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로 건너뛰기

 

 

 

애니미즘

만물에 깃든 영을 보다 

 

[동화 인류학 에세이] 애니미즘, 불안의 치유술

작성자
남연아
작성일
2024-07-24 17:52
조회
158


애니미즘, 불안의 치유술


  현대인들은 모두 불안하다. 불안의 특징은 대상이 없다. 삶이 딱히 문제없이 흘러가도 ‘이렇게 살아도 되나?’라는 불안감이 엄습한다. SNS를 보면 연예인 일상, 인플루언서의 명품 인증샷, 지인의 여행 사진, 사업가의 성공의 비법 등등 다양한 메시지가 들어오면서 나의 부족한 면을 바라보게 한다. 나도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의욕에 성공의 비밀을 알려주는 자기개발서를 본다든지 동기부여 영상을 본다. 그러다 갑자기 ‘남의 기준에 맞추지 말고 나를 사랑해 주세요‘라는 심리학 메시지에 힐링을 얻는다. 인생 별거 없다며 맛집과 카페를 가고 친구를 만나고 이런 게 행복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집에 돌아와 침대에 누우면 여전히 뭔가 불안하다. 과연 이 불안의 박스 안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구멍이 있을까? 현대 시대 불안을 사회 구조적으로 살펴보고, 현대와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원시 문화에서 불안의 탈출구를 찾아보려고 한다. 

  원시인을 떠올리면 우리의 모습과 굉장히 다르고 이질적으로 느껴진다. 심구어 다른 종같이 느껴진다. 19세기 영국 인류학자 에드워드 버넷 타일러는 전 세계의 신화, 의례, 생활을 수집해 『원시문화』라는 역작을 집필했다. 타일러는 전혀 다르게 보이는 지역마다 다른 문화 사이에서 깨지지 않는 인류 문화의 연속성을 발견한다. 바로 그 연속성은 애니미즘으로 정의할 수 있다. 애니미즘은 만물에 영이 들어있고 정의한다. 영의 특성은 여기저기 들어갔다 나올 수 있고, 하고자 하는 욕망이 있고, 쾌 불쾌를 느끼고, 목소리가 있다. 어린애 같고 비논리적인 것같이 들리는 애니미즘이 우리의 불안을 어떻게 치유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답하기 전에 우선 현대 시대 불안의 원인을 파헤쳐 보자.


두 가지의 나르시시즘

  현대사회는 끊임없이 개인의 부족함을 다양한 층위로 파고든다. 오스트리아 철학자 이졸데 카림은 자신을 끊임없이 부족한 존재로 만드는 원인이 나르시시즘적 호명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나르시시즘은 나르키소스가 물속에 비친 모습을 보고 사랑에 빠져 스스로 파멸에 이르는 신화에서 유래했다. 흔히 자뻑, 공주병, 왕자병, 고집이나 자의식이 강한 사람을 나르시시즘이라고 알고 있다. 카림은 나르시시즘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고 말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전통적 나르시시즘’은 바로 주관적 나르시시즘이다. 스스로를 자아 이상으로 추구한다. 두 번째 나르시시즘은 바로 객관적 나르시시즘인데 외부의 인정을 요구한다.

  경쟁 시대에서 나르시시즘적 역량을 요구하고, 장려한다. 우리는 끊임없이 주도적인 인생을 살라고 살아 ‘자기 자신의 기업가’가 되라는 메시지를 받는다. 자기 자신의 사업가란 어떤 사회제도(자격증, 학위)에 의존하지 말고, 어떤 사람의 조언에도 흔들리지 말고, 책임감 있고 독립적으로 자신의 삶을 운영하라는 요구다. 자신을 모범상으로 설정해 그 모범상으로 꾸준히 나아가야 한다. 이런 부름은 명령으로 끝나지 않고, 자신에 대한 믿음을 암시하고 있다. 자기 개발 책에서 우리 모두에게 더 큰 꿈을 이룰 가능성이 있다고 말한다. 이졸데 카림은 이런 메시지들이 안에 ‘나르시시즘의 확장’이 은폐되어 있다고 말한다. 코칭 산업은 “이상적 자아에 대한 이 믿음을 자아 조작 가능성으로 환원함으로써 유지된다.”

  무한 경쟁 속에서 성공은 임무의 완수가 아니라 사회적 퍼포먼스가 중요해졌다. 여기에 바로 객관적 나르시시즘이 작동해 주관적 나르시시즘을 더욱 강화한다. SNS의 시대에 자기를 무한 확대해 유일무이한 자아가 되어야 한다고 압박한다. 유일무이한 자아는 바로 경쟁 저편에 도달할 수 있다고 암시한다. 불과 10년 전 성공이라고 하면 대기업 취업, 학위, 자격증에서 자신의 성과를 입증했다. 하지만, 이제는 자격증은 타자의 인정이라는 새로운 능력주의로 대체되었다. 예를 들어 예전에는 의사라는 타이틀로 성취를 인정받았지만, 이제는 ‘유튜브 20만 구독자 의사’ 같은 인기가 필요하다. SNS에서는 의사로서 직업뿐만 아니라, 의사맘의 가족, 일상까지 덧붙여진다. 그야말로 자기는 자기 자신의 자본이면서 자기 자신을 활용하는 기업가가 되어야 한다. 카림은 위장된 두 가지 나르시시즘은 교대로 서로를 강화하고 있다고 말한다. 나르시시즘적 호명은 증식되어 아무도 닿을 수 없는 유일무이라는 ‘현실적 허구’를 자극한다. 모두 ‘필연적 실패’를 겪을 수밖에 없고, 불안의 박스 안에 갇힌다.

  심리학자는 불안의 해결책으로 SNS를 끊고 자신의 이상을 낮추라고 말한다. 운동을 하고, 명상하고, 일기를 쓰며 일상의 루틴을 통해 인정욕구를 내려놓고 소중한 나를 지키라고 이야기한다. 심지어 불안은 자기 개발을 위한 원동력이니 긍정적인 마인드로 이 불안을 활용하라고 한다. 행복하고 싶다, 잘 살고 싶다는 욕망은 나르시시즘적 호명 아래서 내가 부족하다는 결핍으로 이어지고 아무리 벗어나려고 해도 현대인의 고통은 무한 반복된다. 얕은 해결책으로 나르시시즘적 호명의 덫에서 빠져나오기 힘들다.


죽음을 명상하기

  이제 애니미즘을 다시 불러보자. 애니미즘의 정의는 ‘만물에 영이 있다’이다. 만물은 사람, 자연, 사물 등 모든 물질을 포함하고 그 안에 영이 들어오고 나갈 수 있다. 영의 특성을 살펴보면 물질성이 있어서 수증기, 얇은 막, 그림자 등 다양한 모습으로 상상된다. 두 번째는 인격이 있다. 영이 하고자하는 욕망이 있고, 쾌와 불쾌로 느끼고, 말을 한다. 영혼 교리의 출발은 바로 죽음이었다. 원시인은 죽으면 몸에서 영이 빠져나가 계속 사람들에게 나타난다고 믿었다. 이런 믿음을 보여주는 의식은 바로 죽은자를 위해 공물을 바치는 것이다. 몽골 투란 인종들 가운데 추바시족은 무덤에 음식과 냅킨을 갖다주고, 밤에 일어나 음식을 먹고, 냅킨으로 입을 닦으라고 말한다. 북아메리카 휴론족 또한 망령들이 밤마다 마을로 와서 솥 안에 남은 음식을 먹기 때문에 사람들은 남은 음식을 먹지 않는다. 지금도 하는 제사와 무덤에 술을 따르는 것 또한 원시 문화의 연속성이다. 원시인과 고대인은 죽은 조상이 자신의 수호령이라고 믿었다. 태즈메이니아에서는 사고에서 구출된 것은 죽은 아버지의 영인 수호천사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에스키모들은 사망한 부모의 영혼이 친밀한 귀신 ‘토른가크’ 영이라고 믿는다. 많은 부족은 내가 살아남은 것은 누군가의 영 덕분이라고 생각하고, 조상을 숭배했다.

 인간의 죽음뿐만 아니라 동물의 죽음에서도 원시 부족들은 예의를 갖추었다. 다양한 부족은 곰을 사냥한 후에 곰에게 용서를 빌었다. 아이누족은 곰을 죽인 후 사체를 자르기 전에 절을 하면서 예의를 갖추었다. 코리아크족은 곰을 죽이고 가죽을 벗겨 한 사람에게 가죽을 입힌 뒤 자기들이 죽인 게 아니라 러시아인들이 죽였다고 변명한다. 사모예드족 또한 살해된 곰에게 사과한다. 골디족은 곰을 산 채로 잡았을 때 우리 속에서 살찌우면서 ‘형제’ ‘아들’이라고 부르다가 희생물로 잡아먹는다. 자신이 먹고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죽인 곰의 영에게 사죄하는 마음을 갖는다. 애니미즘에서 만물이 영이 있기 때문에 모든 존재는 동등하다. 하지만, 먹고 살아야 하는 생명 시스템 안에서는 죽은 것을 잡아먹어야 살 수 있다. 먹고 먹히는 자연의 위계는 어떤 존재가 더 높다는 우월함이 아니라 다른 존재로 인해 내가 살아있다는 감사함이다. 그런 감사함을 기억하면 나 또한 언젠가 다른 존재를 위해 내어줘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영의 공공재로서 자아

  영은 만물에 들어오고 나가면서 체현된다. 현대인도 오컬트 영화나 드라마를 통해 사람의 몸에 다른 영이 들어갔다는 체현이론은 낯설지 않다. 원시인은 아프거나 병이 들었을 때 주술로 악한 영을 빼내려고 했다. 말레이반도의 오랑라우트족이 천연두가 발생한 곳으로 이어지는 길에 귀신을 쫓아내기 위해 가시나무와 솔을 두기도 했다. 오리사의 콘드족은 천연두의 여신을 막기 위해 기름을 부어 방어벽을 만들었다고 했다. 경련이나 발작은 선택받은 자로 해석하기도 했다. 시베리아 부족은 쉽게 경련을 일으키면 샤먼으로 길러지기에 적합하다고 생각했다. 흥미로운 점은 그리스철학에서도 영이론을 인정했다. 소크라테스는 영적 지식을 부인한 자들에게 악한 영인 귀신이 들었다고 말했다. 또한 알렉산더가 친구 클레이스토스를 죽인 것은 화난 디오니소스의 영향이라고 말한다.

  원시인과 고대인들에게 자신의 몸안에 다양한 영들이 들어오고 나온다고 믿었다. 그들은 영들의 목소리를 잘 들어야 했다. 악영들을 화나지 않게 잘 달래고, 악한 영이 들어오지 않게 관리해야 했다. 그리고, 위대한 영들을 존경하며 숭배했다. 애니미즘적 사고에서는 내가 나를 이상으로 만드는 나르시시즘이 작동할 수 없다. 왜냐하면 내가 선택하고 움직이며 살아가는 모든 행동은 영이 함께하고 있기 때문이다. 애니미즘의 목표는 자기 개발이 아니라 바로 영의 증식이다. 원시인들은 나의 행복과, 나의 성공을 바라지 않는다. 애니미즘에서 나는 고유한 정체성이 아니라 많은 영들이 함께하는 공공재이다. 내 몸을 건강하게 만들어 많은 영들이 들어와 활기가 있는 상태를 만들어야 한다. 


영 관리술 – 감응력 높이기

  날씨를 예측할 수 없던 원시인들에게 자연은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그렇기에 태양, 대지, 비, 천둥, 달, 나무, 돌, 바람 등등 모든 자연을 숭배했다. 북아프리카 휴론족은 하늘에게 ‘아론히아테!’라고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불 속에 담배를 재물로 던졌고, 하늘에 의지하고, 존경하며, 신성한 것을 감지했다고 한다. 하늘에 ‘오키’라는 귀신이나 힘이 있어 날씨를 통제한다고 상상했다. 그들은 오키의 분노를 두려워앴고, 중요한 약속에서 오키에게 증인이 되어 달라고 요청했고, 약속을 어기면 하늘의 징벌을 두려워했다. 기우제는 비의 신에게 공물을 바치며 기도한다. 콘드족은 비의 신에게 물을 주지 않으면 씨앗은 땅속에 썩고, 그렇게 되면 자신과 자손들 가축까지 굶어 죽고, 사슴과 야생 돼지도 다른 서식지를 찾을 거라며 물을 퍼부어주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자연을 숭배하는 원시인들의 모습은 굉장히 낯설고 이질적이다. 이런 이질감은 우리가 자연으로부터 단절되어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선 인류학자 팀 잉골드는 건축의 발전은 우리가 공기를 사고할 수 없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르네상스 이후 건축의 목표는 날씨의 출입을 막는 것이었다. 날씨는 건물의 문과 창문, 벽과 지붕을 아무리 두들겨도 출입을 단호하게 거부당했다. 그러면서 대기는 이제 기상학으로 실험 과학으로 전환되었고, 날씨를 측정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런 전도는 자연을 우리가 통제할 수 있다고 착각하게 되었고, 공기를 잊어버렸다. 

  어떤 생명도 공기 없이 단 한 순간도 존재할 수 없다. 공기는 대지에서 뿌리내린 식물들의 잎이 태양의 광합성 작용으로 생성된다. 모든 자연의 요소 없이는 나도 존재할 수 없다. 모든 생명은 자연의 속에서 공기 속에서 엮어지고 풀어진다. 원시 문화의 자연 숭배는 생명의 망에 내가 매달려 있다는 것을 자각한 것이다. 팀 잉골드의 표현으로는 감응력을 높인다고 말할 수 있다. 내가 나무를 보지만, 나무는 나를 휘감으면서 본다. 내가 돌을 만지고, 돌도 나를 만진다는 것을 감응한다. 자연과 감응하면 밀어 당기기와 끌어당기기, 들숨과 날숨, 예상과 회상의 교대가 잘 되어 활기가 생긴다.


사물과 우정맺기

  영들은 생명과 자연에서만 머물지 않고, 사물로도 확대된다. 18세기 샤를 드 브로스가 아프리카인들의 사물 숭배에 인상을 받아 만든 페티시즘이라는 단어로 명명했고, 타일러는 페티시즘을 애니미즘의 하위개념으로 들여온다. 원시인들은 문화권마다 목석 숭배, 돌 숭배, 등등 다양하게 나타난다. 원시 부족들은 치아, 발톱, 뿌리와 말린 씨앗, 조가비, 돌 등등 다양한 물체들을 늘 몸에 지니고 다녔다고 한다. 이런 물체들을 숭배하고 수집하는 이유는 행운을 위한 상징적 부적으로 사용되었다. 원시시대부터 장식물을 모았다는 것은 아름다운 형태와 희소성이 있는 물체들을 수집 자체가 인간의 본성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타일러는 페티시즘을 “신기한 것에 대한 갈망, 자연의 법칙과 균일성의 지루한 느낌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에드워드 버넷 타일러, 『원시문화』, 아카넷, 312쪽)이라고 해석했다. 

  현대인 또한 일상의 지루함을 벗어나기 위해 끊임없이 상품을 산고, 물건의 주인이 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페티시즘 관점에서 현대인은 물건의 영에 불려 다닌다. 한정판이나 명품 구매를 위해 오픈런을 하기도 하고, 앱에 들어가면 갖가지 광고를 자기도 모르게 누르고 있다. 심지어 필요한 것이 없어도 다이소에 들어간다. 필요해서 산다고 합리화하지만, 집 어딘가 방치해 어디 갔는지도 모르는 물건들이 많다. 반면에 명품백이나 외제 차에 영혼을 실어 소중히 다루면서 신처럼 모시기도 한다. 인간은 물건들에게 영을 빼앗겨 무기력해진다. 그러면 또 다른 영을 받기 위해 여기저기 백화점과 팝업스토어를 떠돌아다닌다.

  애니미즘은 단순히 적게 사라는 미니멀리즘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애니미즘은 물건에 담긴 영들과 우정을 맺는 법을 알려준다. 기니에서는 페티시의 집에 수탉의 깃들이 꽂혀 있는 항아리, 실이 감겨 있는 못들, 붉은 앵무새의 깃털들, 사람의 머리카락 등 수 천개의 사소한 물건이 걸려있다고 한다. 그들은 엄청난 맥시멀리스트이지만, 사소한 물체 하나하나를 영적인 존재로 봤다. 애니미즘을 상상하면 소비로 물건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과 맺는 우정으로 확장된다.


함께하고 있는 용기

  그렇다면 과연 애니미즘은 어떻게 현대인을 나르시시즘적 호명에서 해방될 수 있을까? 타일러는 원시인들은 사물의 원인을 마음껏 설명하는 능력이 바로 행복을 원천이라고 말했다. 


그들은 그들 삶의 모든 좋고 나쁜 일들, 그리고 자연의 모든 현저한 작용을 친절하거나 적대적인 영들 탓으로 돌릴 수 있었다. 그들은 죽은 조상의 살아 있는 강력한 영혼들과, 그리고 개울과 수풀의 영들, 평야와 산의 영들과 친숙하게 교류하며 살았다. 그들은 살아 있는 강력한 태양이 빛줄기와 열을 그들에게 퍼부어주며, 살아 있는 강력한 바다가 맹렬한 파도를 해안으로 끼얹으며, 위대한 인격적인 하늘과 대지가 만물을 보호하고 생산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인간의 몸이 몸에 거주하는 영-영혼 덕분에 살아서 행동한다고 주장되듯이, 세계의 작동은 다른 영들의 영향력에 의해 수행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에드워드 버넷 타일러, 『원시문화』, 유기쁨 옮김, 아카넷, 364쪽)


  원인을 마음껏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은 삶의 다양한 사건을 입체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이다. 나르시시즘적 호명 아래에서는 모든 기준이 개인의 능력과 개인의 책임에 달려있다. 그렇기 때문에 뭔가 일이 잘 안 풀리면 괴로하고 이렇게 된 원인을 나에게서 찾는다. 하지만 돌아켜 생각하면 ‘타이밍이 안맞았다’고 당시를 회상한다. 나에서 벗어나 원인을 다양하게 분석하는 것이 바로 애니미즘적 사고이다. 애니미즘 사고를 확장하기 위해 마지막으로 현대인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두 가지 가치를 애니미즘적으로 해석해 보려고 한다. 

  첫 번째는 바로 책임이다. 원시문화를 읽으면서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난감한 부분이 바로 악한 영들을 탓하는 것이었다. 나르시시즘적 호명은 책임감을 강조한다. 자신에게 주어진 업무를 실수 없이 완벽하게 끝내야 한다고 스스로를 압박한다. 그리고 예기치 못한 실수가 발견되면 너무 부끄럽고 스스로를 자책하고 반성한다. 하지만, 애니미즘은 영의 탓을 한다. 살인을 저지르고 디오니소스가 화났다고 말한 알렉산더의 말은 최근 심신미약을 근거로 감형하려는 뉴스가 떠올랐다. 현대인이 생각했을 때는 책임감 없어 보이는 이런 말은 선과 악을 다시 생각해보면서, 공동의 책임으로 확장된다. 원시 문화에서 악한 영에 들지 않기 위해 공동체 전체가 의례를 하고, 영들을 달랜다. 약한 영에 들더라도 함께 그 영을 빼내고 쫓아내려고 한다. 모두 함께 영혼을 증식할 방법을 모색한다. 공동의 책임은 무겁지만 외롭지 않다. 

 두 번째는  용기이다. 스티브 잡스는 유명한 연설에서 늘 갈망하고, 우직하게 나가라며 “Stay hungry, Stay foolish”라고 말했다. 많은 현대인은 낮은 자세로 항상 새로운 것을 향해 도전하라는 용기의 메시지로 기억하고 있다. 그가 발명한 스마트폰 덕분에 그의 말은 정말로 현실이 되었다. 현대인은 먹방과 맛집 사진을 보며 늘 배고프고, 짧은 숏폼 동영상으로 멍청해지고 있다. 현대인의 용기는 결핍 속에 빠져있다. 페루의 샤먼 오스카 미로-퀘사다는 용기를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용기는 매 순간 포용하고, 매 순간 기뻐하고, 필요한 것은 이미 모두 가졌음을 믿는 것이다. 용기는 우리가 이미 완전함을 기억하는 것이다. 우리가 다시 기억하여 돌아가게 돕는다.” (오스카 미로-퀘사다, 보니 글래스-코핀 지음,  『신성한 용기』, 주미련 옮김, 정신세계사, 2013년, 204쪽) 애니미즘은 우리가 이미 모두 가졌음을 기억하는 것이다. 용기(courage)는 바로 심장인 어원cor에서 왔다. 잠시 심장에 손을 얹어 뛰고 있는 가슴을 느껴보자. 그 안에 오가는 많은 영들을 느껴보자. 용기는 내 안에 있다. 

  나르시시즘적 호명은 외롭고 위태롭다. 자기 자신이 자본의 땔감이 되었는지도 모른채 번아웃되어 재로 남는다. 이제 영들의 충만하고 촘촘한 세계인 애니미즘을 불러보자. 우리에게 빠져나갈 구멍이 있다. 벗아웃이 아닌 활기가 넘쳐 마르지 않는 샘물이 될 수 있다. 

전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