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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일리치 Ivan Dominic Illich

공생의 삶을 생각하다

 

[젠더] ‘토박이 젠더’를 통해 들여다본 평등

작성자
진진
작성일
2024-10-18 00:15
조회
30

토박이 젠더를 통해 들여다본 평등

 

인간은 누구나 평등하다. 우리는 평등이라는 이 가치를 절대적으로 여기는 사회에 살고 있다. 이 평등이 무엇에 대한 평등이냐에 대한 논의는 다양하겠지만, 내가 학창시절 배웠던 건 기회의 평등이었다. 모두에게 기회가 동등하게 주어진다면 결과의 성패는 저마다의 노력에 따라 달라진다. 그럼에도, 그러니까 이전 사회와 달리 태어나면서부터 모두가 동등하고 기회가 똑같이 주어짐에도, 사회 구성원들의 삶의 격차는 점점 더 벌어지기만 한다. 이런 평등 사회의 역설에 저항하고 항의하는 것도 지쳐, ‘고대 그리스도 원래 계급사회였대하며 자조적인 말들을 내뱉기도 한다. 하지만 그 평등의 쟁점에서 한 치도 물러설 기미가 없이 팽팽한 곳이 남녀평등이다. 평등을 두고 벌어지는 남녀의 주장은 더욱 더 첨예하게 대립되고, ‘역차별이라는 말이 등장할 만큼 각자의 입장은 다르다.

이반 일리치는 젠더에서 우리가 붙들고 싸우고 있는 여성, 남성이라는 ()’이 허상 같은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에게 성이란 신체적 특징으로 구분되어질 뿐, 사회적 맥락, 주위의 환경, 여타의 관계들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것이다. 어떤 자리에 있는 자가 여성이든 남성이든 상황은 전혀 달라질 게 없고, 달라져서는 안 되는 게 우리가 말하는 ()’이다. 하지만 실재의 삶에 이런 성은 없다. 일리치는 이 ‘18세기 말부터 시작된 현상으로 모든 인간에게 동일한 특성을 집어넣고 나서 다시 양극화시킨 결과를 의미한다’(16)고 말하며, 지금은 사라졌지만 그 이전 어느 사회에나 있었던 토박이 젠더(vernacular gender)’를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토박이 젠더는 같은 전통을 가진 사람들에게만 속하는 것으로 때와 장소에 따라 다른’ ‘사회적 젠더’(16)를 이룬다. 토박이 젠더가 토박이 문화, 그러니까 시간과 장소, 그리고 하는 일과 도구, 몸짓과 말투와 감각 등이 여자와 남자의 젠더와 결부돼 구분되고 자급자족하던 시대였다면, 성은 모든 인간이 같은 것을 갖고자 욕망한다는 단일 성에 근거를 둔 희소성의 경제학 원칙이 작동하는 시대이다.

토박이 젠더가 사라진 데에는 교회와 국가의 권력의 영향이 컸다. 중세의 교회가 남녀를 동일한 시각으로 보는 신앙 규칙들을 도입하고, 공개적이고 자발적이었던 회개의식이 내밀하고 의무적이고 규칙적인 고백성사로 바뀌었다. 또한 이전에 교회 안으로 끌어들였던 마을의 수호신들을 고딕 시대에 이르러서는 악마나 악령, 이단 등으로 내치며 젠더는 사라지게 된다. 국가는 여기에 결혼이라는 의무적 제도를 통해 부부를 세금 징수의 단위로 묶어내며 경제적 생산 단위의 기반을 마련한다. 이것이 산업사회에 와서는 임금 노동과 그림자 노동의 경제적 분업으로 바뀌어버리며 젠더는 완전히 사라지게 된다.

일리치는 많은 학자들 연구자들이 역사 속에서 젠더에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다고 안타까워한다. 그가 이렇게 복잡하고도 이해하기 어려운 이야기들을 늘어놓으며 젠더가 사라지고 이 나타난 단절을 이야기하는 데에는, 지금까지 을 전제로 해석되어온 역사를 바로잡고자함이 아닐까 싶다. 역사 속에서 사라진 젠더를 수면 위로 드러내놓지 않고는 역사를 제대로 볼 수 없다. 또한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과 문제들도 제대로 볼 수 없을 것이다. 남녀가, 인간은 모두 평등한 시대라고 전제하고 그런 사회를 만들기 위해 모두가 애쓰지만, 불평등이 만연한 지금을 이해하려면 이반 일리치의 젠더를 읽어보기를 강력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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