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 인류학
두 손으로 도구를 다듬었던 인류의 지혜를 배우자
[기술인류학] 어떤 동사의 멸종(2) 후기
후기
어떤 “멸종”에 대한 책
“기술 인류학 세미나” 첫 책으로 한승태 작가의 『어떤 동사의 멸종』을 읽었습니다. 이 글은 인공지능과 로봇으로 대체되는 일자리에 대한 르포입니다. 이 책에서는,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임금으로나 지위로서나 최하층에 속한 노동 직종들로 하청 또는 외주 용역 업체 소속 파트타임 또는 일용직 단순 노동일들을 다루었는데요. (1) 대형 마트 인터넷쇼핑 콜센터 전화 상담, (2)대기업 인터넷 쇼핑 택배 물류센터 야간 작업, (3) 무한 리필 뷔페 주방 ‘핫 파트’ 조리, (4) 금융회사 별관 미화부 각종 청소일의 현장 속으로 들어가 노동하며 쓴 글입니다. 일단 너무 재미있고요. 비유며 깨알 같은 디테일이며, ‘이게 실화냐’스러운 충격적인 에피소드들과 노동의 무게 아래 비틀거리는 작가 자신의 나약하고 쪼잔하고 ‘웃픈’ 행동들까지 해서, 지루할 틈 없이 끝까지 읽게 됩니다!
과제 제출
기술 인류학 세미나에서 2회에 걸쳐 이 책을 다루었어요. 둘째 시간에는 요리, 청소, 쓰기에 대한 챕터를 읽고 생각거리를 뽑아봤습니다. 과제를 살펴 보면 김미자 선생님은 요리 에피소드에서 “연결의 감각”에 대한 작가의 성찰에 주목하셨네요. 이 책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만한 부분이라고 합니다. 진진님은 사라지고 대체되는 일자리들 앞에서 터뜨린 분노와 좌절의 눈물에 대해 이야기해 주셨습니다. 알래스카 석유 시추 현장에서 이누이트 노동자와 텍사스 출신 노동자의 견디는 능력의 차이는 앞으로 더 추워질 것임을 예상하느냐 못하느냐에 있었다는 작가의 이야기를 인용하셨지요. 이렇게 무덥지만, 실은 인간의 노동이 빙하기를 앞두고 있는 것 같습니다. 붱붱님은 노동하는 “손”에 주목하셨습니다. 당장에 변기 막힌 것을 뚫는 것은 기계도, 기술도, 자본도 아닌 손이라고요. 과제에 대한 오선민 선생님의 총평은 “쓸 수 있는 것”을 쓰지 말고 “써내야 하는 것”을 쓰라는 것이었습니다. 뜨끔합니다. 그리고 자기 일, 자기 현장에 대해서 쓰기 시작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자기 글”을 써낼 수 있느냐 아니냐가 “기술 인류학”이 부여 받은 시대적 과제인 것 같습니다. 자기 글이란 무엇인고!?!
자기 글을 쓴다는 것
“단순히 글을 쓰느냐 아니냐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내 글을 쓸 줄 안다는 것, 스스로를 온전하게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을 터득한다는 것이 인간에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려주고 싶었다.”
작가는 글을 왜 쓰냐는 아들의 질문에 대답해 보려고 애썼던 장면을 소개하며 위와 같이 말했습니다. 작가는 매일, 주말에도 아내가 출근한 후 집안 일 해두고, 10시부터 4시까지 항상 글을 쓰고 있답니다. 항상 쓰고 있는 상태, 항상 읽고 있는 상태에 자신을 두는 것이 작가로구나 생각했습니다. 자기 글을 쓰려면 언어를 다루는 기술이 필요하고 그 기술은 ‘터득’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럼 그렇게 터득해가는 기술로 언어를 다루는 과정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느냐? 자기가 어떻게 생겨 먹은 인간인지를 깨닫는다고 합니다. 인간이 도구와 기술을 사용해 어떤 일에 빠져 들며 ‘몰아’의 순간을 겪을 때 ‘나다움’에 대한 깨달음을 얻게 된다는 것이 역설적인 진실입니다. 그런데 그게 다가 아닙니다.
내가 언어로 연결하려고 했던 현장(+그곳 사람들)과 독자 사이에서, 나 역시 그들과 다르지 않음을 알게 된다고 합니다. 매개자가 변성되는 사건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모두 각자 따로따로인 ‘그들’이 ‘나의 작업’을 통해 ‘연결된 너’들로 바뀌었는데, 돌아보니 그 모든 것이 ‘매개자’였던 내가 ‘연결 대상’인 그들과 다르지 않음이 발견되는 과정이었다는 게 드러나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이제 ‘우리’라는 것이 생겨납니다. (1) 따로였던(단절) 너와 내가 우리 중의 너와 나로 “연결”되고, (2) 외부자였던 매개자도 내부자와 다르지 않은 자가 됨으로써, (3) 이제 나의 글, 나의 이야기가 우리 이야기로 “일반화”되는 것입니다. (아, 선생님이 알려주신 내용을 제가 잘 받아 적지 못하고 있습니다.)
내가 쓴 “자기 글”이 “우리에 대한 글”이 될 수 있습니다. 작가는 “공동체의 투병기” 같은 것으로 본인의 르포 쓰기를 규정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옳다, 그르다 외쳐서는 어떤 이의 가슴도 뚫고 들어갈 수 없다”고 외치는 작가는 “자기 글”을 쓸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독자가 글 속으로 깊숙이 들어오게 만드는 방법이라고 봅니다. 그런 글을 쓰기 위해 “열심히” 쓰고, 자긍심을 느낍니다.
없어져도 될 노동은 없지만, ‘좋은 노동’이라는 것은 분명히 있습니다. 자기다움을 알게 해주는 글쓰기가 그렇습니다. 글쓰기 노동이, 여러 노동을 다룬 이 책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 이유는 그것이 ‘모두의 얼굴’(확인 필요)이 되는 과정일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어떤 노동이 나 자신에 대한 이해에 도달하는 데 쓰이는가? 인간을 망가뜨리는 일인가? 공동체에 유익한가? 자기 자식에게 권할 수 있는가? 같은 “좋은 일” 판단의 지표들을 이번 책에서 끌어낼 수 있습니다.
기술 인류학
기술 인류학 세미나에서 우리는 여러 권의 책을 읽게 되는데요.(행복해요~) 각 작가들이 노동을 무엇으로 규정하고 있는지, 어떤 기술관을 가지고 있는지 찾아내는 것이 미션입니다. 우선, 한승태 작가에게 노동은 “연결하기”이고요. 노동을 단순화하거나 대체하는 기계가 아닌 도구를, 그 도구를 다루는 기술을 터득해가는 일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각자의 노동과 현장을 돌아볼 개념(키워드)들을 손에 쥐는 시간이 될 것으로 기대됩니다.
나의 현장, 나의 일
한승태 작가가 요리 현장에서 연결의 감각에 대해 탁월하게 써내려간 장에서 저는 약간의 슬픔을 느끼기도 했답니다. 자기 연민에 빠지려는 건 절대 아니지만, 그가 말하는 “통하였다는 느낌”을 느낄 수 있다는 사실 자체를 망각하고 사는 거 아니야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거든요. 히키코모리도 아니면서 하루 종일 거의 말을 안 할 때도 있는 저의 현실이 자각되는 타임이었습니다. 책에 나오는 “만족스러운 대화 같은 느낌”이라는 말을 읽으며 아, 그거 참 좋을 것 같다 싶었답니다. 저도 언젠가는 제가 하는 일들에 대해 사랑의 찬가를 부를 수 있도록 “변용”되고 싶어지네요.
한승태 작가가 말하는 “좋은 일”이 어떤 건지 궁금하시다면 만국의 노동자들이여, 어서어서 책을 읽어보시라고 권하고 싶네요. 수업을 이끌어주시는 오선민 선생님 감사합니다! 훨씬 더 깊고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셨는데 후기에 다 담지 못했어요.
덤 인용문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사람들과 내가 통하였다는 느낌, 그들과 내가 교감을 이루었다는 충만감……. 좋은 일이란 궁극적으로 인간을 덜 외롭게 만든다고 믿는다. 요리가 그렇다. 홀로 주방을 지키는 날에도 정신없이 음식을 만들다 보면 누군가와 만족스러운 대화를 이어가는 기분이 든다. 서울 변두리 지하 주방에 처박혀 있어도 세상의 한복판에서 나를 이해해 주는 사람들과 내 기술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과 시끌벅적하게 어울리고 있는 것 같다……. 잡채 만세! 할렐루야! 요리는 분명 사랑에 빠질 만한 일이었고 인생을 걸어봄 직한 기예였다.”
하기 싫지만 먹고살기 위해, 꾸역꾸역 졸린 눈을 비비며 집을 나서야 하는 일이 노동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우리가 돈에 콩깍지가 씌여 잊어버렸던 노동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유리쌤의 후기를 읽다보니 한승태 작가는 자신이 경험한 노동과 쓰기를 매순간 연결하며 살고 있었다는 생각도 듭니다.
다음 책에서는 노동을, 기술을 또 어떻게 정의하고 있을지 벌써 궁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