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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인류학 연구실에서는 이렇게 지금 여기의 삶을 완전히 긍정하는 주인공들의 세계를 탐험합니다. 동화 속 주인공들은 정황에 따라 즉흥적으로 자신을 만들어갑니다. 주인공의 삶이 어디로 이끌릴지는 아무도 모르고 정해진 것도 없습니다. 어떤 것으로도 규정 지을 수 없는 존재들이 온갖 살 궁리로 복작거리는 숲에서 깔깔 웃고 떠들며 놀다 옵니다. 그리고 돌아온 그 자리에서 지금 여기의 삶에 감사하며 한 걸음 더 낯선 길을 나서봅니다. 필요한 것은 모든 우연을 수용하고 마음껏 상상하는 것 뿐!

안락의자에 누운 낡은 가로등

작성자
오켜니
작성일
2024-10-19 04:11
조회
45

안락의자에 누운 낡은 가로등

 

영빨약사

 

안데르센 동화에는 작은 사물들이 여러 우연과 사건으로 이곳저곳을 이동함에도 불구하고 달라진 시공간과 무관하게 전혀 변화하지 않는다. 어떤 사물은 계속 다른 존재로 탈바꿈하는 중임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자아가 계속 출현하기도 한다.

 

안데르센은 태어나고 성장하고 썩고, 죽어서 다시 태어나는, 자연의 순환보다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도 변치 않는 불멸과 영원을 찾고자 한다. 안데르센에게 불멸과 영원이란 과거의 기억이 이야기를 통해 계속 이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안데르센에게는 과거가 중요하며, 과거를 간직한 묘비’(오래된 묘비), ‘초상화’(모든 것은 제자리에!), ‘기념비’(천 년 후에는), ‘식물표본집’( 침묵하는 책)이 중요하다.

 

미야자와 겐지 동화 속에는 과거로의 회귀가 없다. 내가 죽음의 길에 들어섰지만 그곳은 먼저 죽은 이를 만나는 길이 열리는 곳이고 이승의 엄마에게 미안한 마음이지만 자신이 친구를 구하다 죽은 것을 엄마가 이해하리라 생각한다(은하철도의 밤, 미야자와 겐지). 반면 안데르센은 과거 속에서 무엇인가를 찾는다. 멀리 갔지만 고향의 나무와 옛 여인을 생각하고, 과거 추억의 사물도 하필이면 그곳으로 온다. 시간이 흘러 잊고 있었는데 옛날 추억의 사물과 다시 재회한다. 안데르센은 과거 속의 기억과 이야기가 후대에도 변함없이 부활하기를 소망하였다. 낡은 가로등에서는 안데르센의 소망은 거의 강박 수준처럼 보였다. 안데르센의 동화 속으로 떠나보자.

 

썩지 않는 장난감 병정

 

장난감 병정은 꿋꿋한 장난감 병정낡은 집의 두 작품에 출현한다. 두 작품의 장난감 병정은 여러 우연이 중첩된 여행을 했음에도 출발지로 돌아오고, 긴 시간이 흘렀음에도 그 모습 그대로이다. 좀 괴기스럽다. 오랜만에 친구를 만났다면 친구도 나도 좀 늙어있어야 정상이지 않은가!

 

꿋꿋한 장난감 병정의 장난감 병정은 길거리로 떨어져, 종이배를 타고 하수구로 들어가게 되고, 강에서 물고기에게 먹혀 물고기 뱃속에 있다가, 생선 파는 시장에서 요리사 아줌마 손에까지 이르게 되는데, 결국 도달하는 곳은 장난감 병정이 원래 있던 집이다. 그래서 장난감 병정은 오래도록 짝사랑하던 무희를 다시 만나게 된다.

 

낡은 집에 사는 노인에게 이웃의 소년은 장난감 병정을 선물한다(낡은 집). 노인이 사망한 후 낡은 집이 새 집으로 고쳐지고 성장한 소년은 새 집으로 이사를 온다. 그런데 자신이 노인에게 선물한 장난감 병정을 새집에서 발견하게 된다. 장난감 병정은 나무토막과 파편들 사이에 뒤섞여 소년이 성인이 될 때까지 땅 속에 누워 있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변한다. 안데르센 작품 속 장난감 병정은 무희만을 바라보며 아무런 변화가 없기에 소름이 돋는다. 노인과 소년의 기억을 품은 장난감 병정은 추억의 그 자리에 그대로 놓여 있다.

 

바뀌는 신체, 불변의 정체성

 

아마의 행로를 따라가보자. 사람들은 푸른 꽃을 활짝 피운 아마의 줄기를 뽑아 부러뜨리고 물에 담가 빗질을 한다. 아마는 물레와 베틀에 놓여 아름다운 아마포가 된다. 사람들은 아마포를 가위로 자르고 바늘로 찔러대어 12개의 속옷을 만든다. 시간이 흐른 후 속옷은 낡고 해져서 넝마가 되고 펄프가 되고 흰 종이가 되었다. 글씨가 쓰인 흰 종이는 난로에서 태워지고 붉은 불씨로 공중에 날리고 재만 남게 된다.

 

어린이는 견신례를 받고 어른이 된다. 모든 생명은 통과의례를 거치면서 성장해 나간다. 그런데 안데르센의 초점은 존재의 변환을 통한 성장이 아니다. 아마는 계속 신체가 변형되고 있는데 늘 한결같은 말을 한다. ‘(아마 꽃일 때) 사람들은 내가 아주 멋지다고들 하지, (아마포가 된 후) 내게 이런 행운이 오다니 믿을 수가 없어, 고통을 참으니까 이런 멋진 일이 생겼다구, (속옷으로 만들어진 후) 난 이제야 중요한 것이 되었어, (종이가 된 후) 더 고와졌어, 사람들은 내 위에 글씨를 쓰겠지, 내 위에 얼마나 멋진 글들이 쓰일까.’ 아마는 속옷이 되고 종이가 되고 재가 되면서 외형은 변하는데 늘 한결같은 가 존재한다.

 

이제 난 해님에게로 올라갈 거야.” 불 속에서 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마치 수천 개의 목소리가 한꺼번에 말하는 것 같았다.(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안데르센 동화전집, p410, 현대지성)

 

과연 수천 개의 불꽃이 된 아마에서 아마라는 정체성을 찾을 수 있을까? 수천 개의 목소리가 한꺼번에 말하면서 아마의 고유함을 드러내고 있다고 안데르센은 말한다.

 

멀리 갔지만 언제나 제자리

 

병 주둥이(병 주둥이)의 경로는 장난감 병정(꿋꿋한 장난감 병정)의 경로와 비슷하다. 이 병은 항해사와 피혁공 딸의 숲 속 약혼식에서 포도주를 담은 병이었는데, 배에 실렸다가, 난파된 배의 사연을 실은 병으로 표류하다가, 외국을 떠돌다가, 기구 조정사의 술을 담은 병이었다가, 결국 병 주둥이만 남아서 피혁공 딸의 집에 도착한다는 이야기이다. 병은 멀리 여행했지만 병 주둥이의 모습으로 결국 출발지로 돌아온다. 그런데 피혁공 딸은 병 주둥이를 알아보지 못한다. 여러 기억과 이야기가 여기저기를 떠돌아 변형되고 결국 기억의 단편(병 주둥이)이 될 수 있다. 그 기억과 이야기를 최초로 생산한 사람도 몰라보게 기억은 변형된다. 그런데도 안데르센은 사물을 최초 출발지로 보내는 이유는 무엇일까? 기억과 이야기의 소유권을 주장하는 것일까?

 

사물이 돌고 돌아 출발지로 돌아오듯이 안데르센 동화의 사랑은 과거를 향해 있다. 이브와 어린 크리스티나의 이브는 과거의 여인 크리스티나를 잊지 못하고 경제적 파산으로 죽은 크리스티나를 대신해서 그녀의 딸을 키운다는 이야기이다. 버드나무 아래서의 남자 주인공 또한 오페라 가수가 된 여자친구를 찾아서 고향을 떠나지만 사랑에 실패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다 객사를 하게 된다. 남자 주인공은 여러 도시를 헤메지만 늘 고향의 딱총나무와 버드나무를 그리워 한다.

 

기억을 붙잡고 변환을 거부하는 낡은 가로등

 

낡은 가로등의 가로등은 오랫동안 길을 밝혀 주는 일을 하다가 낡아서 은퇴를 하게 된다. 낡은 가로등은 자신이 용광로에서 녹여질까봐 녹여지면서 기억을 잃을까 두렵다. 은퇴 전날, 가로등의 은퇴 소식을 들은 바람은 가로등이 지나간 일을 기억할 수 있게 만들어 준다. 낡은 가로등과의 추억을 잊고 싶지 않았던 야경꾼은 가로등을 자기 집으로 데리고 와 안락의자에 눕혀 놓는다.

 

가로등은 자신이 용광로에서 녹여져서 아름다운 촛대로 변신하는 꿈을 꾼다. 꿈을 꾼 후 자신은 더 아름다운 존재가 될 수 있는 큰 힘을 갖고 있음을 깨닫지만, 노부부가 자신을 지극히 아껴주니 노부부 집에서 편하게 지내겠다고 다짐한다. 낡은 가로등의 이야기는 안락의자에서 과거의 기억과 함께 성장의 고통을 거부하는 현대인들의 모습을 닮았다. 용광로에 들어가길 거부하며 안락의자에 누워 있는 가로등이라니! 안데르센은 과거의 기억을 고집하는 것이 존재의 변환이라는 생명 법칙과 맞지 않음을 어렴풋이 알았던 것 같다.

 

 2Q==

 

전체 3

  • 2024-10-19 08:39

    과거의 기억을 붙잡으며 자기 동일성을 고집하는 안데르센 주인공들에게서 ‘성장의 고통을 거부하는’ 현대인의 모습을 본 선생님의 해석이 새롭네요. 시간 위에서 눈사람처럼 자기 기억을 굴리며 자아의 크기를 키우고 있는 주인공들이 보입니다. 몸은 커졌지만 과거 속에 머무르며 만년 어린이로 남길 바라고 있지 않은지 나를 돌아보게 하네요. 옥현샘의 생각을 나누는 글 감사합니다.


  • 2024-10-19 12:16

    미야자와 겐지 동화를 떠올리며 읽는 안데르센 동화는 우리가 ‘나’를 어떻게 고집하고 살아가는지를 생각하게 하는 것 같습니다.
    동화 인류학을 듣지는 못하지만 선생님들께서 올려주시는 연재와 후기를 읽는 것만으로도 동화의 세계가 무궁무진하게 느껴집니다. ^^


  • 2024-10-20 15:28

    과거가 늘 좋기만 한 기억으로만 남는 것은 아닌데. 과거에 집착하게 되는 것은 어쩌면 과거 그 자체가 아니라 과거의 좋은 기억만 편집할 수 있기 때문만은 아닐까 모르겠네요. 어떤 부분에서 과거는 다시 겪기 싫은 힘든 기억일 수도 있는데요.
    왜 안데르센은 과거를 동경하는 것을 그렸을지 궁금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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