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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미즘

만물에 깃든 영을 보다 

 

[최종 에세이] 대나무 영의 행로

작성자
coolyule
작성일
2024-07-17 17:55
조회
162

동화인류학 최종 과제 2024-7-17 김유리

 

대나무 영의 행로

 

동화인류학 세미나를 마치며 첫 시간에 다룬 《가구야 공주 이야기》를 다시 봤다. 《가구야 공주 이야기》는 대소쿠리를 만드는 남자가 대숲에 돋아난 죽순에서 꺼내온 여자 아기를 키우는 이야기다. 이 영화는 일본의 전승담을 원작으로 한다. 『대나무를 취(取)하는 이야기(다케토리 모노가타리)』라는 이름으로 기록되어 전해온다. 에드워드 버넷 타일러는 『원시문화』에서 만물에 영이 있다는 믿음이 아득한 옛날부터 있었다면서 그것을 ‘애니미즘’이라고 부르고자 한다. 애니미즘을 연상시키는 이름인 애니메이션의 형식으로 대나무의 영에 대한 오래된 이야기를 새롭게 구성한 것이 이 작품이다.

대나무를 베면 그 영은 어떻게 되는 걸까? 영화 속 대나무 할아범은 산골 마을 대숲에서 대를 베어다가 소쿠리 같은 생활용품을 만들어 먹고 산다. 자연물을 취해 쓸모 있는 것으로 만드는 제작자가 자연물과 맺는 관계는 애니미즘의 세계관에서는 문제적이다. 이 난제로부터 대나무에 관한 신화가 흘러나온다.

오선민 선생님이 애니미스트라고 주장하시는 팀 잉골드는 『모든 것은 선을 만든다』에서 제작이란 자연물의 생명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 그 생명의 성장 방식에 새로운 주기를 개시하는 역할을 한다고 본다(228-37). 팀 잉골드가 예로 든 카누 제작자는 숲에서 자라던 나무의 삶의 과정을 끝내고 바다의 배라는 또 다른 삶의 방식을 개시한다. 항아리의 경우에도 땅에 속한 물질인 점토가 도공의 ‘어루만지고 달래는 손길’을 통해 항아리로서의 삶을 시작한다.

팀 잉골드는 자연물을 새로운 생활 주기로 진입시키는 제작자에 빗대어 부모의 양육을 설명한다. 인간 부모는 뱃속에서 자라던 아기를 세계 내 새로운 생활로 수월하게 이행하도록 돕는다. 할아범이 나무를 해다가 쪼개고 다듬어 소쿠리를 엮는 솜씨를 발휘하는 와중에 대나무는 인간들과 함께 하는 생활 주기를 새로 시작한다. 대나무의 영은 제작자를 통해 소쿠리로서의 삶에 들어서고, 인간 삶에 자연의 풍요를 담아오는 그릇으로 계속해서 살아간다. 타일러에 따르면 원시 애니미즘의 믿음에서 영은 유기체에만 깃드는 것이 아니라 갖가지 생활도구들에도 깃들어 있다.

죽순 껍질이 벗겨지며 인격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나무의 정령이 다시 사람 아기로 변신하는 이 이야기는 나무 변신담이다. 나무에서 아기가 태어나는 신화소는 자크 브로스의 『나무의 신화』에서 살펴볼 수 있다. 나무에서 태어난 사내아이들인 아티스와 아도니스, 나무껍질에 싸여 보호받는 디오니소스 등이 그 예이다. 나아가 나무로 짠 바구니에 담겨 새로운 양육자에게 발견되는 이야기도 나무껍질에 싸여 죽음에서 건져 올려지는 생명이라는 점에서 상통한다.

문제는 나무에서 인간으로 모습을 바꾸었다고 사람 되기가 완성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사람은 나무와 달리 성장만 하는 것이 아니라 변화를 겪으며 형성된다. 인간 존재는 사람의 형태를 갖추는 즉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 형성되는 마디마디를 거친다는 것이 팀 잉골드의 인간 발생론이다.(잉골드 234) 가구야 공주는 지상의 삶을 동경해 나무나 짐승처럼 살고 싶어 땅에 왔다고 하지만, 그런 그가 동식물이 아니라 인간으로 왔다는 괴리가 서사를 이끌어가는 요인이다. 소녀에서 여자가 된다는 것은 연속적인 것이 아니고 인류학자 빅터 터너의 말대로 ‘존재론적 변환’을 일으키는 것이기 때문이다.(잉골드 231) 이러한 변환은 전적으로 사회 생활의 와중에 통과 의례처럼 일어나기에 대나무 할아범 부부는 어린 딸을 데리고 도시로 이주한다.

도시로 간 대나무 할아범은 제작 일을 손에서 놓고 귀족 행세를 하며 대나무 딸 시집 보내기의 과제에 몰두한다. 여기서 공주의 신랑 고르기 모티브가 등장한다. 가구야 공주는 휘장 속에서 구혼자들을 응대한다. 나비 한 마리가 실내에 들어왔다가 나가는 장면이 암시하듯, 성인식 이후 좁은 곳에 갇혀 지내는 것은 고치 속의 애벌레 같이 변화를 위해 거쳐야 할 통과 의례를 상징한다. 내로라하는 귀족 남자들이 구혼을 하는 중에 가구야 공주는 난제를 내고 이를 해결하는 자와 결혼하겠다고 선언한다. 귀공자들이 도시의 안온한 삶으로부터 벗어나 무시무시한 자연과 싸워 보물을 구해 와야 하는 모험 길에 나선다. 하지만 모두 실패한다. 이들은 자연과 멀어진 자들이다. 그들이 의존한 보석세공 장인이나 뱃사람과 달리 대지에 대한 경험도 지혜도 없이 오로지 보물에 대한 갈망을 자양분으로 움직이는 사람들이었다. 가구야 공주는 모든 구혼을 거절할 뿐 아니라 탈출을 갈망한다. 그녀가 추구하는 것은 자유다.

이 영화의 부제는 ‘가구야 공주의 죄와 벌’이다. 대사에 나오듯 그녀는 원래 달의 거주자로서 지상을 동경하는 죄를 저질렀고 그 벌로 지상에 왔다고 한다. 그런데 오선민 선생님은 그가 지상에서의 결혼과 낳음을 거부한 죄로 망각과 무감응의 세계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 벌이라고 하셨다. 가구야 공주의 죄는 이곳이 아닌 다른 곳을 갈망하는 것이다. 그에 대한 벌은 어느 곳에서도 만족하지 못하는 것이다. ‘과거의 기억과 욕망에 끄달려’(오선민 선생님) 지상에서는 달로, 달에서는 지상으로 돌아가기를 원하기를 반복한다.

가구야 공주는 대나무 속에서 나왔지만 더 근원적으로는 달에서 왔다. 자크 브로스의 나무 정령들이 대지 어머니와 강 아버지에게서 태어난 지상의 존재들인 것과 달리 가구야 공주는 대나무를 통로로 천상에서 내려왔다. 달은 날개옷을 입은 천인들이 지상의 오물을 벗고 슬픔도 괴로움도 없는 상태로 거주하는 죽은 자들의 땅이다. 달의 주기성은 지상의 사계절의 순환과 식물의 재생 주기를 상징하지만, 망자의 땅이기에 달 거주자들은 변화를 겪지 않는다.

가구야 공주가 이승의 삶을 저버리게 되는 결정적인 순간은 황제(천황?)와 만나는 장면이다. 공주를 찾아온 황제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너를 원하면 너는 나의 것”이라고 말이다. 유년 시절을 보낸 산골을 떠나 도시의 인공물들 사이에서 활기를 잃어가던 가구야 공주는, 황제의 말을 듣는 순간 잿빛이 되어 유령처럼 그의 손에서 스르륵 빠져나가더니 모습을 감춰버린다. 대나무의 영은 인간의 동반자가 아니라 소유물(‘것’)으로 전락할 위기에 부딪쳐 더 이상 살아가기를 원치 않는다.

대나무는 압도적인 생명력을 뿜어내는 나무다. 땅을 뚫고 돋아나는 죽순은 놀라운 속도로 성장하고, 뿌리는 뚫지 못하는 것이 없으며, 줄기 속을 매년 더 밀도 높게 채우고, 사시사철 푸르다. 생명력과 능력으로 대나무는 인간의 삶을 지탱해왔다. 자크 브로스에 따르면 나무 숭배의 역사에서 신성한 나무는 군주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나무의 신화』 24-28) 왕들은 나무의 속성을 자기 것으로 갖기를 원했다. 나무의 권능을 얻기 위해 나무에 매달리는 시련을 통과하거나, 나무에 제물을 바쳐 그 재생력을 자기 왕권의 유지를 위해 유입하고자 했다. 대나무를 첩으로 삼고자 하는 황제의 등장은, 나무신의 왜소화를 보여준다.

가구야 공주는 왜 결혼을 거부했을까? 대나무의 정령은 처녀신의 계통을 이어간다. 구혼을 거절하고 붙잡힐 위기에 다른 차원으로 이동하는 나무 변신담의 변주다. 대나무는 좀처럼 꽃을 피우지 않는 나무다. 양성의 결합으로 인한 유성 생식에 의존하지 않는 성질이 구혼을 거절하는 가구야 공주 이야기로 풀려나왔을 것이다. 한편, 대나무 제작자는 아이를 양육하듯 정성스러운 손길로 작품을 만들어왔다. 그런 용품들이 상품이 된 사회에서 영은 거래의 원활함을 위해 제거해야 할 이물질이 되어버렸는지도 모른다.

그럼 이제 인간과 대나무의 영의 관계는 단절된 것일까? 대나무 제작자의 아내는 경작하고 베를 짜는 손을 끝까지 멈추지 않았다. 어머니는 공주가 된 대나무 영의 곁을 끝까지 지키며 대지의 젖줄을 이어주었다. 이와 함께 대지와 가까운 존재들인 어린아이들이 보름달을 맞이하며 부르는 노래는 떠나버린 대나무의 정령이 뒤돌아보게 만드는 요소들이다. 영이 인간 세계를 굽어보는 달에 머무는 한 재회를 희망해볼 수 있다.(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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