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과 스웨덴 특파원이 들려주는 슬기로운 외국살이
[슬기로운 tOkyO살이] 후지산의 가을을 만나다.
유난히 길었던 2024년의 여름이 지나가려고 하니 마음이 급해졌다. 최근 몇 년 동안 시원해진다 싶으면 바로 겨울이 와 버리는 바람에 가을을 즐기지 못했다. 추워지기 전에 서둘러 단풍을 보고 와야 한다는 생각에 모처럼 가족이 모두 일정이 없는 주말, 집에서 쉬겠다는 아이들을 어르고 달래고 결국엔 협박까지 해서는 차에 태워 후지산으로 출발했다.
집에서 1시간 가량 고속도로를 달리면 후지산에 도착한다. 아이들이 어릴 때는 자주 다니던 곳이기 때문에,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완성한 우리 가족 당일치기 여행 코스가 있다. 특별한 것은 아니고, 일단 산에서 하이킹을 한 다음 그 지역에서 유명한 호우토우(ほうとう)라는 음식을 먹고 지역의 마트나 농산물 판매점에서 신선한 과일, 채소, 지역 특산물로 만든 순도 100% 쥬스를 몇 박스 사 가지고 오는 일정이다. 마트도 항상 가는 곳이 있어서 그 곳에서만 파는 쥬스를 사야 하는데 요즘은 그 쥬스가 소문이 나서 인기인지 재고가 없을 때가 더 많다. 우리는 이 코스를 다 소화하고 고속도로가 막히기 직전 ‘마의 구간’을 통과해 집에 도착하면 당일치기 여행은 성공했다고 평가한다.
이번에도 이렇게 목표를 세우고 후지산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나지막한 산을 보니 아직 단풍이 들 준비도 하고 있지 않는 것 같았다. 산 위로 올라가면 단풍이 들어 있을 것이라 기대하며 멍하니 밖을 구경하는데 여유로워 보이는 시골의 풍경이 너는 왜, 뭘 위해서 그렇게 바쁘게 사니? 하는 것 같다. 주말만이라도 시계를 볼 필요 없는 곳에서 지내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본다. 아이들은 자기들이 좋아하는 노래를 틀고, 선거, 학교, 친구, 유튜브, 선생님 등에 관한 이야기들로 쉴 틈이 없다. 아, 스마트 기기에서 멀어지니 저렇게 즐겁게 서로 대화를 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후지산으로 가는 길은 디지털 디톡스 시간이기도 하다.
도쿄에서 후지산 방향으로 달리다 보면 후지산을 눈 앞에 두고 달리게 되는데, 이번에는 날씨가 흐려서 가는 길에 후지산이 잘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 근처에 도착하니 안개가 자욱하다. 하지만 나는 안개 낀 숲을 좋아하기 때문에 안개로 촉촉한 숲을 상상하니 시원한 공기가 이미 폐 안에 가득 들어찬 느낌이다. 도시의 찌든 공기로 가득찬 내 몸을 이 시원하고 깨끗한 공기로 바꿔 가득 채워가리라. 다짐하는 것만으로도 신이 난다.
후지산은 후지스바루라인(富士スバルライン)이라는 산악도로를 통해 표고 2300미터 정도의 5합목이라는 곳까지 자동차로 갈 수 있다. 보통 후지산 정상에 다녀왔다고 이야기 하면 이 5합목이 출발지점이 되는 경우가 많다. 후지스바루라인을 타고 5합목으로 올라가는 길은 고도에 따라 달라지는 자연을 확실하게 느낄 수 있다. 특히 지금은 산 위로 올라갈수록 단풍이 들어 있는 정도가 다른 것을 볼 수 있어서 고도에 따라 바뀌는 경치를 즐기기 딱 좋은 시기다. 나는 촉촉한 숲을 상상했는데, 아이들과 남편은 눈이 내린 정상을 상상하고 기대한다. 에이, 눈은 11월 중순은 지나야지. 그래도 안개가 낀 덕분에 후지산이 보이지 않아 이런 상상을 하며 올라가는 길이 즐겁다.
사진 속의 풍경과 날씨가 바뀌는 모습이 보이는가? 우리는 구름보다 높이 올라가고 있다.
5합목에 도착하니 파란 하늘이 보인다. 아래보다 기온도 훨씬 낮고 단풍도 더 많다. 5합목 주차장 옆 기념품 가게는 세계 각국에서 온 단체 관광객들로 붐빈다. 일본어를 쓰는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외국 관광객이 많다. 살짝 피해서 우리는 옆으로 난 길을 따라 6합목에 있는 산장까지 올라갔다. 올라간다고 하기보다는 가볍게 걸었다고 해야 할까? 지금은 후지산 정상까지 가는 길은 다 통제하고 있는 시기기 때문에 6합목 산장 근처까지만 갈 수 있다. 올해는 산 정상까지 가는 길에서 사망사고가 다수 발생했을 정도로 정상까지 오르기는 쉽지 않다. 6합목까지 걸어도 표고가 2400미터 정도 되기 때문에 가끔 두통이 생기기도 하는데, 역시 그날도 머리가 슬슬 지끈거리기 시작한다. 우리집에서 제일 가기 싫다고 투덜거리던 막내는 에너지가 남아 도는지 계속 뛰어다닌다. 부럽다. 보통 이 시기에 여기까지는 올라오는 사람이 거의 없어서 우리가 전세 낸 느낌으로 걸었다. 여유로운 가을을 즐기면서, 신선한 공기도 몸속으로 집어 넣으면서…
소소하지만 가슴 벅찬 감동을 준 거대한 후지산을 뒤로하고, 우리는 배고픔이라는 고귀한 욕구에 순응하기 위해 호우토집으로 향했다. 늘 가던 그 호우토집은 주차장에 주차를 할 수 없을 정도로 손님이 많아서 앞에 새로 지어진 멋진 건물이 있는 호우토집으로 가기로 했다. 본점이 유명한 집인가 보다. 가게 안에 연예인 사인을 많이 전시해 두었다. 잔뜩 기대를 했지만, 우리 입맛에는 늘 가던 그 집이 더 맛있다고 이야기하며 마지막 국물 한방울까지 깨끗이 먹어치웠다. 호우토는 수제비와 칼국수를 섞어 놓은 듯한 음식이다. 물론 국물은 일본 된장 미소를 넣어 한국의 그 멸치육수의 국물 맛은 아니지만, 먹을 때마다 어릴 때 집에서 수제비 반죽을 하던 기억과 집 근처 시장의 손 칼국수 집에서 엄마와 칼국수를 먹던 기억이 떠오른다. 어쩜 그래서 가끔 호우토가 먹고 싶어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조금만 시간이 늦어져도 심하게 막히는 고속도로의 ‘마의 구간’을 지나는 시간이 조금 애매한 관계로 장보기는 패스하기로 하고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그래도 훌륭한 가을 나들이였다. 후지산의 가을을 만났으니, 힘을 내서 올해를 잘 마무리해야지.
디톡스로 가득한 글이네요. 휴대폰 없이 후지산의 좋은 공기를 폐 속에 넣으며 여유롭게 걷는 길! 도쿄에서 후지산까지 당일치기 이 루트를 꼭 가보고 싶습니다. 호우토와 지역 농산물로 만든 쥬스까지 먹고요. 잘 읽고 가을 산의 모습 잘 보았습니다. 고맙습니다.
우리 선생님들과 함께 할 그 날을 항상 상상하고 있습니다. 서울은 폭설이 내렸다고 하더라구요. 짧아진 가을이 그래서 더 소중합니다.
토토로 선생님 덕분에 이렇게 컴퓨터 앞에 앉아서 후지산 단풍을 구경하네요. 뭐 한다고 동네 산 단풍 구경도 못가보는지…… 가족만의 당일 코스 여행 코스가 있다는 것도 부럽습니다.^^
당일치기 여행코스 몇개 있습니다. 기회가 되면 선생님들께 하나씩 풀겠습니다. 흐흐흐
고귀한 욕구. . ㅋㅋ
선생님 덕분에 그 유명한 후지산에 올라가봅니다. 정말 흥미롭고 신기한 단풍 여행입니다. 마트도 궁금하고, 호우토는 더 궁금하네요. 마의 구간도 한번 들어가보고 싶을 정도입니다. 토토로샘의 기행문 정말 좋아요!! 생생!!
가장 소중하고 최우선에 있는 욕구-배고픔. ㅋㅋㅋ 오늘의 1/3을 그 고귀한 욕구를 위해서 썼습니다. 마트, 호우토, 최고지요. 마의 구간 잘못들어가면 애들의 엄청난 불만을 감당하셔야 합니다. 하하하
구름 위를 걷는다는 것이 이런 건가요. 사진을 보니 같은 날인데도 완전히 다른 날처럼, 다른 곳처럼 풍경이 삭삭 바뀌네요. 늘 가던 식당의 맛을 떠올리며 새로 간 식당에서 국물까지 원샷. 사진을 보니 호우토 맛있을 것 같습니다. 선생님의 산행 사진, 글 모두 너무 멋지네요.
늘 가던 식당이 훨씬 맛있다고 투덜거리며 새로운 식당의 국물 원샷 ㅋ 중요한 포인트를 캐치해 내신 강평쌤. 역쉬 맛있는 것만 드시는 선생님!! ㅎㅎㅎ 호우토를 우연히 그 식당에서 만난 교포분이 ‘꿀꿀이 죽’이라고 표현하시더라구요. 애들이 꿀꿀이 죽이 뭐야? 하고 물어보고 검색해 보더라구요.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