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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미즘

만물에 깃든 영을 보다 

 

[원시문화] 네 번째 시간 후기_ 기도, ‘영’들의 목소리를 듣는다

작성자
최수정
작성일
2024-07-01 17:59
조회
143

원시문화네 번째 시간 후기

 

2024.7.1. 최수정

 

기도, ‘들의 목소리를 듣는다

 

원시문화의 저자 에드워드 버넷 타일러(Edward Burnett Tylor, 1832~1917)는 원시문화인들이 도무지 설명되지 않은 죽음과 꿈을 마주하고 그것에 대한 합리적인 답을 찾다가 영혼개념을 떠올리게 되었다고 보았다. 그리고 인간에 대한 영혼개념이 만물에 이 있다는 개념으로 확장되어 애니미즘사상으로 발전되었다고 한다. 삶과 죽음의 차이에 대한 앎의 추구가 인류 최초의 종교적 교리를 발생시켰던 것이다.

타일러에 의하면 인류 종교의 탄생은 생명의 원인에 대한 논리적 이유를 설명하고 싶은 마음에서 시작되었다. 원시문화인들의 사고에는 이원론의 초보적 형태인 선한 신격과 악한 신격의 반목이 존재했다. ‘우주의 경영이 강력한 두 적대적 존재에게 할당되고, 그들 안의 경합하는 선악의 힘이 각각 성향이 같은 무리의 우두머리이자 통치자인 선한 신격과 악한 신격으로 인격화되었다. 이들에게는 언제나 태양과 달, 낮과 밤, 친구와 적, 선한 신격과 악한 신격, 빛과 온기와 생명과 보호의 힘에 대립하는 어둠과 추위와 죽음과 파괴의 힘과 같은 이원론적 도식이 존재했다.

 

지고신과 유일신

인류의 종교적 교리는 선과 악, 영과 물질이라는 두 적대적 원리의 교리에 기초한다. 하지만 원시문화인들의 지고신개념은 문화화된 마음의 추론하는 힘혹은 문화화된 상상이 신화적 공상으로 꾸며내는 힘을 넘어서며 초월적 힘을 상징하는 유일신개념에 도달하지 않는다.

특징

지고신

유일신

지고의 창조자

지고의 창조자를 인정

지고의 창조자를 인정

다른 신격들

수많은 위대한 신격들이 있음(다신론)

창조자를 제외한 어떤 신격도 인정하지 않음

인간과의 관계

친척개념, 창조자와 최초의 인간 사이의 관계는 혈통의 관계, 신격=혈족, 태양은 나의 할아버지

불멸의, 선조가 없는, 창조되지 않은 창조자로서, 홀로 가장 높은 하늘에 거한다

이원론

원시적 이원론, 초도덕적

절대적 이원론, 도덕적

 

인간은 누구나 최종원인에 대한 인식을 지향한다. 그런데 그것을 지고신(다신론의 총체) 개념으로 하느냐, 유일신(신비한 무정형의 이동)개념으로 하느냐는 아주 다르다. 애니미즘 세계의 다신론에서 출발한 지고신개념은 많은 신들 중 근원지를 찾으려 하는 것인데, 그것은 원인에 대한 인식을 위한 것이지 어떤 목적을 세우려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반면 유일신은 내 삶의 목적, 의미를 하나로 귀속시키며 삶의 최종적인 심판자를 두는 목적을 갖는다. 지고신과 유일신의 개념은 사고 도출 순서가 다르다.

 

악한 신을 숭배한다

원시문화인들에게 숭배의식은 무엇보다 신성한 힘을 접하려고 애쓰는 일이다. 그러나 이때 선한 신격은 멀리 있고 쓸데없다고 여겨지는 반면 악한 신격은 현재하며 능동적이라고 생각된다. 따라서 숭배는 특히 적대적 원리를 달래는 쪽을 향한다. 숭배의식이 대부분 사악하거나 분노하는 초자연적 존재를 제지하고 달래는데 쓰인다. 그들은 악한 힘을 두려워하는 것만큼 선한 힘을 숭배하지 않는다. 달래야 할 신은 악한 신이다.

지고신 개념에서 인간은 자신의 주변을 죽음의 기운으로 어슬렁거리는 불길한 힘을 망각할 수 없기 때문에 악을 숭배한다. 거래를 내걸며 주의를 끄는 악의 요구를 달래기 위해 기도를 바친다. 그러나 유일신은 행복한 원인에 대한 선을 숭배한다.

지고신개념에서는 언제나 수많은 관계 안에서 선악이 생성 중이다. 하지만 선악은 관계 조건에 따라 위계가 달라진다. 가을에 선한 것과 봄에 선한 것이 다르다. 열매를 거둬들이는 자에게 가을은 선이고, 꿀을 모으는 자에게 봄이 선이다. 낮에 활동하는 생명과 밤에 활동하는 생명의 선악이 다르고, 습한 환경과 건조한 사막 환경의 선악이 다르다. 애니미즘 세계에도 도덕은 있다. 그러나 그 도덕이 인간 중심의 도덕이 아니다. 인간보다 더 높은 상위의 도덕, 우주 전체의 도덕이 있다. 관계 전체를 보는 도덕, 각자 좋은 것들과 나쁜 것들의 우글거림이 공존하는 세계의 도덕이다. 이 세계의 도덕은 조건과 함께 매번 새롭게 발생한다. 내가 좋은 것과 거미가 좋은 것이 다른 도덕이다. 숲 전체에서 보면 개체의 도덕을 놓고 선악을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 공존을 위한 관계의 도덕이 있을 뿐이다.

 

지고신의 도덕은 초도적적

그런 도덕은 초도덕적이다. 그것은 어쩌면 만물에 이 있는 애니미즘 세계에서는 들의 수용능력과 같다고 할 수 있다. 나의 을 거부하거나 적대적인 들에 어떻게 나를 받아들이게 할 것인가, 나를 선택한 을 어떻게 잘 받아들여 을 거부할 때 생기는 ’, 문제를 일으키지 않게 할 수 있는가의 문제일 수도 있다. 영적 교감을 나누고 서로를 알아가며 다른 영들의 행위를 수락하느냐 마느냐의 문제를 생각하며 관계를 조정하는 일이다.

타일러는 애니미즘을 인간과 자연 세계의 원인을 이해하려는 엄청난 지적 노력이라고 말한다. 초도덕을 생각하며 어떻게 다른 영들을 받아들이고 관리하느냐를 고민한다.

그런 의미로 기도는 그 윤리 수행을 위해 무릎을 꿇는 일일지 모른다. 자기를 내려놓고, 자기라는 단 하나의 개체를 부정하며 일신의 좋고 나쁨, 부족의 좋고 나쁨을 내려놓고 그보다 더 상위의 좋고 나쁨을 생각하기 위해 신체를 수행한다. 애니미즘 세계에서 의식과 예식은 사유의 극적인 발화다. 신체로 하는 말인 것이다.

달님은 그 중 가장 귀한 것을 바치는 생명 공양은 최고의 기도가 된다고 했다. 먹고 살찌는 자는 바로 . 내가 금식하는 것은 나에게 들어온 을 굶기는 것이다. 굶은 영이 떠나면 내가 비워지며 일시적인 죽음 체험이 가능해진다. 나를 잊는 망아 상태에서 취향을 버리게 된다. 많은 것을 먹는 것은 나의 취향을 늘리는 일이다. 그러나 굶는 일은 먹는 것보다 더 다양한 것을 먹을 수 있을지 모른다. 비어있음의 가능성이라는 것일까? 어떤 것도 받아들일 준비가 된 몸은 텅 빈 공동상태가 되어 온갖 소리가 다 들린다.

이 세계에서 구체적으로 꿈을 갖는 자는 자기변용을 할 수밖에 없다. 자기가 하고 싶은 것, 되고 싶은 것이 생기는 사람은 어떤 것에나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다. 주어진 조건에 겸허히 자기를 맞추게 된다. 그렇게 나의 영을 바친다. ‘바친다는 것은 듣는 일이다. 다른 적 존재의 말을 들으려면 나의 을 바쳐야 한다. 그것은 굶기와 같은 행위다. 신의 식사에 참여하며 신의 절대적인 요구, 대체할 수 없는 나를 주는 일이다.

희생제의는 또는 나의 연장, 내가 기른 가축’, 나를 닮은 인형’, ‘을 바친다. 화폐의 기원은 원래 목숨값이다. 희생제의는 거래의 개념이 들어있다. 반드시 피해야 할 위협에서 벗어나기 위해 내가 이처럼 소중한 것을 주니, 당신도 나한테 이만큼 해줘야 한다는 피할 수 없는 계약을 맺는 일이다.

 

공동 인격의 목소리를 듣는 일

달님은 애니미즘이란 바위에 그림을 새기는 고대인들이 신성한 돌에 손을 갖다 놓는 것과 같다고 했다. 그들은 귀가 손끝에 달려 있다고 했다. 손끝으로 말을 듣는다는 것이고, 그것이 곧바로 실제적인 행위라는 것이다. 듣고나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듣고 말하는 시간 차이가 없이 즉각적 감각으로 서로의 수용력을 확인한다. 전일적차원의 감각의 이행이 가능한 순간이다.

기도의 또 하나의 형식 중 하나가 베틀 앞에서 옷감을 짜는 일이다. 베틀 앞에 앉는 일은 베틀 신의 목소리를 듣고 대화하는 일이다. 신의 목소리를 듣는 일은 좋은 생각을 하는 것이다. 신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는 것이 나쁜 것이다. 이때 은 공동의 인격이다. ‘의 반대는 자기생각이다. 신격의 반대는 인격이다.

애니미즘 세계는 공동의 인격을 사유하는 삶의 양식화를 중요하게 여긴다. ‘취향도 내 것이 아니라 의 것이다. 그런데 때로 그 은 죽은 자의 것일 수도 있다. 애니미즘의 출발은 삶과 연속된 죽음을 사유하는 일이었다. 애니미즘 세계가 죽음을 사유하는 세계관이라고 할 때 현대는 죽음을 사유하지 않는 세계다. 자연 세계에서 독립된 존재로 영원히 살 것처럼 자기 안에 다른 들을 들이지 못하고, 다른 들에게 나의 이 거부될 때 우리는 생명이 오고 가는 거처로서 자기를 잃는다.

달님은 동화적 상상력, 신화적 상상력의 뿌리에 애니미즘이 있다고 했다. 동화에는 초도덕적 사고의 노력, 근원적 사고의 노력이 있다는 것이다. 서로 수용하고 수용되는 공동의 인격으로서의 상상력이 존재한다. 때문에 동화 속 주인공들은 언제나 절대적 선악에서 벗어나 있다. 어떤 상황에서도 자기 살기 바쁠 뿐 누가 죄와 벌로 심판하는 일에 관심이 없다.

이런 상상력의 반대에 소설적 상상력이 있다. 그것은 근대 이후 개체의 자의식에 초점을 맞추며 전개되는 이야기다. 여기에는 라는 존재를 구성하려는 욕구, 나의 욕망을 절대화하는 1인칭 주인공 시점의 주인공들이 활동하는 반애니미즘적 세계다.

동화와 소설은 신격 개념으로 말하자면, 동화는 다종다양한 영들이 협력하며 활동하는 생기로운 지고신의 세계가 발견되고, 소설은 단 한 명의 주인공이 모든 것을 경험하는 무미건조한 유일신의 세계가 발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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