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 문화 답사
한반도 the Korean Peninsula
[동물원 답사기] 알고 싶어요
답사 후기(1)/241015/강평
동물, 낯선 타자
동물원이 원래 이랬었나? 이십 년만에 간 동물원은 나의 후각, 시각이 기억하는 것과 꽤 차이가 있었다. 기억 속의 동물들은 분변으로 추정되는 냄새를 풍기며 힘없이 계속 자고 있었다. 반면 이번 답사에서 본 동물들은 훨씬 쾌적한(?) 환경에서 지내고 있었다. 방사장의 침팬지들은 3~4층 높이의 타워를 공연하는 곡예사처럼 자유자재로 오르내리고 있었다. 또 바닥에 있는 먹이를 주워 먹는 경우도 있었지만 높은 타워 끝에 달린 생수통을 거꾸로 잡고 요가 자세로 먹이를 꺼내는 등 에너지가 넘쳤다. 소방 호스를 꼬아둔 장치 깊숙한 곳에 있는 먹이를 꺼내는 것은 내가 어릴적 동전을 기대하며 바닥에 얼굴을 바짝 붙이고 장롱 밑에 자를 넣던 모습과 겹치기도 했다. 동물원의 쾌적함과 동물들의 활발함이 인간인 내 기준에 불과한 것인지, 또 동물원의 이런 개선 노력이 이것이 거주하는 동물을 위한 것인지, 관람객인 인간을 위한 것인지, 둘 다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나는 왠지 모를 안도의 마음이 들었다.
내가 느낀 쾌적함의 이유를 동물원 관람 후 본 과천 서울대공원 유튜브 영상에서 힌트로 얻을 수 있었다. 답사에서 본 유인원관은 막사 같은 실내가 있고 야외 방사장이 있었는데, 관람객이 실내, 야외 방면 양쪽으로 관람할 수 있는 구조였다. 사육사들은 유인원들을 먹이로 유인해서 실내, 야외 공간을 일정 시간 비우게 하고 분변 등을 청소하고 먹이의 소비, 소화 상태를 확인했다. 수의사도 상근하고 있었다. 좁은 공간 안 생활 스트레스를 줄이기 위해 ‘먹이 풍부화, 행동 풍부화’ 전략으로 사육사들은 다양한 먹이를 놀이처럼 즐기고 뇌를 발달할 수 있는 장난감을 개발하고 관찰하는 작업에 진심이었다. 동물원 유인원들은 관람 시간에 맞춰 방사장으로 출퇴근하며 기획사 매니저 같은 사육사들의 룸 서비스, 클린 서비스를 받는 외국에서 온 노동자, 연예인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들 동물은 아프리카 케냐, 남아메리카 브라질, 아시아 일본 등 각지, 열대, 아열대, 온대 기후가 다른 곳에서 왔다. 살던 땅을 떠나온 동물들에게 벽과 유리로 갇힌 공간, 사육사, 관람객은 이제 그들이 적응하고 살아가는 조건이었다.
나는 알 수가 없잖아요
사실 동물원에서 내가 관람한 시간은 3시간 남짓, 아주 짧은 시간이었다. 무엇을 알았다, 느꼈다고 말하기에 너무 부족한 시간이다. 짧은 관람 시간뿐만 아니라 동물을 키우는 등 함께 지낸 경험도 없기에, 내가 생각하는 동물은 TV속에만 있거나 산에 갔을 때 야생동물이 있으니 주의하라는 경고판을 통해서 짐작해보는 정도이다. 실제로 등산로에서 10여미터 떨어진 곳에서 고라니로 추정되는 물체가 빠르게 이동하는 것을 보고 두려움에 얼어붙었던 기억이 있다. 그도 아니면 한때 생명이었으나 이미 고기가 되어 식탁 위에 있거나 가죽 소파, 오리털 외투로 간접적으로만 만날 뿐이다. 사실 그들이 제품 이전에 상품이었다는 생각도 최근에야 하게 되었다. 동물에 대해서는 이번 세미나를 통해 프란스 드 발의 『원숭이와 초밥 요리사』를 읽으며 동물의 생각, 감정, 문화에 대해 잠깐 생각해본 정도가 전부이다.
이번 답사와 이 책을 통해서 동물에 대해서 무엇을 알게 되었다기보다 ‘아 동물이 있었지’라는 당연한 생각을, 새삼스럽게 하게 되었다. 동물원 답사를 다녀와서 인간과 동물이 인위적으로 얼마나 구분되어 살고 있는지, 동물을 인간 입장에서 갖다 쓰기만 하는지 생각해보게 되었다. 나는 동물과 지각 구조가 다르기도 하지만 접할 기회가 없기에, 생각해보지 않아서 더욱 동물에 대해서 모르고 있었다.
알고 싶을 때 하게 되는 것
현재 지구 인구가 80억이다. 선사시대부터 지금까지 산 인구가 800억 정도로 추산된다고 한다. 근래 몇백 년동안 인구가 급증한 결과라고 한다. 동물원의 벽과 유리가 없다고 생각해보면 체구도 작고 행동도 굼뜨고 나무에 올라가지도 못하는 인간이 이 동물과 어떻게 생존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을지, 어떻게 이렇게 세력의 균형을 무너뜨리게 되었는지 놀라울 따름이다. 인구가 지금보다 훨씬 적은 상황에서 이 동물들과 같은 공간에 있었던 인간들은 엄청난 생존력이 있어야 살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해봤다. 그 생존력이란 단순히 동물이라는 타자를 제압하는 방식은 아니었을 것이다, 아니 그럴 수도 없었을 것이다. 오늘을 사는 나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자주, 많은 동물을 만나며 살았을 것이고 피하든 이용하든, 많이 알고자 하고 또 많이 알았어야 했을 것이다.
선사시대부터 인간이 동물과 겨루기도 하며 함께 살았다는 이유가 내가 동물을 알아야 하는 당위가 되는 것은 아니다. 지금은 동물의 특성을 알고 그들과 경쟁해야 하는 사회 조건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이번 세미나, 후속 동물원 답사, 그리고 이번 글쓰기를 통해서 나의 관점이 인간 우위 혹은 인간만의 세계관이라는 현재를 재확인하게 되었다. 물론 답사 자체만 놓고보면 짧은 시간의 관람에 불과했다. 충전과 힐링을 목적으로 간 여행 대부분도 낯선 곳에 사전 지식도 없이 관람, 관광 후 짧은 인상만을 가졌던 것 같다. 날씨가 좋았다거나 와인이 맛있었다든가 여행 중 벌어진 실수담을 에피소드로 재생산했던 것 같다. 나에게 여행은 나의 관점을 확인하기 위해서거나 나의 기호를 실현하는 것이었다. 반면 이번 답사는 뭔지 모를 복잡함, 불편함, 그리고 추가로 알아보고 싶은 것이 생기는 활동이었다. 아마도 답사 전에 책을 읽고, 또 이렇게 쥐어짜며 그 의미를 찾아보려고 하기 때문인 것 같다.
답사 전에 프란스 드 발의 『원숭이와 초밥 요리사』를 읽었다. 동물과 인간을 자연과 문화라는 이분법으로 구분할 수 없고, 이를 위해 문화란 무엇이지 재정의하는 책이었다. 책에 따르면 문화를 모방을 통해 전승자에게 배우는 것이라고 하면 문화는 인간만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배우는 것은 단지 먹고 사는 좁은 의미의 생존 전략을 넘어, 집단 내에서 속하기 위한 사회 생활 전반의 필수 요소이기도 하다. 인간이나 동물이나 독자적으로 살 수 없고 집단 내에서 살아야 하고, 배우기 위해서는 감정이입, 관용 등이 필요하다. 드 발은 ‘친절함이 살아남는다’라고 말하며 유전적으로 그런 본성이 이어졌을 것이라고 해석했다.
답사 후 상상
몇시간 동안의 답사로 책에서 설명한대로 유인원들이 권력 다툼을 하는지, 모방을 하고, 감정이입을 하며 등을 긁고 털을 골라주는지 확인하기는 불가능하다. 다만 침팬지들의 타워에서의 곡예를 보며 침팬지는 나무를 잘 타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보지는 못하지만 먹고 살기 위해, 무리에 끼기 위해 저 높은 타워를 매일 같이 오르며 연습했을 것이라는 상상을 해본다. 보노보의 섹스 위주의 커뮤니케이션으로 미국인들이 민망해한 것과 마찬가지로 나도 엉덩이가 빨갛게 부풀어 오른 원숭이 암컷을 보고 괜히 부끄러워지는 것을 보면 동물을 보는 의인화가 인간 위주라는 것을 확인해보기도 한다.
답사 후 동물원 세계가 궁금해서 과천 서울대공원 유튜브뿐만 아니라 푸바오의 성장기도 찾아서 보게 되었다. 푸바오가 동물원에서 사육되는 동물의 대표나 샘플은 아니지만 사육사와 동물의 의존, 정성, 시간들을 생각해보는 시간이었다. 너무 쉽게 동물은 ‘그냥’ 기술을 익히고, ‘그냥’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모방하고 놀고 싸우고 토라지고 달래주며 살아가고 있었다. 동물원이라는 공간이 갇히고 인간 사육사의 훈련과 도움을 받는 조건이기는 하지만, 야생에서 그들의 모방과 훈련 등 적응이 아주 다른 모습이지는 않을 것이라는 짐작을 해보게 된다.
관람은 관찰과 다르다. 이번 관람을 통해서 관람만으로 볼 수 있는 것은 매우 협소할 것이라는 생각을 해봤다. 아는만큼 보인다는 말이 있다. 나는 동물을 알 수가 없다. 이번 세미나나 답사를 통해서, 그 알 수 없는 동물이 나와 함께 살고 있다는 것, 아는 것은 매우 어렵다는 점, 그러나 차차 알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궁금하다. 동물원 관람객이 없을 때 즉, 관람 시간 이전, 이후, 또 동물원의 역사도 천천히 알아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