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안데르센 동화전집] 심판자의 협박
동화인류학/『안데르센 동화전집』 7/24.11.7/최옥현
심판자의 협박
동화는 인간의 더 나은 삶에 대한 끊임없는 고민을 담고 있다. 요즈음 ‘자기 객관화’라는 말이 유행인데 우리는 자신의 삶을 제삼자의 시선으로 보기 어렵다. 동화에는 죽음이 자주 등장하고 죽음은 심판자의 모습을 하고 있다. 동화에는 이승에서 없던 감각이 저승에서 되살아나 죽은 자는 복을 누리거나 영원한 형벌을 받을 것이다라는 협박이 가득하다. 우리는 동화를 통해 심판자의 시선을 장착해야 한다. 심판자가 우리를 억누르고 노예 취급할 것이라고 두려워하면 안 된다. 우리는 심판자의 시선을 장착하여 더 강하고 훌륭한 인간이 되어야 한다.
『숙모』의 숙모는 연극광, 연극덕후이다. 숙모는 유치원에서 모든 것을 배운 것이 아니라 연극에서 모든 것을 배웠다. 숙모는 연극을 통해 성경 이야기, 역사, 지리, 인간에 대해 배웠고 연극의 주인공에 몰입되어 주인공의 희노애락을 함께 겪었다. 그녀는 덕후답게 연극별로 출연 배우와 무대장치를 줄줄이 꿰고 있다. 숙모에게 가치 있는 집이란 극장과 가까운 집이다. 무대 조감독인 시베르첸과 개인적인 만남을 가지면서 연극 이야기를 나누고 무대 맨 꼭대기 층 관람이라는 특권을 얻어낸다. 그녀의 열성은 극장에 무릎까지 올라오는 썰매용 장화를 신고 갈 정도이다. 눈보라가 몰아치는 추운 겨울에 심야까지 공연되는 발레를 보려는데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걱정되었기 때문이다.
구경과 관람, 엿보기
숙모는 연극 관람만 좋아하는 것이 아니다. 집에서도 창문을 통해 다른 사람을 구경하길 좋아한다. 작은 골목에 살 때는 바로 맞은편에 사는 식료품 장수네 거실을 들여다볼 수 있었는데, 큰길 쪽으로 이사하자 이웃집은 숙모 집의 뒤편에만 있었다. 그런데 이웃집을 들여다보려면 부엌의 찬장 위에 앉아야 한다. 남의 거실을 들여다보는 것도 해괴망측한데 돈 많은 부인이 모양새 없이 부엌 찬장에 올라가 이웃집을 엿보다니! 이웃은 이웃집 문을 두드리고 얼굴을 맞대야 하는 사이가 아니던가. 숙모는 이웃과 관계의 선을 연결하지 못하고 드라마를 보듯이 창문을 통해 이웃의 삶을 구경하고 엿본다.
연극 무대의 맨 꼭대기 층은 장관이나 왕의 고문관 정도가 되어야 앉을 수 있는 자리이다. 경제력이 있는 숙모는 무대 조감독을 통해 무대 맨 꼭대기 층에서 관람을 계속한다. 그런데 숙모가 맨 꼭대기 층을 원하는 것은 이웃을 엿보는 것과 같은 맥락에 있다. 이 자리는 무대가 막이 내린 뒤 배우들이 하는 행동과 표정을 볼 수 있는 자리였다. 숙모는 배우들의 사적인 자리를 엿보고 있었다.
무대 뒤의 진실
숙모는 일주일에 한 번 찾아오는 무대 조감독만을 기다리고 있기가 지루했다. 그래서 목요일마다 발레단에 있는 소녀를 자기 집에 초대한다. 이 소녀는 늘 배가 고팠기에 남은 음식까지 모두 먹어 치웠다. 요정과 시녀 역할을 주로 하는 소녀는 사자 뒷다리 같은 힘든 역할을 할 때는 5크라운을 받았고, 이제는 키가 커서 사자 머리 역할을 하게 되어 3크라운을 받고 있다. 사자의 뒷다리 역할은 허리를 구부리고 걸어야 하고, 천을 뒤집어쓰고 답답한 곳에 갇혀 있어야 한다. 이런 소녀의 상황에도 숙모는 ‘이런 역도 참 재미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숙모는 아이의 굶주림이나 낮은 급여에 관심이 없다. 오로지 연극이 주는 재미와 쾌락에 빠져있다.
무대의 배경은 세상의 축소판이기도 하지만 거짓된 설정이다. 원근법을 통해 거리감을 만들지만 알고 보면 평면이다. 무대 감독들에게 좋은 작품은 ‘1막부터 5막까지 전체가 똑같은 무대 장치로 꾸며지고 소품이 전혀 필요 없는’ 작품이다. 무대는 무대를 만드는 사람들이 무대의 가성비와 효율성을 따진 결과물이다. 무대가 세상의 축소판이라지만 결국은 무대가 쉽게 수용할 수 있는 것들만 관객들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그래서 ‘폭풍우’ 같은 무대 연출은 제외된다.
연극에 관심이 없는 핀제이씨는 배우들과 무용수들의 삶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한다. 핀제이 씨가 말한 것이 그가 죽기 전에 알려진다면 그는 자신이 ‘산 채로 가죽이 벗겨질’ 것이라고 한다. 배우들와 무용수들의 삶은 관객에게 보여지는 모습과는 거리가 아주 먼 것이었다.
연극이 끝나고 난 후, 진짜 연극
핀제이는 연극을 싫어하고 ‘연극이 뒤집히길’ 바라는 사람이다. 숙모가 맨 꼭대기 층의 관람권을 어렵게 구해 핀제이에게 전달했지만 그는 공연 중에 숙면을 취하면서 연극 작품을 대놓고 무시한다. 그에게 연극은 거짓이다.
공연이 끝나고 뒤늦게 깨어난 핀제이는 텅빈, 깜깜한 공연장에서 자신이 원하는 연극을 상상해본다. 극장 입장의 기준은 관람권을 구매할 수 있는 경제력과 지위가 아니라 ‘도덕적인 마음의 상태’가 되어야 한다. 공연 시간을 못 지킨 사람은 다른 사람을 방훼하며 입장해서는 안 된다. 화가들은 무대에 평면의 가짜 계단이 아니라 천국으로 올라갈 수 있는 계단을 그려야 한다. 그리고 무대 감독들은 자신의 목적을 위해 함부로 사용했던 사물들을 제자리에 갖다 놓아야 한다. 무대 위의 시대 왜곡은 바로 잡아져야 한다. 그들은 수탉이 울기 전에 빨리 회개해야 한다. 삶은 한 편의 연극이라는데 죽음 이후를 생각하는 진짜 연극을 해야 한다.
극장에서 나를 추모하라
연극 덕후인 우리 숙모님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녀가 남긴 유언은 ‘내일 공연은 뭐지?’였고, 그녀의 유산은 ‘연극 관람권’이었다. 그녀의 재산은 항상 가장 훌륭한 작품들이 공연되는 토요일 밤에 왼쪽 두 번째 좌석(왕족이 앉는 특별석)을 예약하는 데 기증되었으며, 이 좌석은 가족이 없는 노처녀에게 돌아갔다. 숙모는 가난한 노처녀가 공연장의 왼쪽 두 번째 좌석에 앉아 죽은 자신을 기리기를 소망하였다.
안데르센의 다른 작품을 통해 우리 숙모님의 저승 여정을 살펴보자.
이 세상에서 항상 쾌락이라는 향기로운 술을 마시며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잊어버린 사람은 작은 나무 컵을 받게 되는데, 그 안에는 아무것도 섞이지 않은 순수한 음료가 들어 있지. 그걸 마시면 생각이 맑아지고 착하고 정직한 감정이 되살아나게 돼. 그래서 전에는 보려고도,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았던 것들을 보고, 이해하게 되지. 그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는 양심의 가책이란 벌을 받게 되는 거야. 지상에 살던 시절에는 ‘망각’이란 말이 적힌 컵으로 술을 마셨지만, 이제는 ‘기억’이란 말이 적힌 컵으로 술을 마시게 되는 것이지.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이삿날』, p927)
『이삿날』의 탑지기 올레가 한 말이다. 올레가 탑에 올라가 세상을 내려다보며 철학을 했다면, 숙모는 자신의 창문에서, 찬장에서, 무대 맨 꼭대기에서 사람들과 배우들을 구경하고 관람하고 엿보았다. 그녀는 자기 삶의 주인공이 되지 못하고 관람객, 구경꾼, 엿보는 자였다. 그녀의 자부심은 구하기 힘든 꼭대기 층 관람권을 37번이나 얻었다는 것이다. 그녀는 연극 주인공의 슬픔에는 눈물을 훔쳤지만, 발레단에 있는 소녀의 가난과 배고픔에 공감하지 못했다. 그녀는 죽을 때까지 쾌락이라는 향기로운 술을 마셨다. 이승에서 깨닫지 못하면 저승에서 깨달아야 한다. 저승에서의 깨달음은 ‘망각이 없는 영원한’ 양심의 가책이어서 형벌이다. 이승과 저승은 현세에서는 지금 구간과 다음 구간일 것이다. 지금 깨닫지 못하면 다음 구간은 형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