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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인류학

 

 

[빙하이후] 유골이 묻힌 생활 공간

작성자
손유나
작성일
2024-07-01 17:22
조회
187

빙하 인류학(23) / 빙하 이후 / 2024.07.02 / 손유나

 

유골이 묻힌 생활 공간

 

서기전 6400. 야림 테페(Yarim Tepe)의 마을은 사람들의 일상 활동으로 북적북적하다. 토기를 빚고, 교역자와 흥정을 하고, 사람이 기르는 개도 돌아다닌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으로 가는 길목에 서 있는 이 마을은 까마득한, 왠지 나와는 뭐가 달라도 다를 것 같은 선사시대를 떠올리게 하지 않는다. 대신 굉장히 친숙하고, 그저 아주 오래전 먼저 존재했던 과거의 마을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이 친숙한 마을에서 정말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한 가지가 있다. 건물의 여기저기에 사람의 유골을 발견할 수 있다는 점이다.

 

야림 테페의 대부분의 건물들은 다실을 가진 직사각형이며, 때론 소도시 안에서도 서로 군집을 이루고 있다. 하지만 상당히 다른 건물도 있다. 몇 미터 지름의 둥그런 건물로 흙벽과 나뭇가지로 분구형() 지붕을 만들었다. 러복은 부분적으로 잘린 젊은 여성의 시신을 여러 사람이 지붕에서 전달하여 둥그런 건물 바닥에 놓는 것을 본다. 메르페르트와 문차에프의 발굴에서는 바닥 아래, 벽 사이, 구석, 조용한 곳과 집의 구멍 등 여러 곳에 어린이들의 뼈를 밀어 넣은 양상이 드러났다. 그러나 이런 성인뼈는 전체를 대표한다기에는 너무 수가 적었으며, 아마도 소도시 밖에서 장례가 치러졌으리라 생각된다. 어린 시절 죽은 이는 고고학자들이 발굴 상자에 넣어 박물관으로 옮길 때까지 집 안에 그대로 묻혀 있었다. (538~539)

 

서기전 9000년 경 예리코와 괴베클리테페 마을에서도 비슷한 모습을 보았다.

 

무덤은 바닥 아래에 있든지, 집 구조물 아래에, 벽 사이에, 그리고 탑 안 등 어떻게든 건물과 연결되어 있었다. 케년이 제단으로 생각했던 구조물 아래에는 구덩이 안에 유아 두개골 다섯 개가 있었다.(90)”

 

야림 테페, 예리코, 괴베클리테페는 지역이 비교적 가까운 편이라 같은 문화를 가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기원전 6000년 경 유럽 동남부 레펜스키비르 마을에서도 집 안이나 화덕에 어린 아이 시신을 매장하는 모습이 있었다.(216) 과거 사람들은 죽음과 매장을 현대인보다 가깝게 생각했다. 집 안에 시신을 매장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주거지와 매장지의 위치가 상당히 가깝다.

유골을 집 바닥에, 벽 사이에 묻는 것과 현대인도 종종 행하는 집 안에 위패를 모시는 행위 동일 선상의 이야기일까? 모든 유골을 건물 안에 두지는 않았다면 어떤 식으로 선택된 것일까? 이 역할은 일종의 희생이었을까 아니면 영예로운 일이자 축복이었을까? 하지만 왜 뼈를 주거지에 묻어 함께 생활했는지, 죽음이 그들에게 꺼림칙한 일은 아니었는지, 죽고 난 후의 재탄생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많은 궁금증이 인다.

나는 생명이 죽으면 썩어 흙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가만히 생각하면 작물을 성장시키는 흙을 신성시하는 농경 문화권의 영향일 것 같다. 사냥을 하는 수렵채집민에게는 뼈가 특별한 의미를 지닌 듯하다. 그렇게 생각하면 죽음과 재탄생의 의미가 농경 문화권과 수렵 문화권에서는 다를 것 같다. 흙으로 돌아간다면 것은 이전 삶에서의 인과를 끊고 새로 태어나는 느낌이라면, 뼈가 남아 있다면 그 뼈에 살아 돋아나는 느낌으로 개체성이 유지된다. 농경문화와 수렵문화는 죽음과 재탄생을 다르게 인식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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