아간다.

반면 오늘날 우리들 역시 동물을 매일 먹지만, 그들의 죽음은 우리의 일상에서, 시야에서 사라져 보이지 않는다. 죽음의 과정이 제거된 채 식탁 위에 올라온 동물은 영혼과 생명을 가진 존재가 아니라, 식용의 대상으로 인식된다. 애초에 공장에서 식용 거리로 제작 생산된 공산품처럼 말이다. 생산자는 쉽고 빠르게 기계를 이용해 물건을 만들고 소비자는 돈만 있으면 언제 어디서나 손쉽게 구할 수 있다 여긴다. 돈만 있다면 이 과정은 무한 반복될 것이라는 믿음과 함께. 현대 건축은 또 어떤가? 폭풍이 와도 끄떡없는 철근과 콘크리트는 시간 앞에 한계를 모르는 듯, 영원히 살듯 견고히 서 있다. 약하지도, 썩지도 않아 사는 동안 크게 보수하거나 고칠 필요도 없다. 건축의 영원성 때문에, 사는 곳이 아니라 부가 증식되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곧 사라져 버릴 것에 큰 비용을 지불할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현대 건축이 자연스레 사라질 일은 없으므로 일단 소유하게만 된다면 재산 축적은 보장된다고 여긴다. 현대는 그렇게 삶에서 죽음이 완전히 소외된 채, ‘에 대한 관심으로만, 생의 영원성으로만 일상이 채워진 비대칭의 시대이다. 현대 인류는 일상에서 죽음을 삭제함으로써 인간의 한계 또한 동시에 제거했다.

그런데 나카자와는 현대의 이 같은 비대칭이 물건과 물건이 등가 교환 가능하다라는 사고방식에 의거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나는 이 점이 조금 의아했다. 등가 교환이 생과 사의 순환과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일까? 나카자와는 이어 증여라는 키워드를 던져 이 질문을 풀어가게 한다. 스와인들은 물건을 교환할 때 물건 그 자체만이 아니라, 반드시 인간의 마음에 관계되는 요소를 서로 주고받았으며, 또 이 교환은 생명 작용과 결부되어 있다는 것이다. 등가 교환이 아니라, 증여로 관계를 맺어온 사람들에게 물건은 자신의 마음을 담는 그릇이나 통로의 역할이었다. 증여 경제에서는 마음을 담는 물건을 주고받을 때, 그 물건은 아니 그 마음은 어떤 것도 같은 것이 없다. 해서 동등한 무게나 가치로 교환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반면 겉으로 달라 보이더라도, 그 가치가 같은 것이어서 다른 무엇으로도 대체될 수 있는 것이라면 그 물건은 영원히 죽지 않는다. 그 물건에 한계는 없는 것이다. 똑같은 것이 영원히 되돌아오는 세계, 한계 없는 세계에서 지금 내 손 위에 있는 이 하나의 물건을 귀하게 여기며 마음을 담을 사람이 있을까? 어떤 사물도 다른 사물, 시간과 공간, 사람을 벗어나 존재할 수 없다. 사물이 같은 값으로 고정되어 있다는 것은 그 사물을 엮어내고 있는 ()’의 조건들 또한 움직임 없이 박제되어 있다는 것을 뜻한다.

나카자와는 같은 책에서 자연에 사실상 새로운 것은 아무것도 없고 모든 것은 마음의 구조가 생겼을 때 이미 다 나왔으며, 우리는 그것을 재발견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인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생과 사사이에서 일어나는 변이’, ‘변화에 동참하는 것뿐이다. 인류에게 창조란 그런 것이 아닐까? 무에서 유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자연에 이미 모두 출현해 있는 모든 것을 늘 새롭게 구성해 내는 것. 그리고 이미 구성된 것을 해체하고 분해하여 재배치하며 낯선 의미들을 엮여내는 것 말이다.

등가 교환의 세계와 달리, 증여의 세계에서 물건은 늘 이동하며 변화하는 무엇이다. 이는 세계가, 이 세계를 구성하는 모든 존재와 가치가 고정되지 않고 늘 달라지고 있음을 이해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 세계에서의 물건은, 존재들은 사라지지 않지만 다른 가치를 생성하며 변신하기를 게을리하지 않는다.

 

죽음을 통해 생명력을 얻다

한반도 인류가 빚은 토기를 보며 무엇이 죽음일까를 생각해 본다. 왜 우리 인류는 살면서 죽음을 늘 사유했을까? 이 몸뚱이 하나가 사라지는 것이 죽음은 아니다. 그러고 보면 모든 살아있는 것은 살아있는 동안 죽음과 부활을 수시로 경험한다. 어제의 내가 죽고, 오늘의 내가 태어난다. 진정한 죽음은 매일, 매 순간의 생과 사 속에서 얼마만큼 변했느냐에 있다. 어제의 내가 같은 모습으로, 그대로 살아있는 한 오늘 새로운 나로, 새로운 모습으로 태어나는 것은 불가능하다. 죽지 않고 어떻게 다시 태어난단 말인가? 오늘 새로 태어나려면 어제의 내가 반드시 죽어야 한다. 일상에서 늘 죽음을 사유하는 인류의 의지는 생과 사, 그 사이에서 차이를 발견하고 이를 통해 사실상 늘 새로워지는 변이, 생성과 창조를 향한 갈망이다. 또 실상 생명이란, ‘생명력이란 죽고 태어나기를 반복하면서 늘 새로워지는 활동, 그 자체이기도 하다.

존재와 존재, 물건과 물건 사이에 등가 교환이 가능하다는 생각은, 어떤 물건도 다른 것으로 대체 가능한 것으로 이해한다는 것이다. 같은 가치가 여기서 저기로, 질적 변이를 이루지 못한 채, 같은 것의 장소 이동이 있을 뿐이다. 여기에는 죽음이 없다. 즉 그 물건들 사이에 어떤 차이를 창조해 내지 못했다는 것이기도 하다. 삶과 죽음 사이를 이동하며 차이가 생성되지 못했다면 물건은, 존재는 다른 무엇으로 변화될 수 없다. 가치의 변신 사이에 죽음은 필수이다. 그리고 죽음은 늘 생의 한계를 전제할 때 가능하다.

단 몇 개월의 짧은 시간이었지만 밥 먹고, 옷 갈아입고, 걷는, 그 일상에서 아버지의 죽음과 함께한 그 시기, 나는 내가 발을 딛고 있는 이 생()의 시공간 너머를 같이 떠올리고는 했다. 죽음 이후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죽고 난 이후 영혼은 어떻게 될지, 사는 동안 나의 행동이 다음 생에 어떤 인과로 작용할지 등 말이다. 아버지의 죽음과 함께하며 죽음이라는 것이 옆에 계신 어머니에게도 또 나에게도 예외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고, 이 같은 질문들 앞에서 두려움이 느껴지기도 했다.

이번 답사 길에서 한반도 인류를 만나고 나니, 죽음이 과연 두렵기만 한 일일까 다시 질문하게 된다. 죽음은 우리들 생의 한계를 직시하게 하는 동시에 살아있는 동안 사유할 수 있는 삶의 범위를 확장시킨다. 죽음이 있었기에 이번 생이 있고, 생이 다하면 죽는 순간을 맞이한다. 생과 사는 분절될 수 없는 증여의 순환이다. 죽음을 통해 내가 다른 존재로 새로워질 수 있다는 사실에 호기심과 설렘이 생기기도 한다. 영원을 꿈꾸며 소유를 갈망하기보다, 죽음을 통해 한계, 유한을 배우고 다음 탄생, 창조에 더 많은 에너지를 쓰자.

한반도 답사의 끝 무렵, 죽음을 사유하는 이번 답사 길에 서울에서 전화 한 통이 울린다. 오랜 동료 작가이자 친구의 전화, 우리들의 오래된 또 다른 친구 가족의 부고 소식이다. 각별한 사이였던 나는 고민 끝에 다음날 아침 기차를 타고 먼저 서울로 복귀해 서둘러 장례식장에 가서 슬픔을 공유했다. 며칠이 지났을까, 장례 절차를 마무리하고 한숨을 돌린 친구에게서 감사 연락이 왔다. 그러면서 건네는 말이 어머니를 보내드리고, 한 이틀이 지났을까? 가족 중 새로운 생명이 태어났다 한다. 이 생명의 영혼은 며칠 전 하늘로 보내드린 어머니의 영혼이 부활한 것이 아닐까. 새로운 몸체를 얻는 이 영혼은 이제 또 어떤 새로운 일들을 지상에서 펼칠까, 앞으로 지상의 많은 것들을 어떻게 변화시켜갈지, 우주 전체 변화에 어떻게 동참할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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