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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학 탐구생활》 편집실

답사 가고 글을 쓰고!

 

[인류학을 나눌레오] 관찰의 기술(1)

작성자
강평
작성일
2024-10-07 22:57
조회
75

인류학을 나눌레오(1)/241008/강평

 

주제문 : 관찰은 기술이고, 훈련이 필요하다

글의 취지 : 기존의 렌즈를 벗어날 수 없는 가운데 실제 벌어지는 현실을 바라보는 기술 익히기

관찰의 기술

 

왜 관찰인가?

최근 화요 정통 인류학에서 읽은 프란스 드 발의 원숭이와 초밥 요리사, 옆 기술인류학팀에서 재미있다는 소문을 듣고 혼자 읽은 어떤 동사의 멸종에서 관찰력에 주목하게 되었다. 관찰은 대상에 대한 이해에 도달하기 위한 중요한 방법이다. 원숭이와 초밥 요리사는 선입견이라는 안경의 한계를 벗어나기 위한 방법이, 어떤 동사의 멸종는 눈앞에 두고도 눈여겨 본 적 없는 수많은 광경을 눈에 들어오는 방법에 대한 힌트를 얻을 수 있었다. 관찰은 우리와 자연을 공유하고 있지만 인간과 움벨트가 다른 동물, 혹은 함께 살아가는 인간이지만 깊이 생각해보지 않은 수많은 인간에 대한 이해로 확장시켜 생각하게 한다. 인문세에서 공부하고 있고 답사를 통해 만나게 되는 선사시대의 유물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한 것도 관찰이라는 개념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이 많다. 많은 이들을 눈앞에 있다고 보이는 것은 물론 아니지만, 눈에 힘을 잔뜩 주고 무엇인가 보려고 의도를 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다. 관찰은 입문, 기존 관점과의 충돌, 지속이라는 단계가 있다.

관찰이란 무엇인가? 관찰은 단지 보이는 것을 보거나(see), 일시적으로 주목하는 것(look at)과는 차원이 다르다. 관찰(observe)은 어떤 목적이나 기대로 어떤 대상을 주의 깊게 보는 것이다. 관찰을 어떻게 하느냐에 앞서 왜 관찰을 시작했느냐가 중요하다. 프란스 드 발은 동물에게도 인간과 같은 문화가 있다는 것을 주장한다. 문화를 인간만의 것으로 한정한다면 동물의 행동을 관찰하고 기록할 필요도 줄어든다. 호기심에서 시작되었지만 막상 시작되면 자기 내부의 선입견과의 충돌이 시작된다. 운동을 일단 시작해야 몸의 근력 등 기능이 얼마나 부족한지 느낄 수 있는 것처럼 관찰을 시작해야 얼마나 눈을 감고 살았는지, 어떻게 하면 눈에 들어오지 않던 것을 보고, 다른 방식으로 볼 수 있는지, 아니면 적어도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라도 알 수 있게 된다. 관찰은 원한다고 몸에 탈부착시킬 수 있는 키트가 아니라 오랜 수련이 필요한 기술이다.

 

관찰의 시작, 그리고 지루한 시간

동물을 관찰하는 것 자체가 어쩌면 이미 동물에게 무엇이 있으리라는 기대가 반영된 것이다. 그 기대는 지적 호기심, 대상에 대한 존중에서 비롯된다. 전혀 알고 싶지 않은 사람은 관찰을 시작할 수 없다. 운동의 필요성을 못 느끼는 사람이 운동화 끈을 신지 않는 것과 비슷한 이치다. 고시마 원숭이를 관찰하기로 한 이마니시와 그의 제자들은 훨씬 재미있지 않을까요?’라며, ‘흥분에 못 이겨길을 나서, ‘고된 일을 시작한다. 드 발은 이 작업이 힘들고 수고스러운 일, 좋아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구체적으로 고구마 씻기 창안 원숭이 이모를 최초로 미토가 발견하고 이 놀이가 친구, 친구에서 가족 등으로 전해지는 과정을 5년 이상 관찰한다. 행동 전파는 특별한 전수법이 아니라 함께 보내는 시간에 비례한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이같은 사실을 밝혀낸 것도 원숭이들과 함께 보낸 학자들의 시간들이었다.

기대는 발견의 토대가 되지만, 기대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기대와 충돌하는 실제사실을 관찰할 수 있어야 한다. 드 발은 과학의 거대한 진보는 이미 정리된 발상이 기대에서 어긋날 때 일어난다라고 한다. 프란스 드 발은 지루하고, 긴 시간 동안의, 그러나 피할 수 없는, 엄청나게 수고스러운 관찰의 중요성과 위대함을 말하고 있다. 이 작업을 생략하고 이미 누군가 모아둔 데이터를 컴퓨터 작업이나 추론만으로 대신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드 발은 그런 대범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힘들고 소중한 기초 작업을 하는 사람들을 말벌취급한다고 평한다.

 

선입견 벗기상황 바꿔보기

선입견이라는 것은 그 자체로 안경이기 때문에 이를 벗어나서 사고하기란 어렵다. 프란스 드 발이 인용한 콘라트 로렌츠의 각인이론과 니코 틴베르헨의 큰 가시고기의 공격성에 대한 실험은 상황 바꿔보기를 통해 선입견을 바꿀 수 있는 사례였다. 로렌츠는 거위를 일렬종대로 거느리고 다니다가, 새로온 여자 대학원생에게 그 지위를 빼앗겼을 때, 단지 거위를 변덕스러운 혹은 새것을 쫓아다니는 것으로 퉁치지 않았다. 결론적으로 거위는 처음 태어났을 때 본 것을 같은 종으로 각인이 되어, 이를 따라다녔는데, 그들이 처음 본 것은 인간의 생각과 달리 로렌츠 박사가 아니라 그가 신은 노란색 장화였다. 아마도 (이부분은 사실관계를 더 살펴보겠습니다) 그는 사람, 장화, 장화의 색깔 등을 다양하게 바꿔보는 실험을 했을 것이다. 틴베르헨이 연구실 창가에 둔 큰가시고기가 우편 배달차가 정차할 때마다 맹렬한 영역 과시 행동을 보인 것은, 결론적으로 번식기의 큰가시고기 수컷의 배 색깔이 빨간색인데, 마침 그 우편 배달차의 색깔이 같은 색이었기에(게다가 그 고기의 배보다 몇십 배는 되었을테니 아마 그 큰가시고기의 예민함은 극에 달했을 것이다. 거의 극한 체험 수준이지 않았을까) 그렇게 반응했던 것이다. 문제가 트럭 소리, 도착하는 일정 시간, 색깔인지 다양하게 변수를 바꿔보며, 섣부른 의인화를 하지 않고 실험했을 것이다.

 

관찰 대상에 대한 애정

구조견을 구조 로봇이라고 생각하면, 구조견을 훈련시키고, 훈련과 실전에서 그에 상응하는 보상을 주는 매뉴얼이 가능하다. 하지만 미국의 수색 및 구조견의 선구자인 캐롤라인 헤바드는 구조견을 인간과 같은 감정이 있는 주체로 이해했다고 한다. 1985년 멕시코 지진 때 아무리 찾아도 시체 밖에 나오지 않은 상황에서 독일 세퍼드 앨리가 우울증에 걸린 듯, 어떤 보상에도 움직이지 않고, 길게 쉬어도 회복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앨리뿐만 아니라 다른 구조견들도 식욕까지 잃고 꼼짝도 안하게 되었다고 한다. 구조견을 구조 로봇으로 봤다면 그저 오랜 수색 기간에 지쳤거나, 어딘가 몸이 안좋다고 생각하고, 다른 구조견을 투입하거나 아니면 구조견을 통한 수색을 포기했을 수 있다. 하지만 헤바드는 멕시코인 수의사(구조견은 바보가 아니기에 미국 수의사가 아니라 멕시코 수의사를 배치한 점도 눈에 띈다)가 생존자역을 맡아 잔해에 숨고, 개들에게 발견되게 만든다. 구조견이 칭찬과 먹이가 아니라 스스로의 행동에 감정을 투입한다는 것은 관찰 대상에 대한 애정에서 비롯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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