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반 일리치 Ivan Dominic Illich
공생의 삶을 생각하다
[젠더] 5장 젠더의 공간과 시간
삶의 조건으로서의 젠더
지난 시간(4장 토박이 문화 속의 젠더)에 우리는 도구, 문화에 깃든 젠더를 살펴 보았다. 지금은 젠더에 대한 감각이 거의 사라지다시피 했지만, 젠더는 19세기에 들어서기까지 노동을 젠더별로 수행하는 방식으로 우리 삶 속에 살아남아 있었다. 4장에서 살펴본 것이 생활의 토대가 되는 농업, 상업, 수공업 속의 젠더였다면 5장에서는 인간이 세상을 인식하는 순간부터 신체에 각인되는 젠더에 대해서 말한다. 즉 젠더는 ‘문화의 물질적 측면뿐 아니라 문화의 지각이나 상징적 의미 또한 젠더적’(『젠더』, 이반 일리치 지음, 허택 옮김, 사월의 책,310쪽)이다.
젠더는 인간이라면, 인간 사회에 속해 인간과 관계 맺는 자라면 누구나 경험하는 것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하나의 관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장에서는 젠더의 시공간을 다룬다. 이반 일리치는 젠더적 여성과 남성은 각자 세상을 다르게 보고 경험한다고 말한다. ‘세상을 보면서 여자가 이해하는 크기나 감각, 색채, 사물은 남자가 보고 이해하는 것과 다르다’(같은 책, 310쪽). 그렇기에 한쪽에서 자신의 영역에 대해 장황하게 이야기하고 논의하면 다른 쪽에서는 ‘침묵’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감히 여자가 말하고 일하고 생활하는 데에 남자가 낄 수 없고, 반대로 남자의 영역에 여자가 감 놔라 대추 놔라 할 수 없었던 것이다.
‘두 젠더는 각각의 영역을 지배하며’ ‘서로 엮일 수는 있지만’, ‘하나로 통합될 수는 없다’.(같은 책, 110쪽) 젠더적 여성과 남성은 결혼을 통한 부부가 아닌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젠더로서 ‘일상의 노동을 수행했다’(같은 책, 112쪽). 두 젠더는 공동체가 유지되는 데에 서로 없어서는 안 될 ‘상보적’ 존재로 조화를 이뤘다.
우리는 지난 시간에도 그랬고, 그리고 지금도 이런 의문이 불쑥불쑥 올라온다. 내게 주어진 젠더가, 그 젠더적 역할이 마음에 안 들면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나. 이번 분량을 읽으며 이에 대해 두 가지 생각이 들었다. 하나는 이반 일리치가 젠더를 ‘마땅히 따라야 할 규범으로 인식했’음(295쪽)을 강조하기 위해 ‘도리’(probity)라는 용어를 사용한다는 것이다. 도리라면 어떤 자리에 있는 자로서 마땅히 지켜야할 무언가로 수동적이고 억지로 하기보다 응당 해야 할 것을 하는 의미가 있다. 또 하나는 각각의 젠더가 인식하는 시공간이 다르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젠더는 세상을 인식하는 하나의 신체적 조건이다. 과거의 젠더는 내가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는 그런 영역의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우리가 ‘난 여자로 살기 싫은데, 여자에게 주어진 그 일이 하기 싫은데’라는 생각 자체를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건 마치 난 인간으로 살기 싫어. 새처럼 하늘을 날면서 살고 싶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여기에서 앞에서 읽었던 ‘3장 젠더로 이루어진 세상’에서 성 역할을 설명한 부분이 생각난다. 성은 실체성이 없다. 우리는 성 역할에 매여 있을 수밖에 없다(어느 한쪽의 젠더에 속해 있다는 의미와는 다르다)고 생각하면서도, 성 역할을 ‘코르셋’ 같은 ‘강제’된 ‘족쇄’로 여기며 ‘란제리나 러닝셔츠를 골라 입듯이’ 바꿔 입거나 ‘버릴 수 있는’ 것으로 여긴다. 성이란 왜 이렇게 태어났냐며 원망할 수도 있지만, ‘젠더에 대해서는 불평할 도리가 없다’.(79쪽)
젠더를 이해하는 데 있어 중요한 또 하나의 개념은 ‘도무스(domus)’로 보인다. 도무스는 두 젠더가 만나는 장소와 거소, 곧 부엌이라든지 토지, 재산 등을 의미, 아이들은 물론이고 종과 손님까지 포함하는 전 가족을 의미하기도 한다. 도무스는 한 사회를 이루는 기본 단위로서 역사를 이끌어가는 주체다. 건물과 가족을 함께 의미, 남자와 여자를 그들의 소유물과 연결시켜주고, 그들은 이 소유물을 통해 서로 관계를 맺었다. 그들은 토지 소유보다도 도무스를 더 중요하게 여겼고, 도무스는 배우자나 아이보다 더 중요했다. 그들의 물질적 생활이 실재적으로 가정에 의해 창출되었기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