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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일리치 Ivan Dominic Illich

공생의 삶을 생각하다

 

[젠더] 고유한 여성과 남성으로 살아가기

작성자
유나
작성일
2024-10-17 22:58
조회
35

젠더 / 2024.10.17 / 손유나

 

고유한 여성과 남성으로 살아가기

 

29살에 부모님의 집에서 나온 이후로 지금까지 내 삶의 방향성은 언제나 독립을 지향하고 있었다. 월급을 받아 생필품을 구매하고, 남성 젠더의 전유물이었을 도구를 들고 식탁과 책장을 조립했다. 혼자서는 도저히 무리인 일은 전문가에게 돈을 주고 의뢰했다. 주변 사람들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며 도움을 구할 필요가 없는 이 상황은 나에게는 꽤 쾌적했다. 혼자서 의식주를 비롯한 생활 전반을 꾸려나가기 위해서 산업 자본주의가 필수 조건이었다는 점은 젠더를 읽고서야 깨달았다.

토박이 젠더 사회의 핵심은 상보성이다. 한쪽 젠더만으로는 바구니 하나도 온전히 만들 수 없도록 모든 활동이 얽히도록 설계되었다. 힘의 우위가 달랐을 수는 있으나, 상대를 반드시 필요로 했기에 갈등이 극단으로 치닫지는 않았고, 젠더의 역할은 구분되어 있어 다른 젠더가 개입하지 못하는 독립적인 영역이 존재했다. 하지만 산업 자본주의는 경제적 중성을 만들어 내어, 남녀 모두 고유성이 제거된 평등한임금노동자가 되었고, 생존하기 위해 상품을 구매해야만 했다. 고유성이 사라진 곳에는 차별이 그 자리를 메웠고 여성은 언제나 약자로 이중의 굴레를 짊어졌다. 이제는 다른 젠더 없이도 살아갈 수 있기에 상대를 존중하는 마음도 희미해져 남녀의 갈등을 깊어졌다.

나는 젠더가 말하는 상보성을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경제적 중성이 고유함을 제거하면서 생긴 수많은 문제를 알고 있다. 하지만 근대화로 여성도 남성도 아닌 인간한 명이 탄생하고, 주변의 도움 없이 자립할 수 있는 상황은 자유라고 표현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근대 문학에서는 태어날 때 성별, 가문 등 주어진 굴레를 벗어나 자신의 잠재력을 펼치는 개인의 이야기가 많다. 여성이지만 뱃사람이 되고 싶어 남장을 하고 해적이 되었던 앤 보니와 대대로 내려운 아버지의 직업을 물려받고 싶지 않아 고향을 떠난 이야기 속 주인공들을 생각해 본다. 또한 스스로 경제활동이 가능해지면서 가정폭력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여성들의 이야기도 떠올려 본다. 이반 일리치는 어느 나라건 여성이 당하는 폭력과 차별은 경제성장 속도에 비례해서 확대되었다. 즉 소득이 늘어날수록 더 많은 여성이 임금은 덜 받고 폭력은 더 많이 겪었다”(38)라고 말한다. 하지만 가정폭력이라는 개념이 없어 공식적인 통계에 잡히지 않았던 수많은 폭력이, 단지 여성이 자립성을 획득하면서 수면 위로 떠올랐던 것은 아닐까?

이런 의문들이 마음을 마구 헤집어 이반 일리치가 말하는 토박이 젠더 사회를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책의 마지막 장에 이르러 이반 일리치가 전하고자 했던 바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젠더가 다스리는 곳에서는 남자와 여자가 집단적으로 서로에게 의존하므로 서로 싸우고 빼앗고 물리치더라도 어느 선을 넘을 수 없다. 토박이 문화란 간혹 비정할 때도 있지만 양쪽 젠더 사이의 휴전이다”(184)라는 구절을 보며, 이반 일리치가 보았던 풍경이 내가 지금 보는 것과는 상당히 달랐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반 일리치는 빈민가의 성당에서 복무하며 가난한 사람들과 평생을 함께했다. 반면 내가 시선에 담고 있는 건 혜택을 받은 사람들뿐이다. 이반 일리치는 혜택을 얻는 여성은 특별한 배경이 있는 언니들‘”(29)이라고 말한다. 대중매체에 보여주는 여성은 혜택을 받은 사람뿐이고 내 주위 지인들을 보아도 빈민층으로까지 시선이 내려가지 않는다. 나는 산업 자본주의 시대의 특히 취약하고 착취당하는 사람들의 현실을 모른다.

소설 속 자유를 찾아 떠난 젊은이는 대다수 도시 빈민이 되어 폭력배가 되거나 창부가 되었을 것이다. 내가 그 현실을 직접 목도하고 있다면 자신이 원하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유가 무엇보다 소중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런 자유는 이 책의 초반에 나왔던 경제 발전을 이루어 모두가 부자가 되자는 말처럼 현실을 모르는 허황된 말일 뿐이다.

젠더를 읽으면서 그동안 독립을 외치며 나 혼자에 몰두하다 보니 내가 속한 사회의 맥락과 주변을 보고 있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산업 자본주의는 사람이 가진 고유성을 아주 훌륭히 제거했다. 엄격한 매뉴얼에 따라 만들어진 상품에서는 이 뒤에 있었을 사람이 전혀 느껴지지 않고, 생필품을 마음껏 구매하는 사람은 다른 존재의 필요를 단 한번 느껴보게 하지 않았다. 이반 일리치가 이 책을 쓰면서 하고자 했던 말은 과거의 젠더 사회로 돌아가자는 것이 아니라 고유성을 간직한 여자와 남자로서 서로 관계 맺으며 살아가자는 외침이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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