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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안데르센 동화 전집(8)] “요한나 할머니의 이야기”를 읽고

작성자
coolyule
작성일
2024-11-13 15:43
조회
52

『안데르센 동화전집』(8) / 동화 인류 연구회 2024-11-13 김유리

 

가난한 마을 재단사의 우울병

 

 

주제문 : 안데르센 동화 속 옷, 집, 음식은 가난의 기호로 사용된다.

 

<서론>

동화는 노골적인 표현을 허용한다

 

“가난한 사람들은 아이들을 너무 많이 낳아. 고양이 새끼처럼 물에 빠뜨려 살아남는 한두 명만 키운다면 한결 더 잘살 텐데 말야.” 영주는 이렇게 투덜거리곤 했다.(1068)

 

“죽은 사람은 좋은 비료일 뿐이오. 물론 영주님은 돌로 된 무덤에 묻혔지만 말이오. 고귀한 양반이니까 땅 속에서 썩을 수는 없지.”(1071)

 

동화는 민담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민담은 민중이 평소에 제정신으로는 차마 말할 수 없는 의견을 담을 수 있는 매체다. 민담에서는 신분 차등과 빈부 격차라는 삶의 모순에 대해 개인이 겪고 느끼는 것을 허구적 인물의 입을 통해 말할 수 있다. 위 인용문은 차이 나는 계층이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이 담겨 있다.

장원 소속 마을 재단사 이바르 올세는 자녀 열한 명을 낳아 길렀다. 영주는 재단사의 집이 감당할 수 있는 이상으로 식구 수가 불어난 것을 가난의 원인으로 지목한다. 벌이가 줄어든 만큼 지출이 줄어들면 해결이 되지 않겠냐는 것이다. 영주는 재단사 가족을 본인의 영지 내에 책임져야 할 가축 취급을 한 셈이다. 재단사는 근면 정직하게 일하며 살림을 꾸렸지만, 류마티즘으로 더 이상 손을 사용할 수 없게 되면서 궁핍했졌다. 어느날 영주는 돌연사하고, 재단사는 사후에는 모두 비료가 될 텐데 고귀한 신분이라고 해서 다를 게 무엇이냐고 빈정댄다. 서로의 표현 속에서 영주는 비료, 재단사는 가축이 된 셈이다. 도덕적으로 올바르지 않은 발언을 스스럼없이 내뱉을 수 있는 것은 민담에서 유래한 동화 장르의 특징이다.

노골적인 두 입장들이 표현되는 가운데 재단사의 막내아들의 관점이 불분명하다. 마을 재단사로 머물 것인가, 영지 밖으로 나갈 것인가? 입장을 정하지 않으면 표현도 할 수 없다. 홀어머니가 계신 집을 떠나고 싶어도, 사랑하는 사람이 생겨도 막내아들은 입을 다물고 결단을 미룬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 한 채 벙어리 냉가슴을 앓다가 우울증에 빠져 삶을 포기한다. 동화적인 캐릭터에 우울증 환자가 등장하다니, 안데르센의 동화는 민담보다는 희비극에 나올 법한 인물을 등장시켰다.

 

<본론>

가난의 기호들 : 의식주 그리고 결혼

 

가난한 사람들이 ‘너무 많이 낳은 아이’ 중 하나인 라스무스에게 가난은 숨 쉬는 공기처럼 의식주를 통해 체험된다.

 

재단사는 옷을 만드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다. 그런데 옷을 만들어 파는 일은 수공업이면서 서비스직이다. 주문을 의뢰하고 대금을 치를 사람이 전제되어야 하고 아울러 의뢰자의 필요와 취향에 맞추어야 한다. 상업적 재단업의 모순은 자기가 생산한 것을 자기가 소유하거나 소비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옷을 만드는 능력을 보유하고 있어도 자기 입을 옷을 갖출 수 없다는 것은 역설적인 상황이다. 시대 흐름이 바뀌면서 마을 재단사가 제공할 수 있는 제품을 장원 밖에서도 점점 더 쉽게 구할 수 있게 되면서 그의 일의 중요도와 장원 내에서 재단사의 위치가 축소된다. 앞으로는 재단 일로 성공하고자 한다면 도시로 떠나 기회를 잡아야 할 것이다. 재단사에 양손이 류머티즘으로 굳어가는 것은 재단사의 직업이 쓸모없어지고 있다는 현실을 표현한다.

작품에서 옷은 재단사의 능력을 펼치는 인간적인 활동 영역의 표상이 더 이상 아니다. 옷은 가난의 기호로 쓰인다. 영주 부인이 파리에서 유행하는 파티복을 여벌로 구입하는 것에 비해 재단사 가족은 더 이상 꿰매 입을 수 없을 정도로 해질 대로 해진 옷을 입고 생활한다. 마을에서 제일 가난한 소녀 요한나는 그나마 옷을 꿰매 줄 사람도 없어서 떨어진 옷을 입고 맨발로 다닌다. 왜 누구는 예쁜 옷을 여벌로 가지는데 누구는 찢어진 옷을 입고 다녀야 하는가? 왜 누구에게는 옷이 취향과 유행을 반영하는 사치품으로 사용되는데 누구에게는 숨기고 싶은 처지를 들키게 하는 기호가 되는가?

작품에서 옷은 가난한 자들이 가난에 대해 느끼는 감정을 극적으로 과장하는 도구다. 영주 부인은 장례용 마차를 덮었던 직물을 재단사의 집에 하사한다. 재단사 가족은 마차 덮개로 의례복을 지어 입는다. 아버지는 상의와 바지를, 어머니는 깃이 높은 드레스를, 어린 아들은 견신례 때까지 입도록 넉넉하게 지은 새 옷을 차려 입고 교회 행사에 참석한다. 사람들은 먹을 것이 없을 때보다 입고 나갈 옷이 없을 때 더 구차하게 느낀다. 품위를 유지하는 것은 인간의 기본 필요다. 재단사는 새 옷감을 받아 실력을 발휘해 옷을 지어 입었다. 이제 독자도 한시름 놓아도 좋을까? 작가는 이 순간을 노렸다. 마을 사람들 모두가 그 옷감이 어디서 온 것인지를 알고 있다고 슬쩍 덧붙이는 것이다. 이것이 작가가 의도한 극적 아이러니다. 모두가 알고 있지만 차마 말하지 않는 것이 삶의 모순의 긴장과 압력을 높인다. 그리고 당사자를 티 나는 존재로 부각시켜 집단에서 고립시킨다.

 

음식

옷이란 가난을 외부화한다. 이에 비해 음식은 내부화된 가난이다. 작품에서 음식은 땅에서 올라오는 것이 아니라 높은 데서 내려온다. 영주 부인은 재단사 부인에게 우정과 자선의 의미로 크리스마스에 겨울 식량을 보낸다. 라스무스의 엄마는 이 음식을 나누어 마을에서 가장 가난한 요한나를 먹인다. 재단가 가족은 부유한 농가의 결혼 잔치에서 남은 음식을 받기도 하고, 이웃들의 온정의 음식을 받기도 한다. 음식은 뱃속을 채우는 풍요의 흐름이 될 수 있다. 먹을 것만 있다면 일할 힘을 낼 수 있다. 하지만 말 없는 라스무스는 음식으로는 채우지 못할 선망과 동경의 내면을 키워간다.

라스무스는 태어나 자란 집이 아닌 다른 집을 원한다. 라스무스는 아버지의 작은 집을 물려받고 싶지 않다. 도시에 나가 성공하고 싶고, 외국 구경도 하고 싶다. 라스무스의 꿈은 “높이 나는 것”이었다.(1069)

 

라스무스의 영혼은 “아무리 다려도 펴지지 않는 주름”이라고 할 수 있는 선망의 병을 앓는다. 마을의 부유한 농가에 드나들며 그 집 엘제 아가씨와 가까워진다. 하지만, 끝내 고백을 하지 못하고 실연한다. 왜 라스무스는 마음을 표현을 못하는가? 영주나 재단사 아버지와 같은 노골적인 표현력을 왜 이어받지 못한 걸까? 라스무스는 분열한다. 엘제와 결혼해서 부유한 집에 살고 싶은 마음과 그런 집에서 자기를 받아줄 리 없다는 마음 사이에서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반벙어리처럼 군다. 집을 내면에 비유할 수 있다면, 자기조차 편안하지 않은 집에 누구를 초대할 수 있겠는가? 라스무스는 마을에서 제일 가난한 요한나의 마음을 받아주지 못한다. 거름을 나르는 요한나와 결혼하면 가난의 표식이 더 늘어나고, 벗어나고 싶은 자신의 가난한 모습을 벗을 수가 없어진다.

 

‘불쌍한 라스무스’는 자신의 보금자리에 신경을 쓰지 았았다. 그는 담을 수리하거나 새로 회칠을 한 적도 없었다.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람.” 그는 버릇처럼 이렇게 말하곤 했다.(1067)

 

높이 올라가고 싶은 꿈이 꺾인 라스무스에게 재단사의 집은 감옥일 뿐이다. 마을에서 맺은 관계는 모두 그를 집에 묶어두는 굴레다. 견습을 받으러 도시에 나갔다 와도, 실연의 아픔을 안고 방황하다 와도, 진정한 의미에서 자기 집으로 돌아온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 집에서 남처럼 살았기 때문이다. 아파도 약조차 먹지 않으려고 했고, 병원과 선술집을 전전했다. 식탁은 비고 일손을 멈추었다. 집을 돌보거나 수선하지 않았다. 자기 집에도 못 들어가 집 앞 늙은 버드나무 아래 쓰러져 노숙을 한 밤도 있었다. 라스무스의 쓸쓸한 집은 그의 정신에 찾아온 우울증으로 표현되었다. 노총각 라스무스는 늙고 병들어 지팡이에 의지한 채로 엘제의 손녀를 바라보며 추억에 빠진다. 아이들은 미친 노인을 손가락질하며 따라다닌다. “불쌍한 라스무스!”

라스무스는 우울한 삶으로 자기를 조금씩 죽였다. 라스무스는 자기 집과 삶을 방치했다. 부모 대의 재단사의 집은 청결하고 아담하게 꾸며졌다. 식료품실은 음식으로 가득 했고, 재단사 부부는 아이 열한 명을 키웠다. 어머니는 영주 부인도 기른 유모였다. 라스무스는 대체 어떻게 살았으면 좋았을까? 라스무스의 어머니는 아들이 건강한 몸과 마음으로 집을 물려받기를 바랬다. 아들이 자기 삶을 긍정하기를 원했다. 낡은 옷을 입고도 당당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안 될 줄 알면서도 고백을 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요한나의 마음의 가치를 알아볼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좌절과 실패를 겪더라도 과거에 매이지 않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도대체 부모 세대와 무엇이 달라졌기에 라스무스는 그 지경이 되었을까?

하지만 아들의 시선은 집밖에 있었다. 그는 약했다. 옷은 시선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재단사라는 직업은 가난을 멸시하는 안팎의 시선의 힘 앞에서 힘을 쓰지 못한다. 물려받은 직업과 집은 모두 그의 가난과 무력함을 표시하는 기호일 뿐이었다. 영주 부인은 결혼을 두 번이나 하는데 왜 라스무스와 요한나는 결혼을 하지 못하는가? 동화에서 결혼은 온전한 자기로의 승화를 상징한다. 억눌린 표현력, 좌절된 꿈, 정신적 질병으로 찌부러지고 조각나는 라스무스로서 결혼 실패는 불가피한 것으로 보인다.

 

<결론>

동화의 향유 계층과 다뤄지는 인물들의 계층의 격차 문제

 

라스무스가 진정으로 집으로 돌아오는 것의 삶의 긍정과 더 나은 자기 삶의 회복이어야 했을 것이다. 자기 삶을 긍정한다는 것은 어떤 모습으로 드러날 수 있을까? 나는 옷이 마땅치 않는데 어째서 누구는 화려한 옷을 여벌로 가지고 있나를 비교하고 자기의 가난을 확인하는 방식으로는 부족하다. 노력해서 그와 같은 옷을 가지는 것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남이 준 음식으로 연명하고, 남의 옷을 바라고, 남의 집을 전전하기를 그친다면 어떤 삶이 펼쳐질 수 있을까? 음식을 장만해서 가난한 아이들을 먹이고, 식량 농사를 짓는 이웃 농가에 좋은 옷을 지어 주고, 물려받은 자기 집을 알뜰하게 돌봐 아늑한 곳으로 만들어야 한다. 물론 더 부유해지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농사를 짓고 음식을 할 줄 알고 집을 정돈하고 수리하는 것과 함께 옷을 재단하고 꿰맬 수 있는 것은 삶을 구성하는 큰 능력이다.

작가는 가난한 사람들이 처한 모순을 그리고 있다. 장인들이 삶의 기술을 갖추고 있음에도 나막신 신발장이집 딸이 맨발로 다니고, 재단사집 아들이 장례용 마차 덮개를 얻어다가 몸에 맞지 않는 큰 옷을 지어 입어야 하는 현실이 얼마나 모순적인지에 대해 동화는 이야기한다. 좋은 신과 좋은 옷과 좋은 집에 대한 선망이 인간성을 파괴하는 것도 보여준다. 하지만 아이들이 가난에서 벗어날 전망은 어둡다. 그렇다면 작가는 왜 이런 모순을 그리는 것일까?

안데르센이 활동한 문학계와 동화책을 향유하는 독자층은 교육 받은 중산층 이상이다. 우리가 오늘 읽은 이 동화의 내용과 향유계층 사이에는 온도 차이가 크다. 소설은 독자와 인물이 일치한다. 소설은 자기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는 독자들을 위한 상품이다. 이에 비해 동화가 독자층과 이질적인 가난한 사람들을 등장시키는 이유는 무엇일까? 다시 말해, 중산층 가정 안에서 하층민의 병든 내면 풍경을 펼쳐 보이는 이유가 무엇일까?

현실에서는 말하지 않는 것들을 동화에서는 표현할 수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독자들에게, ‘자, 창밖을 내다 보십시오. 가난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여러분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습니다.’ 같은 다소 무서운 상황이 연출되는 것이 아닐까? 겉으로 표현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생각이 없는 것이 아니며,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고, 특히 ‘당신들, 상류층 사람들은 모를지도 모르지만, 아니 모를 리 없겠지만 선망의 눈으로 주시하고 있다’고 일깨우는 효과를 부지불식 간에 내는 것일까? 그리고 작가는 대체 어디에 자기 위치를 정하고 있는 것일까? 어떠하든, 작가의 작품을 통해 가난한 사람들은 동화에서 사물과 동식물이 사람처럼 말하는 것과 동일한 차원에서 발언의 기회를 얻는다. 만약 그 동화가 읽히는 곳이, 가난한 사람들이 가축 취급을 당하는 사회에라면 동화는 가축이 말하는 ‘놀라운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안데르센은 ‘동화’(fairy tale)이라는 용어가 정착되기 전에 ‘놀라운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글을 발표했다.)





<풀지 못한 숙제>

버드나무의 기능

 

작품에서 반복적으로 언급되는 버드나무가 하는 기능이 있다. 재단사의 집 앞 연못가 버드나무는 아주 옛날부터 그 자리에 있었다. 풍파에 낡고 몸이 뒤틀렸지만 아직도 뿌리 내리고 있다.

 

1. 작품의 액자 역할 을 한다. 무상한 인생 행로와 대조되는 자연 풍경이다.

2. 작품의 후렴 역할을 한다. 버드나무에 이는 바람 소리라는 구절을 반복하면서 동화가 구연되었음을, 소리성과 관계 있음을 알려준다.

3. 민담에서 나무의 기능과 동화에서의 나무의 기능의 차이를 보여준다.(인간을 돕지 못한다.)

4. 자연과 인간 삶 사이의 균형 변화를 보여준다.(나무가 이동력이 없는 무력한 존재로 여겨진다.)

5. 인간의 영혼의 병이 인간 정신과 삶에서 나무의 왜소화와 관계되어 있을 것이다. 뿌리 뽑힌 인간들.

6. 버드나무의 치유 효과(약성과 주술력)는 라스무스에게는 효과를 발휘지 못한다.(라스무스의 지팡이) 하지만 별 역할 없는 버드나무가 등장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무의 힘과 자연력이 민담 이후의 동화에도 잠복된 힘으로 남아 있는지 묻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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