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인류학 연구실에서는 이렇게 지금 여기의 삶을 완전히 긍정하는 주인공들의 세계를 탐험합니다. 동화 속 주인공들은 정황에 따라 즉흥적으로 자신을 만들어갑니다. 주인공의 삶이 어디로 이끌릴지는 아무도 모르고 정해진 것도 없습니다. 어떤 것으로도 규정 지을 수 없는 존재들이 온갖 살 궁리로 복작거리는 숲에서 깔깔 웃고 떠들며 놀다 옵니다. 그리고 돌아온 그 자리에서 지금 여기의 삶에 감사하며 한 걸음 더 낯선 길을 나서봅니다. 필요한 것은 모든 우연을 수용하고 마음껏 상상하는 것 뿐!
안데르센 동화의 힘
<동화인류학 연재>
2024.11.8. 최수정
안데르센 동화의 힘
안데르센 동화를 읽다보면 동화가 단지 재밌고 감동적인 이야기만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안데르센은 ‘이야기’의 성격이 달라지고 있는 시대의 한 지점에 서 있었다. 민담과 소설의 중간에 서 있었다고 할까? 인류 보편성의 이야기가 채집되어 기록되는 시대였지만, 동시에 보편성과는 거리가 먼 강력한 ‘자아’가 등장하는 시대가 시작되고 있었다. 안데르센 동화는 그가 이 두 시대의 한복판에서 자기 위치를 어디에 둬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하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완두콩 공주」나 「야생 백조」처럼 민담을 바탕으로 한 동화를 쓰는가 하면, 「버드나무 아래서」처럼 동화보다 소설이라 할만한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한다. 안데르센 동화에는 그런 그의 고민이 담겨있다. 세계 전체의 이야기를 할 것인가, 주관적 경험의 이야기를 할 것인가 사이에서 여러 가지 실험을 하고 있다.
원래 민담과 같은 이야기는 민중의 소망과 기대가 담겨있고 주인공들은 특별한 이름을 갖고 있지 않았다. 인류의 공유재로서 작가가 있었다기보다 과거와 현재를 살았던 사람들이 함께 만든 공통의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 ‘민족’이 강조되는 시대에 민족의 언어로 전달해야 하는 인류 보편의 이야기를 어떻게 전달하느냐의 고민이 많아지며 특정한 이름을 가진 주체가 등장하는 이야기가 늘어난다.
낭만주의 시대에는 민중의 마음과 상상력에 직접적 영향을 미쳐 정서로 연결된 공동체를 만들기 위한 사회 이념의 목표가 등장하고 있었다. 안데르센은 동화가 시류에 합류해 무엇을 담아야 하는지 고민했다. 그래서 「홀거 단스케」처럼 덴마크의 실존 인물을 등장시켜 구체화된 역사적 사실을 다루는 이야기도 등장한다. 그런데 나는 덴마크인도 아닌데 덴마크의 영웅 이야기를 동화로 읽고 있다. 역사서라면 절대 읽지 않을 이야기를 동화라는 이유로 읽고 있는 나를 보며 안데르센의 동화의 힘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게 됐다.
자아의 진실
민담은 이야기는 누구나의 이야기였다. 하지만 안데르센 동화는 주인공이 있는 개인의 이야기로 전개되는 경우가 많다. 민담에서 이야기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선악에 상관없이 살지만 이야기 자체는 교훈적이었다. 자연의 모든 것들과 함께 살아가기 위해 해서는 안 될 일을 강하게 규제하는 역할을 했다. 선악의 개념과는 다른 삶의 조건에서 자기 삶을 꾸려가는 인류 무의식의 보편성을 다루었다. 그런데 보편성이 희미해지고 민족의식이 강조되는 시대가 도래하면서 안데르센은 인류 무의식이 아니라 현실을 얘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 현실은 어느 누구의 현실로 구체화되고 현실의 주인공은 특유의 개성을 갖고 있다. 개인의 감정과 개인적 진실이 중요하게 묘사하면서 자기의 진실을 궁금해하는 독자를 파고든다. 그런면에서 안데르센 동화에서 이야기의 역할이 축소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야기로 연결된 보편성의 뿌리가 뽑히고 개인의 자기인식이 중요해지던 시대에 사랑과 질투와 같은 감정이 새로운 보편성으로 자리 잡았다. 어느 누구나 각자 자기 마음속에 감정이라는 것을 갖고 있고, 감정을 공유하면서 같은 뿌리를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보편적 감정을 통해 고유한 자아를 경험하고 느끼며 자기를 확인할 수 있다. 자기 안에 고립된 감정이 자기라고 생각하고 그 자기를 느끼지 못하면 살아있지 않다고 여겼다.
안데르센은 자기 시대의 현실을 인식하고 있다. 뿌리에서 뽑혀 나와 개별적 존재인 ‘자아’를 갖게 되면서 불안에 시달렸다. ‘자아’, ‘사랑’, ‘질투’와 같은 관념의 가치로 동등해져야 했던 그 시대인들은 뿌리뽑힌 사회에서 붙들 곳이 없어진 사람들이 자기 ‘마음’을 붙들 수밖에 없는 현실을 보고 있었다. 뿌리 뽑힌 채 떠돌 수밖에 없는 존재는 움직일 때마다 뽑힌 뿌리의 기억으로 괴로웠다. 뿌리 없이 돌아다니며 자기 뿌리와 상관없는 가치를 찾아 떠밀리듯 세상을 배회한다. 그 시대를 살던 안데르센도 마찬가지다. 나와 세상과의 근본적인 불화가 있었다. 안데르센 동화에서 자기 이름을 갖는 주인공들은 물리적으로 멀리 가지만 정신적으로는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는 안데르센 자신의 모습이기도 하다. 숲에서 뿌리 뽑혀 도시로 옮겨져 모든 관계성을 잃고 고립되어 권태와 허무로 불안해진다.
안데르센 동화는 정말 이 이야기가 어린이들에게 읽히는 ‘동화’인지 의문스러운 생각이 들 때가 많다. 당장 듣고 이해하기 어려운 철학적인 이야기들이 많고, 등장하는 주인공들의 생각들이 너무 심오해 어린이들을 위한 이야기로 생각되지 않는다. 「대부의 그림책」과 같은 이야기는 덴마크의 역사를 길게 설명하는데 마치 역사 교과서를 읽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안데르센 동화는 분명 작가의 의도가 들어있다. 시대에 하지 못한 말을 동화 속 주인공을 통해서 하기도 하지만 또 시대의 이데올로기에 부합된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무언가 교훈을 주려고 하는 느낌이 강하게 다가오는데 이야기의 중심에는 시대의 ‘자아관’이 들어있다.
예를 들면 「빨간 신」에 나오는 카렌처럼 자기 욕망의 대가로 벌을 받는 주인공의 이야기는 시대가 여자아이에게 바라는 교육관이 들어있다. 빨간 신을 신고 영원히 춤을 추는 카렌의 이야기는 독자에게 호기심과 재미를 주기도 하지만, 독립적 이름을 가진 주인공이 자기 욕망의 죄를 뉘우치고 속죄하는 모습은 분명 시대가 요구하는 도덕이 들어있다. 자아를 갖고 있는 개인이 자기 이름의 도덕적 책임에 대한 시대 요구가 반영되어 있다.
안데르센의 그림자
안데르센은 인간을 교육하는 시, 예술의 힘을 믿었다. 안데르센에게 예술가는 고유한 창조성, 개성, 영원하고 진실된 것과 연관이 있다. 시인은 본질적인 것, 제자리에 있는 것을 본다.
그의 자화상이라 생각되는 「그림자」라는 동화를 보면 안데르센은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안데르센은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는 빛과 그림자를 누구보다 잘 꿰뚫어 보고 있다. 직업으로만 자신을 말하는 학자는 이름이 없다. 안데르센은 이름이 없는 학자를 등장시키며 학자의 존재를 모호하고 불투명한 존재로 만든다. 학자는 자기 바깥의 것을 탐구하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제 학자는 자기 안에 더 관심이 있다. 이름 없는 학자는 안데르센이 살던 시대의 많은 사람들이다.
학자의 그림자는 학자의 일부이기도 하고 안데르센의 일부이기도 하다. 「그림자」 이야기에는 안데르센의 불안, 욕망이 잘 나타나 있다. 그림자는 학자가 억압하는 욕망이다. 학자는 ‘그림자’를 잃어버린다. 하지만 그림자는 다시 돌아올 때 ‘내적 존재를 깨달’아서 온다. 돌아온 그림자는 자신의 자아에 대한 우월성으로 자기 확신에 차 있다. 그림자는 학자가 자기 안에서 발견한 ‘형편없고 엉망인 것’인데 이제는 독립해 자기를 주장 한다.
안데르센은 분열한다. 양가감정이 있다. 안데르센은 학자와 그림자의 관계에서 자기의 ‘자아’를 보고 있다. 그림자는 학자가 남몰래 욕망하던 것을 실현했다. 학자는 그림자의 우월성을 인정하고 자기를 떠나 그 욕망을 현실화한 그림자에게 자신을 내어준다. 학자는 끝내 자신의 어두운 면과 직면하기를 거부하고 자기를 포기하고 죽음을 맞는다.
하지만 동화 밖 안데르센은 그림자에게 자신을 완전히 내어주지 않고 그림자와 함께 살았다. 안데르센의 그림자는 성공하고 싶어하는 욕망이었다. 누구를 위해 어떤 글을 쓸 것인가를 고민하며 자신을 인정해주는 글을 쓰고 싶었다. 때로 시대에 아첨하고 거만해지는 자신의 어두운 면을 억압하고 숨기고 싶었지만 그것이 자신의 일부임을 잊지 않았다. 누구나 자아 깊숙이 감추어둔 어두운 그림자가 있다. 빨간 신에 대한 욕망을 드러낼 때 발이 잘릴 것이 두려워 감춰둔 것이 있다. 안데르센 동화의 힘은 안데르센이 자기 그림자를 계속 보고 갔던 것에 있다. 그림자를 더 큰 세계인 동화 창작의 세계로 이끈 힘이 내가 그의 동화를 계속 읽게 하는 힘이라고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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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데르센의 『그림자』라는 작품의 상상력은 참으로 놀라웠습니다. 특히 학자가 앞집을 염탐하고 싶어서, 그림자에게 열린 문으로 들어가보라고 명령하는 부분에서요. 수정샘 말씀처럼 안데르센 동화의 힘이 느껴지는 작품입니다. 안데르센이 자신의 억눌린 욕망을 잘 연구했기 때문이겠지요.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