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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 문화 답사

한반도 the Korean Peninsula

 

[동물원 기행문] 미술관 옆 동물원

작성자
최수정
작성일
2024-11-11 17:47
조회
47

<동물원 기행문>

2024.11.11. 최수정

 

미술관 옆 동물원

 

 

내가 서울대공원 역에 내리자 곧바로 잘 정돈된 넓은 부지의 공원이 나타났다. 숲과 길이 조화롭게 꾸며진 도로를 따라 한참을 올라가다가 보니 동물원보다 먼저 미술관이 보였다. 미술관 옆 동물이라니 미처 생각해보지 못한 조합이다. 비교적 이른 아침 한적한 숲길을 천천히 걸어 올라가며 동물원 주변환경이 너무 넓고 깨끗한 데에 놀랐다. 미술관이 같이 있는 덕분인가? 정돈되고 말끔한 숲에서 오랜만에 휴식을 취하는 기분이 들었다.

미술관 옆 동물원은 나처럼 오랜만에 나들이 나온 사람들에게 두 공간을 동시에 관람하도록 하는 배려처럼 느껴졌다. 가족이나 친구들끼리 여유롭게 천천히 거닐면서 색다른 볼거리를 찾아 나선 사람들에 일석이조가 될 것 같았다. 그렇다면 나도 모처럼 제대로 문화생활을 즐겨볼 생각으로 먼저 미술관에 들러 전시된 작품을 둘러 본 다음 동물원으로 향했다.

그러나 동물원 유인원관에 처음 들어서며 나는 미술관 옆 동물원 느낌이 무엇인지 다시 생각하게 됐다. 동물원이 미술관처럼 관람 시설이라는 사실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방금 미술관에서 본 작품들처럼 유인원들이 각 방에 전시되어 있었다. 마치 작가가 구상한 작품이 작가의 의도대로 관람순서가 배치되었듯 살아있는 동물이 벽을 따라 나란히 줄지어 유리 진열장에 전시되어 있었다.


황금 울타리

프란스 드 발은 원숭이와 초밥 요리사에서 동물을 의인화하는 일은 우리가 동물을 알기위한 수단으로 불가피하다고 말했다. 인간과 동물의 유사성과 연속성이 공유하는 특징은 특히 유인원처럼 우리와 가까운 종을 대할 때 좋은 출발점이 된다. 드 발의 관점으로 동물을 보면 동물들도 그들만의 문화가 있다. 동물도 그들이 살고 있는 생태환경과 어울려 살아가기 위해 주의 깊게 관찰하고 감정을 표현하고, 배려와 이해를 바탕으로 한 생활양식을 만든다.

그러나 인간은 오랫동안 인간과 동물의 연속성을 부인하고 동물의 문화를 인정하지 않았다. 동물은 우월한 문화를 가진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생명으로 다루고 남획하며 그들을 사라지게 했다. “공공 동물원이 생겨나기 시작한 시점은 일상생활에서 동물이 사라지게 되는 시기였다. 사람들이 동물을 만나고 관찰하고 구경하러 가는 동물원은, 사실 그런 만남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기념하는 곳이다.”(동물원의 탄생, 니겔 로스펜스, 이한중 옮김, 지호, 25)

동물원의 시작은 인간이 동물을 동물원 밖에서 사라지게 한 사실을 기억하는 장소였다. 위험하고 신기한 동물들이 인간이 관람하기 좋은 배치로 전시되어 인간의 우월감을 확인하게 하는 기분전환용이었다. 사실은 나도 그랬다. 아이들을 데리고 동물원을 구경하면서 우월한 인간으로서의 아이들이 동물을 사랑하고 돌보고 지켜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동물원 막사를 이동하며 갇힌 호랑이, 사자, 표범 같은 맹수들을 보면서도 그들이 두려운 존재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자연에서라면 나를 잡아먹을 수도 있는 존재들이 순하게 길들여진 애완견처럼 한 번쯤 쓰다듬고 싶은 존재로 보였다. ‘유인원(類人猿)’이라는 말이 무색하게도 침팬지, 고릴라 앞에 서서도 침팬지와 내가 무엇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침팬지와 고릴라는 그저 인간을 닮았고 인간이 되고 싶어 어설프게 인간을 따라 하는 우스운 동물이었다.

동물을 동물원에서만 보는 것이 익숙한 나에게는 이미 인간의 손으로 인간 너머 건너편으로 갈 수 없게 쳐둔 울타리가 너무 높았다. 인간과 동물 사이에 쳐진 뛰어넘을 수 없는 깊은 골과 높은 황금 울타리를 허물 방법이 있기는 할까?

 

동물행동 풍부화

유인원관 입구에서부터 동물원이 계획한 순서대로 이동하며 동물들을 구경한다. 차례대로 앞사람을 따라 유리에 재현된 책장을 넘기듯 차례차례 그림을 넘긴다. 가로막힌 벽을 통해 보는 나의 눈은 유리벽 너머 맞은편 벽에 가로막혀 되돌아와 나를 바라보고 있다. 사방이 막힌 공간에서 자연물처럼 그럴듯하게 재현된 콘크리트 나무와 돌에서 어떤 생명력도 느낄 수 없다. 인공의 공간에서 살아있는 것은 오랑우탄 한 마리뿐이다. 유리벽으로 가로막힌 벽 너머로 이쪽의 소리라도 들리면 좋겠다. 오랑우탄이 앉아 있는 방이 너무 차갑고 적막해 보여 길을 잃은 작은 파리 한 마리라도 그에게 달려들기를 기대하고 싶다.

오랑우탄이 구석에 아무렇게나 놓인 이불 더미로 무언가를 하려고 하는데, 이불 더미가 동물원의 동물복지 프로그램인 동물행동 풍부화’(‘사회성 풍부화, 인지(놀이)풍부화, 환경 풍부화, 감각 풍부화, 먹이 풍부화등 총 5종류)의 일환인가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뜬금없었다. 낡은 이불이 어떤 행동 풍부화를 위한 것인지 모르겠다. 이불로 무엇을 할지 궁금해서 참을성 있게 오래 지켜보아도 오랑우탄은 이불을 뒤집어썼다 들춰봤다 반복하며 느릿느릿 몸을 움직이고 있을 뿐이다. 동물원에 갇혀 인간에 의해 행동 풍부화 복지 혜택을 누리고 있는 오랑우탄의 행동과 환경이 전혀 풍부해 보이지 않는다.

다음 장면은 커다란 고릴라 한 마리가 시선은 멍하니 다른 곳을 보면서 편평한 유리벽에 한없이 얼굴을 부비대고 있는 모습이다. 무기력한 얼굴 전체로 천천히 유리벽을 밀어내듯 차갑고 맨들맨들한 표면을 의미 없이 문지르는 행동을 반복하고 있다. 분명 유리벽 바깥의 생명들은 움직이는 것 같은데, 그들을 느낄 수 없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는가 보다. 자기 앞에 있는 존재들에게 아무리 자기 몸을 밀착시키려 해도 도무지 닿을 수 없어 모든 것을 체념한 것일까? 고릴라는 나를 보고 있는 눈에 초점을 잃고 모든 것에 무관심한 얼굴로 종이 인형처럼 납작하게 눌린 채 내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얀 벽에 걸린 한 장의 그림처럼 박제된 얼굴표정은 오래도록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동물원의 복지 정책에도 불구하고 격리되고, 상호작용할 수 없게 된 침팬지와 고릴라가 전적으로 자신들을 돌보는 관리자들에게 의존하고 있는 데는 변함이 없다. 스스로 어떤 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삶의 자극을 줄 만한 외부 관계를 수동적으로 기다리고만 있다. 스스로 호기심을 유발하고 좇아 행동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서 행동 풍부화복지는 단조롭고 재미없는 생활에 별 변화를 주지 못한 것 같았다.

 

인간처럼 행동하는 동물

좁은 실내 유리 칸막이에 답답함을 느낄 때, 조명으로 어두워졌던 시야가 확 트이면서 푸른 하늘이 보이고 밝아진 야외 막사가 나타났다. 그곳에는 로랜드 고릴라 한 마리가 관중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었다. 너도나도 고릴라를 향해 카메라를 들고 사진을 찍고 환호하고 있다. 나도 그들 사이에 끼어 빼꼼히 고릴라를 쳐다보니 고릴라는 근육질의 알몸 모델처럼 이두박근 삼두박근을 자랑하듯 포즈를 취하고 있다. 관람객들이 충분히 사진을 찍고 자신에게 감탄할 시간을 주듯 오랫동안 포즈를 유지하고 있는 모습이 정말 전문 모델 같았다. 손키스를 날리는 시늉을 하고 박수를 유도하는 여유를 보면 그가 꽤 오랫동안 이 무대에 있었음을 보여줬다. 무대 장악력도 뛰어나서 몸을 움직여 관람객의 시선을 이리저리 끌고 다니며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냈다. 인간이 다듬어준 자신의 모습을 인정받아 전시되는 것이 만족스러워 보였다. 인간이 찬사를 보내는 작품이 된 자신에게 긍지를 느끼는 듯했다.

유인원관을 나와 다른 동물들을 더 관람하기 위해 발걸음을 옮기는데 이상하게 동물들이 하나둘 뒷모습을 보이며 유리문 저쪽 뒷문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시간을 보니 동물원 관람 마감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뒤에서 사육사가 부르는지 아니면 동물들이 그 시간을 알고 있는지 모두 일사불란하게 퇴근하고 있는 모습처럼 보였다. 마지막 곰과 호랑이를 보러 달려간 곳에서도 곰이 천천히 몸을 움직여 무대 뒤로 사라지고 있었다. 호랑이는 늦게 온 관객에게 마지막 팬 서비스를 하듯 울타리 너머 무대를 두어 바퀴 천천히 돌고 나서 문 뒤로 빠져나갔다. 나와 친구들은 일제히 호랑이의 쇼맨쉽에 감탄했다. 그러나 호랑이가 사라진 문을 바라보는 동안 하루의 쇼를 언제 어떻게 끝낼지 정확히 아는 것처럼 퇴장하는 호랑이 모습이 너무 기이하게 느껴졌다.

 

인간문화의 빈곤화

인간은 자연의 동물을 모방하고 배우며 자신들의 문화 범주를 넓혀가는 대신 인간의 문화를 위해 동물을 희생시켰다. 자신을 위협하는 동물들을 사냥하고 사슬을 채워 구경거리로 만들며 우월감에 도취했다. 자연의 먹고 먹히는 먹이사슬의 고리에서 초월한 존재가 되어 동물 위에 군림했다. 그와 함께 자연의 모든 우연을 차단하고 안전한 존재가 되기를 원하면서, 뜻밖에 출현하는 삶의 경이와 놀라움을 경험할 기회도 포기했다. 그렇게 스스로 자연과 단절된 채 인간이라는 조건에 갇혀있다.

원숭이와 초밥 요리사세미나 시간에 달님은 의인화를 통한 감정이입이 이타의 핵심이라고 했다. 감정이입은 그의 입장에서 그의 마음이 어떨까, 그라면 어떻게 할까를 생각해보는 일이다. 그러나 감정이입은 생각만으로 되지 않는다. 감정이입이야말로 함께 한 시간에 비례한다. 오랜 시간 주의 깊은 관찰과 모방을 통해 그가 되는 경험을 하며 그를 이해한다.

동물행동 풍부화 복지로 동물원 동물들이 사는 공간이 넓어지고, 먹을 것이 다양해지고, 사각의 시멘트 방에 놀잇감을 갖다 놓는다고 인간이 동물에게 감정이입을 한 이타의 결과라고 할 수 있을까? 누군가는 동물원의 동물들이 예전보다 더 나은 환경에 있게 돼서 다행이라며 안심한다. 그러나 나는 이른 아침 동물원 입구에서부터 미술관을 거쳐 동물원에 이르면서 이렇게 넓고 쾌적한 공원이 동물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아름드리나무와 철 따라 핀 꽃들로 꾸며진 넓은 숲은 다리가 아프도록 걸어 다니며 자연과 문화를 즐길 인간을 위해 조성된 것이었다. 동물들은 그토록 넓고 풍부한 공간을 작게 분할한 비좁은 공간에 갇혀있어 숲이 있는 줄도 모르고 지낸다.

인간이 다른 동물보다 복잡한 문화를 갖고 있고, 동물의 문화보다 풍부한 다양성을 갖고 있다면 그것은 인간이 자연을 이해하고 배우려고 한 덕분이다. 인간과 다른 종의 문화를 관찰하고 배우면서 고유의 문화를 발달시켰기 때문에 다른 동물과 다르게 더 풍요로운 문화를 가질 수 있었다. 따라서 인간만이 우월하다고 생각하고 다른 종들을 배척한다면 인간의 문화는 풍요를 멈추고 빈곤해질 수밖에 없다. 인간이 동물의 문화를 파괴하고 인간이 보기 좋게 한곳에 모아 가두고 구경하는 일이 정말 인간의 문화를 발달시키는 일인지 생각해 봐야 한다.

나는 원숭이와 초밥 요리사를 읽고 동물원 유인원관을 중심으로 관람했다. 그리고 이전과는 다른 관점으로 침팬지, 고릴라, 원숭이를 생각해보려고 했다. 하지만 나와 그들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가늠할 수 없는 거리감이 있었다. 동물원 울타리가 가둔 것은 동물뿐만 아니라 인간조차 가두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물을 가두면서 인간도 자기 안에 갇혔다.

동물원 동물들은 인간의 의도대로 전시되고 있었다. 미술관 작품이 작가가 전달하고 싶은 주제와 의미를 전달하고 있듯이 동물원 기획자도 분명 작품처럼 다듬어진 동물을 통해 관람객에게 전달하고 싶은 의미가 있다. 나는 당연하게 그들이 기획한 순서대로 안내하는 방향대로 작품을 감상하듯 동물들을 관람하며 즐거워했다. 동물원을 관람하는 내내 지시된 화살표를 따라가며 기획자가 계획한 대로 전시를 마쳤다.

그러나 나는 이번 동물원 답사에서 이전과 다른 것을 봤다. 동물을 인간이 만들어낸 작품을 바라보듯 보던 나를 발견했다. 동물원 기획자가 의도한 방향에서 약간 일탈을 한 것이다. 이는 내가 인류학 답사팀과 다른 생각을 해보기 위해 동물원에 와보지 않았다면 일어나지 않을 변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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