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안데르센] 요정의 정체
『안데르센 전집』(7)
요정의 정체
2024.11.6. 최수정
주제문: 인간의 감정이 요정의 모습으로 실재한다.
「난쟁이 요정과 정원사의 부인」에서 요정은 부인이 자신의 존재를 믿지 않고 ‘관념’이고 ‘공상’에 지나지 않는다 생각한다고 화가 나 있었다. 그러나 부인은 “내 마음속에서 솟아나는 감정이 요정이라고 생각한단다. 나를 지배하는 정신이라고 말야”(899)라고 고백한다. 요정의 위력과 위대함을 담은 ‘작은 요정’이란 시에 담았다는 것이다. 정원사의 부인이 자기 이야기를 하는 것을 알고 귀를 기울이고 듣고 있던 요정은 자신의 지배하는 힘과 능력에 대한 이야기를 듣자 눈빛이 기쁨으로 빛났다.
안데르센 동화에서 요정은 인간의 감정과 사고를 의인화한 존재로 나타난다. 그 존재는 나에게 독립하려 하고, 나를 놀리고 정복하고 지배할 뿐만 아니라 변덕스럽기까지 하다.
「나무 요정」은 나무에 살고 있는 나무 요정 ‘드리아스’에 대한 이야기다. 눈에 보이지 않는 요정 이야기가 실제 사람처럼 섬세하고 사실적으로 그려지고 있다. 그런데 이 글이 더 독특한 것은 이야기가 ‘우리’라는 주어로 시작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안데르센이 의도한 설정 같다. ‘우리’라는 공동 의식을 토대로 그가 느끼는 것을 나도 느껴야 할 것 같은 압박감을 준다. 게다가 이 우리는 이야기 중간에 ‘나’로 변해 “불쌍한 드리아스…불쌍한 나무요정!”(985)이라고 말하며 나의 정서적 공감을 직접적으로 유도한다.
나무요정 드리아스는 동물의 말은 물론 인간의 언어도 이해했다. 잠자리, 나비, 심지어 집파리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드리아스는 ‘나무 안에 갇혀’있다고 생각해서 ‘새처럼 날아다니’고 싶은 상상을 했다. 모두가 떠나간 도시 ‘파리’를 욕망하며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삼는 일도 서슴지 않는다. 오직 자신의 갈망 때문에 신이 주신 자리를 벗어나 파리로 가게 되지만 드리아스는 ‘늘 같은 것처럼 느껴지는’ 파리에서 ‘파리라고 부르는 멋진 곳’을 발견하지 못한다.
‘인간 세상의 한 부분이 되어서 새처럼 날아다니고 싶어’ 기도하는 드리아스는 자신이 ‘관념’이 아니라 ‘실재’ 한다는 것을 드러내고 싶은 것처럼 보인다. 급기야 드리아스는 자신의 몸을 ‘감옥’이라고 부르며 몸에서 분리되기를 소망한다. 그녀의 소원이 이루어졌는지 밤나무가 전율하며 아이이자 처녀의 모습으로 공중에 떠오른다. 드리아스의 모습은 누가 보아도 사랑스러웠지만 가는 곳마다 모습을 바꿨으므로 그녀를 따르거나 알아보거나 자세히 관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무도 그녀의 정체를 알지 못했고, 그녀 역시 아무도 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열망을 채우고, 불가사의를 보기 위해 떠돈다. 무도회장에서 인간과 춤을 추는 드리아스는 인간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고, 인간이 요정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며, 인간과 드리아스의 팔은 서로를 껴안지 못하고 허공을 휘저을 뿐이다. 주체를 떠난 감정은 어떤 실재성도 얻지 못한다. 주체라는 자기 집, 그 주인의 소유로서만 존재할 수 있다.
안데르센에게 ‘감정’은 ‘요정’처럼 실체가 없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무시할 수도 없어 모호하고 불안한 존재다. 내 속에 있는 감정은 변덕스럽고 모호하기 때문에 존재의 불확실성을 대두시킨다. 그는 나무 요정을 의인화하며 욕망을 일으키는 감정을 천천히 들여다보고 있다. 나를 벗어나려 하는 감정은 때로 몸의 지배를 떠나 독립하고 싶은 요정처럼 위험한 선택을 한다. 정념에 휩싸여 불길에 뛰어들기도 하고, 드리아스 스스로 자기 동맥을 끊는 시도를 한다.
안데르센은 개인적으로 느껴지는 감정이라는 실체에 불안을 느끼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자기 눈에만 보이고 자기 마음으로만 느끼는 감정이라는 불확실한 존재를 요정이라는 존재로 등장시키고 있는 것을 보면 그 불안의 실체를 붙잡아 입증하고 싶은 마음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