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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보충] 농부의 셈법, 시장의 셈법

작성자
coolyule
작성일
2024-11-05 23:22
조회
77

 

농부의 셈법, 시장의 셈법

 

 

 

  길을 가다가 우연히 산사나무를 봤다. 빨간 열매가 예쁘게 달렸다. 우리 집에도 산사나무가 있었으면 싶었다. 나무 아래 떨어진 열매에 눈이 간다. 문드러진 열매일수록 잘 여문 씨앗을 담고 있겠지 싶어 ‘썩음썩음한’ 것 위주로 한 주먹 주워 왔다. 묘목을 사다 심는 게 빠르지 어느 세월에 싹을 틔워 뿌리내리게 할 건가 묻는 사람은 안데르센의 동화 “영감이 하는 일은 언제나 옳다”에 나타난 농부의 셈법 이야기를 못 들어 본 사람이리라. 이 글에서 농부의 셈법을 시장의 거래 규칙과 비교해 보자.

 

 

농부의 셈법, 시장의 셈법

 

  “이보시오, 암소 끌고 가는 양반! 얘기 좀 합시다. 말이 암소보다 더 비싸겠지만 그건 상관없소. 나한테는 암소가 더 쓸모 있으니까. 우리 서로 바꾸지 않겠소?”

 

  시장 거래에서 기준은 단 한 가지다. 나에게 금전적으로 이득인가? 거래는 쌍으로 성립되므로, 이쪽이 금전적 이득을 취하면 상대방은 그만큼 손해를 본다. 말과 암소를 맞바꾼 농부는 시장 거래에서 금전적으로 손해를 보지만, 본인에게는 암소가 더 쓸모 있으니 바꿔도 좋다고 판단한다. 시장의 기준과 다른 기준이 작동하는 것이다. 농부식 거래에서 양편이 모두 이득을 보았다. 기준이 한 가지 이상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구매자의 쓸모라는 기준과 금전적 차익이라는 기준이 공존한다.

  늙은 농부는 왜 시장의 기준에 길들여지지 않은 걸까? 그는 산업화 된 세상이 오기 전인 자급자족 시대의 유물 같은 존재다. 농부의 셈법에 따르면, 농가에 쓸모가 있다면 가치가 있다. 이번 장 나들이에서 차례로 교환한 품목들인 암소도, 양도, 거위도, 닭도 그에게는 모두 쓸모가 있다. 그것들로부터 우유, 버터, 치즈, 털실, 고기와 기름, 병아리를 얻어낼 자급 기술이 있으니 살림에 보탬이 된다.

  그의 연이은 거래는 시장 가격으로 따지면 점점 더 손해인데, 거래 순간에는 항상 농가 살림에 도움이 되는 옳은 판단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이 품목들은 모두 살아 있는 가축들로서 농부로서는 돌볼 의무를 지는 일거리기 때문이다. 만약, 말 가격이 나머지 모든 동물들을 합친 가격과 같다고 쳐 보자. 그렇게 되면 농부로서는 말 한 마리만 돌보다가 네 마리의 여러 가지 짐승을 모두 돌봐야만 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농부의 셈범으로는 오히려 손해가 될 것이다. 이들을 먹이는 부담도 늘어날 뻔 했다. 농가에는 가축을 먹일 풀과 곡식을 자체 조달한다. 집에 있는 할머니도 일이 늘어나니 달가워하지 않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말 대신 암소, 암소 대신 양, 이런 식으로 교환했으니 어떤 가축이 되었든 지금까지처럼 한 마리만 돌봐도 되어 농부 입장에서는 다행이다. 게다가 이제 타고 갈 말도 없는데 가축들을 어떻게 한꺼번에 몰고 집에 돌아간단 말인가?

 

  “농부는 이제까지 장에 오는 길에 많은 일을 했기 때문에 지치고 목이 말랐다.”

 

  농부의 거래는 언제까지 지속될 수 있을까? 금전적 손해를 줄이려면 한 시라도 빨리 시장에서 벗어나야 할 것 같은데, 정작 본인은 시장을 둘러보겠다며 다니다가 거래를 여러 차례 성사시키며 보람을 느끼는 것 같다. 일 많이 했다고 자찬하며 목을 축이러 주막에 들어서니 말이다. 여기서 농부는 독자의 눈에 최악의 판단으로 보이는 거래를 한다. 가지고 있던 닭을 썩은 사과 한 자루와 맞바꾼 것이다. 대체 무슨 짓인지? 주막 안 난롯가에 내려놓은 자루가 타는 소리에 주변 손님들의 호기심이 동한다. 그의 거래담을 다 들은 사람들과 농부 사이에 내기가 붙는다. 내기의 주제는? 이제 집에 돌아가면 할머니한테 ‘혼난다, 아니다’의 내기다. 할아버지는 ‘안 혼난다’에, 영국인 부자 이인조는 ‘혼난다’에 건다. 이것이 오늘의 마지막 거래인 셈이다.

 

있다와 없다

  있다와 없다는 ‘연결’의 존재론적 조건이다. 있으면 주고 없으면 받는다. 말(馬)이 있으면 말이 없는 사람과 교환이 성립한다. 즉시 교환하면 거래이고, 시간차를 두고 교환하면 빌리고 갚는 것이 된다. 할아버지가 시장 거래에 참가할 수 있었던 것은 말 한 마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말과 암소의 교환으로 시작된 교환의 선(線)은 언어의 교환으로 더 두꺼워진다. 수차례에 걸친 흥정, 이를 엮은 거래담, 최종 내기까지 모두 이야기의 교환이다. 거래와 대화는 연결의 기술이라는 점에서 같다. 이 점에서 할아버지는 어리숙하게 보일 뿐 연결의 달인으로서, 언어를 도구로 사용해서 낯선 사람들과 동식물들과 연쇄 “구간 동승”한다.

  집에 남은 할머니도 마을에서 교환을 시도하는데, 결렬된다. 동네 교장 선생님의 인색한 아내는 텃밭 부추를 꾸러 간 할머니에게 ‘없다’면서 돌려보낸다. 부추가 정말 없는 것은 아니고 ‘많이 없기 때문에’ ‘없다’고 한 것이다. 있다와 없다의 차이로 연속 교환이 지속되는데, 있으면서 없다고 말 하니까 교환이 깨지고 만다.

  많다와 적다를 있다와 없다와 동의어로 쓰는 우리의 언어 습관을 돌아본다. 많아야 있는 것인가? 얼마나 많아야 많은 것일까? 왜 우리는 돈이 있으면서 ‘돈이 없다’고 할까? 장소에 사람이 있는데 왜 ‘사람이 없다’고 할까? 우리의 소위 ‘있고 없음’의 기준은 많은 것이 좋은 것이라는 평가에서 유래하며, 적은 것과 없는 것이 나쁜 것이라는 전제를 깔고 있다. 이러한 전제에서는 소유물이 있고 없음과 많고 적음은 ‘빈부’의 차이로 치환될 수 있다. 할아버지는 가진 게 많지 않을지 모르지만 있는 것은 분명 ‘있다.’ 자급과 연결의 기술도 ‘있다.’ 그런데 돈이 ‘많은’ 부자들 앞에서 돈 ‘없는’ 빈자가 될지 모를 상황에 처한다. 내기에 지면 가진 것과 자기 자신을 잃을 판이기 때문이다. 거래 끝에 늙은 부부의 손에 남은 썩은 사과는 농가의 어두운 미래의 상징일까?

 

  “작년에 우리 집 잔디밭 옆에 있는 늙은 사과나무에서는 사과가 겨우 하나밖에 열리지 않았지요. 그래서 우리는 그 사과가 완전히 썩을 때까지 찬장에 간직해 두었다오. 할멈은 늘 그 사과를 보며 큰 재산이라고 했지요.”

 

  농가에서 썩은 사과는 큰 재산이다. 썩은 사과가 세계의 풍요의 일부가 될 수 있다. 사과 속 씨앗이 어린 나무로 자라나기 때문이다. 사과 꽃은 꿀벌을 부르고 벌은 여러 작물들의 수분을 도우며 꿀을 준다. 썩은 사과 한 알까지도 농가의 구성원이다. 농가의 구성원들은 자라고 변화하고 연결되며 전체 순환을 구성한다. 이 장소에서 떼어 내어 시장으로 보내 가격을 매길 경우에만 썩은 사과가 무가치한 것이 된다. 또한, 사과는 썩어 “없어지지만” 농가에 원래 있던 늙은 사과나무가 새로 자라게 될 다른 나무로 갱신되니 사과는 계속해서 “있는” 것이다.

상황 종결자는 할머니

  그래서 내기의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 할머니는 할아버지의 연속 거래 이야기를 들으며 건마다 칭찬한다. 최종적으로는, 텃밭에 자라는 게 없어 썩은 사과조차 빌려줄 게 없다는 교장 부인에게 빌려줄 여분의 사과가 생겼다고 좋아한다. 할머니의 관점에서 볼 때 텃밭 흙에서는 무언가가 자라야 옳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영국 부자들은 판돈 금화 백 파운드를 내주었다. 이것이 동화의 결말이다. 이 돈은 농부가 내기에서 딴 돈이긴 하지만, 상일까 벌일까? 이야기 값을 거하게 받았고, 잃어버린 말 가격인 셈 쳐도 좋겠다. 하지만, 물물교환으로 쓸모를 충족했던 자급 농가의 문턱을 넘어 들어온 화폐에 대한 화자의 입장은 불분명하다.

  동화의 세계 밖 현실 역사에서는 영국 부자들이 이긴 것일까? 농가 쪽에서 건 내기 판돈은 사과 자루와 노부부 본인들이었다. 시장의 셈법이 시장 바깥 영역을 모두 지배하는 세상이 되어 농가의 셈법과 같은 다른 척도들은 썩은 사과와 늙은 농민 부부처럼 먼지가 되어 과거 속으로 사라졌다. 다만, 동화에서 사과가 발효 중이라는 암시를 읽고자 한다. 동화의 화자는, 사람도 이야기도 시간이 흐를수록 매력을 더해 간다고 운을 떼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발효처럼, 오래 걸리지만 본래의 성질과 다른 새로운 의미가 탄생할 수 있다. 이 이야기에 대한 해석도 시대에 따라 변화할 것이다. 이야기의 결말에 농부는 한 손에 ‘분해’되는 사과를, 다른 한 손에 ‘축적’ 가능한 화폐를 들고 있다. 어느 쪽 손을 들어줄 것인가는 할머니에게 달렸다. 역사 속의 할머니들은 문턱을 넘어 들어온 영국 부자를 따라 나가는 길과 젠더적 ‘자급자족력’을 보유한 마녀로 남는 길 사이에서 어느 쪽을 선택했겠는가? 우리 모두 알고 있다, 라고 이야기를 끝낼 뻔 했는데, 우리가 모르는 이야기가 어딘가에 남아 발효하고 있다, 라고 정정하여 이야기를 마무리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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