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안데르센 동화전집] 영원의 기만성
동화인류학/『안데르센 동화전집』 6/24.10.31/최옥현
영원의 기만성
『프시케』의 주인공인 젊은 예술가는 이분법 속에서 괴로워하고 있다. 완벽함과 부족함, 순수와 더러움, 금욕과 쾌락, 종교와 세속, 믿음과 불신, 영원과 필멸. 왜 그에게 인생은 모 아니면 도인가? 그는 끊임없이 자신의 내부와 다투고 있다. 속세에서는 자신의 재능과 쾌락과 싸우고, 수도사 생활에서는 악한 마음과 싸운다. 종교와 속세 사이에서 정신적 방황을 하던 그는 영원의 기만성에 대해 깨닫는다. 결국 영원과 나는 양립할 수 없다. 나는 큰 바다와 같은 영원 속에 함몰된다.
영원함이여, 너는 광대하고 고요한 대양 같구나. 너는 호기심과 예감으로 우리를 가득 채우고는 손짓하여 부른다. 하지만 우리가 너의 고요한 물결 위에 발을 내디디면 우리는 사라지고 죽어 버린다. 사기야! 기만이야!…썩 꺼져. 가 버리란 말이야! (『안데르센 동화전집』, p838)
나는 안데르센의 ‘영원’ 표상이 싫다. 인생의 우여곡절에도 불구하고 똑같은 모습으로 돌아오는 장난감 병정처럼 보인다. 이 작품은 우물 무덤에 묻힌 젊은 예술가의 프시케 대리석 상이 후대에 발견되어 그의 예술성이 칭송되는 것으로 끝이 난다. 물론 안데르센이 이야기와 기억의 영원성을 말하고 있을 수도 있다. 안데르센의 영원은 자연의 법칙을 거스른다. 너무 강조된 ‘나’의 주체성이 영원과는 맞지 않아 보인다.
남동 알래스카의 퀸샤론도 섬에는 나무 토템폴 20개 정도가 썩어가며 하이다족의 신화에 대해 알려준다. 하이다족은 토템폴이 박물관에 박제되기보다 그 자리에서 조상들의 세계를 웅변해주기를 소망하였다. ‘그 큰 까마귀라든가 인간의 아이가 곰에게 안긴 모습이라든가 여러 가지 토템폴이 이끼가 껴서 거의 사라져가려고 하는데 아주 커다란 힘을 가지고 말을 걸어오는 것이지요.’(인문공간세종 홈페이지, 일본어 번역, 호시노 미치오의 『마법의 말』) 박물관에 박제된 기억도, 퀸샤론도 섬의 썩어가는 토템폴도, 우리에게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조상들이 살았던 대기와 공간, 토템폴을 세웠던 그 자리의 썩어가는 기억이 훨씬 많은 말을 하고 있다. 안데르센은 작품에서 늘 주체성을 강조하고 변하지 않는 사물을 자주 우리에게 보여주기때문에 안데르센의 영원은 박물관의 박제된 기억처럼 여겨진다.
<작품 줄거리>
쾌락과 돈(포도주와 빵)을 멀리한 채 작품의 완성도를 향해 달리는 젊은 예술가가 있었다. 친구들은 그의 재능을 인정했지만 젊은 예술가는 스스로 만족하지 못하고 항상 그의 점토 작품을 부숴 버렸다. 그러던 그는 로마의 부유한 저택에서 만난 아름다운 한 소녀에게 반하면서 작품 활동에 박차를 가하게 되고 그는 대리석을 가지고 그녀의 형상을 완성하게 된다. 그 작품은 젊은 예술가의 ‘프시케’가 되었다. 젊은 예술가는 자신의 작품을 들고 소녀(살아있는 프시케)를 만나러 간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젊은 예술가의 사랑 고백에 놀란 소녀는 그에게 “미쳤군! 썩 꺼져. 나가!”라고 한다. 안타까운 그의 미숙함이여! 소녀의 형상을 완성하는 것은 현실의 사랑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일이다. 소녀의 형상을 빚으면서 자신의 사랑을 크게 키워간 그는 한방에 그녀에게 차이게 된다. 그는 소녀가 자신의 작품과 자신을 모두 거부했다고 생각한다. 이 사건 이후 그의 작품은 부서질 위험에 처했으나 친구 안젤라의 도움으로 겨우 보존된다.
그리고 그는 안젤라가 이끄는 대로 포도주를 마시고 캄파냐의 아가씨들을 만나 관능의 시간을 보낸다. 잠깐 현실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낸 젊은 예술가는 집으로 돌아와 스스로의 모습을 수치스럽게 생각한다. “몹쓸 놈! 썩 꺼져. 나가!” 첫 번째의 썩 꺼져가 타인이 자신을 부정한 것이라면 두 번째의 썩 꺼져는 자신의 쾌락에 대한 부정이다. 대리석 상의 신성한 순수함과 자신의 세속적 더러움을 비교하면서 그는 대리석 상을 바라보지 않으려고 천으로 덮고 손으로만 쓰다듬는다.
여러 주가 지난 후 그는 자신의 재능에 대한 믿음을 버린다. 이것이 세 번째의 썩 꺼져이다. 그의 정원에는 오래전에 물이 말라 버려 쓰레기와 먼지가 가득 찬 우물이 있었는데 그는 프시케를 그곳에 빠뜨리고 위에 흙을 채운다. 예술가가 프시케의 무덤에 던진 추도사는 “썩 꺼져. 나가!”였다. 그러면서 그는 삶의 희망도 같이 잃었다.
수도사 이그나티우스가 죽어가는 예술가에게 찾아온다. 그는 이그나티우스의 설득으로 종교 속에서 행복과 평온을 찾고자 수도사의 삶을 시작한다. 하지만 그는 끊임없이 고뇌한다. 종교 또한 망상이고 근사한 생각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자신은 어린애와 같은 순진함과 경솔함으로 재능을 버리고 종교를 선택한 것은 아닌가?
그의 네 번째 썩 꺼져는 영원의 사기와 기만을 향한 외침이었다. 수도원에서 잠시 깨달은 영원의 사기성과 기만성을 그가 계속 붙들고 갔다면 그는 죽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안데르센은 영원에 집착하고 있고 그래서 그의 주인공들은 다들 죽음으로써 생을 완성한다.
<질문>
젊은 예술가의 친구들은 이름(안젤로, 이그나티우스)을 가지고 있는데 주인공인 젊은 예술가는 이름이 없다. 주인공인 젊은 예술가의 작품 ‘프시케’가 나중에 무명씨의 작품이 되기 때문일까? 아니면 주인공의 자리가 수많은 다른 예술가들로 치환될 수 있기 때문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