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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학 탐구생활》 편집실

답사 가고 글을 쓰고!

 

[인류학을 나눌레오] 인류학을 알릴레오

작성자
기헌
작성일
2024-10-21 23:00
조회
18

2024.10.21. 이기헌

주제문 : 정체성이 길을 열어준다.

글의 취지와 의의 : 우리는 인류학을 공부하고 공동체를 꾸려간다. 상황에 따라 새로운 방법이나 형식을 계속 적용하면서 할 수 있는 자기 일의 영역을 늘려가고 있다. 끝없이 확장하고자 하는 것이 목적은 아니다. 우리의 지금을 색깔로 선명하게 보여주고 싶은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색을 멋지게 뽐내고 싶다. 홈페이지는 그런 마음을 담은 우리의 시도이다.

 

인문세는 인류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다. 야생의 사고를 공부하고 더 가까이 관찰하기 위해 답사도 다닌다. 얼마나 알리고 싶은지 답사를 떠날 때는 깃발에도 인류학, 차량 자석에도 인류학 티를 내고 다닌다. 차량 자석에는 우리가 비행기 타고 배 타고(아직 배는 못 타봤지만) 차를 운전하면서 다니는 하늘과 바다 그리고 지구가 어우러져 있다. ‘정말로 우리는 인류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이라고!’ 누가 보아도 이렇게 말해주고 싶어 그 느낌을 살려 디자인했다. 지난여름 답사때 까만색 카니발에 인문세 자석을 붙이고 달리면서 우리는 바다를 거침없이 내달리는 한마리 범고래가 된 것 같았다.




올해 우리는 집도 지었다. 홈페이지에 우리의 색깔을 담기 위해 이야기를 나누고 계획대로 뚝딱뚝딱 온라인 집을 만들어갔다. 마음과 다르게 계획대로 안되고 좌충우돌하는 과정을 겪어야 했지만 일단 입주할 정도로 만들고 나니 뿌듯했다. 우리는 본격적으로 인류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을 집에 담기 위해 실내 인테리어를 해나갔다. 정체성은 존재의 행위와 삶의 방식까지 반영할 때 더 선명해지기 때문에 많은 궁리를 했다. 생각해보면 정체성이라는 것은 지키려고 애쓰기도 하고 그렇게 애쓰다보면 자연스럽게 입혀지는 것처럼 느껴진다. 자신이 머무는 공간에 정체성을 담는 것은 내가 누구인지, 어떻게 살지를 중단없이 생각하는 일이다.

지난 여름 국립중앙박물관우리가 인디언으로 알던 사람들이란 전시회에서 자신이 누구인지 어떤 색깔을 가진 사람인지 놓치지 않고 살아가는 북미 원주민의 삶을 엿볼 수 있었다. 한쪽 벽에 원주민들의 집을 표현한 도식이 인상적이었는데, 부족마다 다양한 기후와 지리적 특성에 따라 집의 생김이 다르다. 나는 공동체 구성원들이 모여 복닥복닥 이야기를 나누었을 다양한 그들의 집에서 각각 추구하는 삶의 색깔을 상상해보게 되었다. 전시회 공간 가운데 텐트 같은 아주 큰 집이 배치되어 있었는데, 이 집은 대평원에 살던 원주민들이 짓는 티피Tipi라는 집으로 계절의 변화에 따라 또는 들소 떼를 쫓아 이동하기 위해 폈다 접었다가 쉽도록 만들어졌다. 여러 개의 긴 나무 기둥의 윗 부분은 하나로 묶고 아래는 펼쳐 뼈대를 만들고 그 위를 들소 가죽으로 덮었다. 가죽에는 사냥과 전쟁을 상징하는 부족의 모습이 알록달록하게 그려져 있다. 누가봐도 아 들소를 사냥하는 사람들이로구나 하고 알 수 있을 정도다.

북동부 지역에서 사는 이퀘로이 족의 집은 폈다 접었다가 쉬운 티피에 비해 한 번 지으면 사용 기간이 매우 길 것 같다. 이들은 김밥처럼 긴 롱하우스Long House’를 만들기 위해 어린 나무를 구부려 돔 모양 지붕을 만들고, 나무껍질을 묶어서 건물 전체를 뒤덮는다. 집 내부에는 중앙통로를 만들고 양쪽 옆면을 따라 칸막이를 나누었다. 모계 대가족을 형성하는 핵가족 식구들이 각각의 칸에 살고 그들과 직접 마주보고 있는 가족과 가운데 불을 공유했다. 집에 공유와 호혜의 윤리를 담은 이퀘로이 족은 롱하우스 사람들이라고도 불린다. 공간의 고유한 색깔은 머무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가를 보여준다. 인문세 홈페이지도 우리의 색깔, 우리가 추구하는 공부 방식(삶의 방식?)이 깃들어 있다. 우리는 이제 우리가 누구인지, 무엇을 원하고 어떤 길을 나설지 생각한다.

 

읽을레오에서 올릴레오로 그리고 나눌레오로

인문세의 짧고도 긴 역사를 돌아보면 처음 우리는 집도 없었다. 동네 카페에서 세 명이 책을 읽으며 시작되었다는 전설을 들었다. 사람들이 더 왔으면 하는 바람으로 네이버 카페에 온라인 소통 공간을 마련했다. 네이버 카페는 그때그때 필요에 따라 카테고리를 바로 만들어 썼다. 한창 네이버 카페에 정착하게 되니 우리는 좀 더 안정적인 관계를 원하게 되었고, 시간 맞추어 올리는 숙제가 약속이 되었다. 이때 우리의 정체성은 글을 쓰고 올리는데 집중되어 있었다. 매일같이 숙제들이 올라오다보니 이전 글들을 금방금방 묻혔다. 어떤 글은 좀 더 걸어두면 좋겠는데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네이버 카페의 시스템 안에서 우리를 표현한다는 것은 마음처럼 잘 안되었다.

글을 어떻게 더 나눌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숙제를 모아서 시작도 끝도 없는 숙제의 길 이라는 모음집을 만들게 되었다. 참여한 글들의 오타와 비문을 체크하며 다듬었더니 하나로 엮인 멋진 물건이 되었다. 이 모음집은 1호를 끝으로 더이상 빛을 보지 못했다. 우리는 곧 박물관 답사를 하고 인류학 탐구생활이라는 잡지를 발간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계속해서 설문대할망 신화가 전하는 풍경에 직접 서보고 싶어 제주도로 건너가고, 야생에서 필요와 조건에 대한 생각을 놓치지 않았던 아이누족의 마음을 관찰하고자 북해도행 비행기를 탔다. 보폭이 커지는 만큼 쓰는 숙제도 함께 많아졌다. 스포하자면 딱 2년 전 탄생한 인류학 탐구생활은 곧 5호가 발간될 예정이다.

으쌰으쌰해서 같이 책 보고 답사하며 정신없이 돌아다녔는데, 우리는 어느새 예전과 멀리 떨어져 다른 길에 서 있는 것 같았다. 우리는 본격적으로 인류학을 공부하는 사이가 되었고 인류학 공부에 더 재미를 느끼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우리는 인류학을 나누는 사람들이 되고 싶어졌다. 여전히 글을 쓰고 올리는 일이 중요한 우리에게 네이버 카페는 인류학을 나누는 사람들을 표현하기에는 여러가지로 부족함이 있었다. 정형화된 카페 틀은 우리가 활용하기에는 가시적으로도 실용적으로도 한계가 있었다. 작아보이는 카테고리 글씨를 마음대로 키울 수도 없고, 원하는 동영상이나 사진 목록을 달아두기도 어려웠다. 무엇보다 글들이 금방금방 사라지는 것이 제일 아쉬운 일이었다. 우리는 우리를 잘 표현해줄 홈페이지에 대한 필요를 느꼈다.

걷다보면 나타나는 다음 스테이지

인문세 홈페이지가 필요하다고 이야기가 나온 건 1, 2년 즈음 되었지만 올해 본격적으로 집짓기 프로젝트에 돌입했다. 빨리 사라지는 글들을 붙잡고 싶었고, 인류학 공부에 필요한 방대한 자료와 정보들을 우리의 필요에 맞게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먼저 우리는 주변에 문의하여 온라인 집을 지어줄 전문가를 섭외했다. 어떤 홈페이지를 만들지 전문가와 상의하려는데 전문가에게 어떤 집을 어떻게 지어달라고 요구하기가 애매했다. 우리는 카멜레온처럼 언제 또 색을 바꿀지도 모르는데 그럴때마다 바뀌게 만들어 달라고 할 수 없지 않은가? 그렇다고 그때마다 전문가에게 번번이 다시 요청하기도 그렇다. 전문가에게 맡긴다고 해도 홈페이지를 사용하는 우리가 전체 구조에 대해 이해하고 있어야 했다. 우리의 집이니까. 나는 문득 전문가에게 맡길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집을 지어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어떤 길을 가고 싶은지 제일 잘 알기 때문이다. 이렇게 어쩌면 무모할지도 모를 집짓기 프로젝트는 일단 시작되었다.

처음 공부를 시작할 때, 우리는 답사를 간다거나 홈페이지를 만든다거나 그런 생각을 한 건 아니다. 걷다보니 여기에 닿았지 이 길을 알고 걸었던 것은 아니다. 이제 우리는 네이버 카페를 통해 걷던 길목을 돌아 다른 국면을 맞이했다. 인류학을 열심히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온라인 집짓기 프로젝트로 이끌었다. 그렇다면 인류학 공부를 하는 우리들에게 어떤 홈페이지가 필요할까? 4월 어느 날, 이런 질문을 들고 스텝들이 서울 베어하우스에 모였다. 현재 사용하고 있는 카페에서 어떤 것을 가져올지, 인류학 공동체로서 어떤 메뉴명으로 통일감이 만들지, 상위 메뉴 아래 어떤 하위 메뉴가 들어가야 하는지, 접속할 때 처음 뜨는 페이지는 무엇이 어떤 구성으로 배치되어야 우리의 정체성을 드러내기에 좋을지 등 상상력을 동원해서 홈페이지를 구상했다.

인류학 세미나에서 읽은 버나드 루도프스키의 건축가 없는 건축은 자연의 변덕과 지형의 도전을 받아들이는 세계의 낡은 토속 건축물들에서 공동체성을 본다. 그가 소개하는 모든 건축들은 세상 유일무이한 모양과 기능을 가진다. 사용하는 사람들에 맞추어 깎고 다듬은 예술품처럼 그들만의 색깔을 느낄 수 있다. 그가 공동체적 건축에 대해 인용한 말이 인상적이다. ‘소수의 지식인이나 전문가가 일으킨 것이 아니라, 공통된 체험을 바탕으로 공통된 문화유산을 가진 모든 구성원의 자연발생적이고 계속적인 활동에 의해서 생산된 공동체적 예술’(버나드 루도프스키, 김미선 옮김, 건축가 없는 건축(스페이스타임), 15). 지금 생각해보면 우리의 필요와 정체성이 드러나는 공간을 만들려면 전문가의 손길에 의존하기보다 서투른 기술이라도 우리 스스로 고민하는 건 좋은 선택이었다.

 

어쩌다 마주친 비전

7월 첫날, 몇 가지 아쉬움을 남긴 채 인문세 자체제작 인류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의 집이 드디어 공개되었다. 축하받고 싶은 마음, 집 자랑하고 싶은 마음에 새벽 일찍 떡집에서 시루떡을 찾아 세종연구실, 서울캠프 베어하우스 이웃에 돌렸다. 글을 옮기고 보수 작업하느라 분주한 시간을 보냈다.

홈페이지에서 가장 중요한 뼈대는 메뉴다. 우리가 어떤 공부를 어떻게 하는지 가장 잘 나타내는 지표이기 때문이다. <인류학 공부> 카테고리 안에는 어떤 관점으로 인류를 관찰하는지에 따라 마음, 신체, 기술, 문화, 예술로 나누어보았다. <인류 문화 답사> 카테고리는 처음에 구석기, 신석기로 하위 메뉴를 만들었었다. 하지만 숙제를 하고, 글을 올리려다보니 두 개의 범주에 해당하지 않는 경우가 너무 많았다. 예를 들어 선사시대 인류가 버린 조개껍데기 등이 쌓여서 이루어진 퇴적층을 패총(조개무지)라고 부르는데, 우리가 답사가며 보았던 이 패총에는 맨 아래층부터 맨 위층까지 여러 시대가 층층이 쌓여있다. 어떤 시대로 명확히 구분할 수 없는 유적이었다. 또 울산 신석기 반구대 답사에서 만난 백악기 공룡 발자국은 어디로 분류되어야 할까? 그제서야 우리는 답사를 시간이 아닌 지역으로 나누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작고 사소하지만 해보지 않았으면 몰랐을 일들을 조금씩 발견했다.

지금 <인류 문화 답사> 카테고리 하위에는 한반도, 아시아, 북아메리카, 남아메리카, 유럽, 아프리카, 오스트레일리아 항목이 들어가 있다. 그런데 남아메리카, 유럽, 아프리카, 오스트레일리아 페이지는 지금 텅 비어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우리의 가능성을 담아두었다. 언젠가 가볼 수 있겠지 하는 기대와 바람 같은 것이다. 아메리카 최초 인류 정착지가 클로비스가 아니라 몬테베르데라며 학계에 큰 파장을 일으켰던 남아메리카 칠레 친치후아피 강변에 서보고 싶다. 얼룩무늬 말을 그려놓은 프랑스 페슈 메를(Pech Merle)동굴에서 신석기인들이 섬겼던 신을 상상해보고 싶다. 신석기 오스트레일리아 아넘랜드에서 해수면이 차오르면 변모하는 땅과 사람들의 삶이 궁금하다. 아프리카에 도곤족이 여전히 살고 있다는데 만나면 반가울까? 아니면 겁이 날까? 네모난 가면을 쓴 그들 사이에서 무엇을 향해 춤추고 노래하는지 가까이서 바라보고 싶다. 그들의 흙집에, 신성한 공간에 발 디뎌보고 싶다. 홈페이지를 만들고 보니 우리는 우리가 무얼 하고 싶은지 보게 되기도 했다.

홈페이지 하단에는 인류학 단체에 어울리는 배너를 달았다. 국립중앙박물관, 전곡선사박물관, 공주 석장리박물관과 그린피스, 생명다양성재단으로도 연결을 만들었다. 그쪽은 아직 잘 모르지만 언젠가 우리의 존재가 알려질지도 모른다. 우리는 연결되고 싶은 더 많은 관계를 홈페이지에 실을 수 있다. 얼마전 전곡선사박물관에 방문했을 때 어느 선생님은 박물관 입구를 지키는 직원분께 태블릿으로 인문세 홈페이지를 보여주며 이 배너를 자랑했다. 직원분은 큰 관심이 없는 눈치였지만 나는 뿌듯함을 느꼈다. 앞으로 우리는 어떤 길로 연결될까? 지금 우리는 네이버 카페에서 올릴레오 모드로 공부할 때 상상하지 못한 인류학을 알릴레오모드가 되었다.

 

지금까지 우리가 걸었던 과거를 떠올리면서 정체성을 생각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내내 생각했다. 정체성이라는 것은 내가 누구인지, 그리고 어떤 가치를 추구하고 어떤 삶의 방식으로 살아갈지를 보여준다. ‘나는 여기서 이런 사람으로 살거야!’라는 태도가 주는 즐거움이 있다. 물론 괴로움도 있다. 하지만 능동적인 태도는 머무르지 않고 길을 터준다. 그 길에서 우리는 또 다른 길, 다른 꿈을 발견한다. ‘나는 어떻게 살고 싶은가라는 질문이 계속 길어 올려지는 것이다. 우리는 조건에 따라 정체성을 찾았고, 추구했다. 어느 국면에서 달라진 정체성은 우리를 이끌어 멋진 꿈을 꾸도록 해주었다. 처음부터 거창하게 무엇이 되자는 목적이 아니었다. 하루하루 놓치지 않고 친구들 사이에서 숙제하면서 이르게 된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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