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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미즘

만물에 깃든 영을 보다 

 

[나무의 신화](1)_ 아낌없이 주는 나무, 주는 것이 받는 것이다

작성자
최수정
작성일
2024-07-03 17:08
조회
169

나무의 신화

 

2024.7.3. 최수정

 

아낌없이 주는 나무, 주는 것이 받는 것이다

 

 

인간이 지구상에 모습을 드러내기 훨씬 이전, 거대한 한 그루의 나무가 하늘까지 뻗어 있었다. 모든 생명의 원천인 나무는 수많은 생명체들을 보호했고, 그들에게 양식을 주었다. 뿌리에 의해 땅속에서 길어 올려진 물은 수액이 되고, 태양은 잎과 꽃 그리고 열매를 생겨나게 하였다. 이 나무를 통해 하늘에서 불이 내려왔고, 나무는 구름들을 모아 엄청난 비를 내리게 하였다. 곧게 뻗은 나무는 천상과 지하의 심연 사이를 연결하고 있었고, 이로써 우주는 영원히 재생될 수 있었다.

인간에게 있어서 나무는 평온과 지혜의 전형이었다. 태양이 수평선 아래로 모습을 감추고 추위가 대지에 엄습하면, 잎이 떨어진 나무는 긴 휴식과 동면의 시간 속으로 들어간다. 나무는 존재와 부재의 속성을 동시에 갖는다. 인간은 나무의 부활을 통하여 스스로에게 삶의 새로운 의지를 불어넣는다.

에너지로서의 생명

우주목으로서의 나무는 우주의 구성체와 인간이 이 우주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치를 설명하고 있는 신화들 가운데 가장 인상적이고 풍부하며 보편적인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대립되는 두 개의 무한을 서로 연결시키는 동시에 상반되는 의미를 갖는 대칭적인 두 심연인, 뚫고 들어갈 수 없는 어두운 지하의 물질과 접근할 수 없을 만큼 빛나는 에테르가 서로 결합하는 나무 앞에서 인간은 꿈을 꾼다.

물질에 활력을 주는 에너지로서의 생명은 자신과 관련되는 모든 존재들에게 사실상 동일한 것이다. 이 존재들은 식물, 동물, 인간, 경우에 따라서는 신이 될 수도 있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망각하고 있다. 인간이나 동물, 혹은 신 자신일 수도 있는 희생제의는 일종의 복원 의미를 띤다. , 빌어온 것에 불과한 에너지를 언젠가는 다시 되돌려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슈밧타, 거꾸로 세워진 나무

인도 신화에서 우주목으로 등장하는 아슈밧타는 붓다가 출현하기 전부터 훌륭한 상승목이었다. 그런데 아슈밧타 나무는 대개의 경우 뿌리를 천상에 둔 채 나뭇가지가 온 대지를 덮는 모습으로 거꾸로 그려진다. 아래를 향하여 가지들이 뻗어 있고 위쪽으로는 뿌리가 위치해 있으나, 저 높은 곳에서 빛이 내려오는 형상이다. 명상가는 나무를 통하여 그 나무 안에서 천상의 뿌리를 향해 거슬러 올라간다. 이것만이 그가 인간의 조건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위에서 아래로 향하는 수직적 흐름은 순수 에너지를 물질로 변형시킨다. 태어나면서 이미 물질이 된 패배자는 이 흐름을 역방향으로 거슬러 올라가면서 드러나지 않은 에너지인 자신의 근원으로 환원하고자 한다. 따라서 거꾸로 선 나무는 상호 순환의 상징이 되는데, 이러한 순환은 하강에는 창조의 의미를, 상승에는 속죄의 의미를 부여한다.(75)

이는 유대교의 카발라 생명의 나무도식과 비슷하다. “생명의 나무는 절대자, 우주, 인간과 유사하다.” 신적 에너지는 거꾸로 세워진 뿌리로부터 나뭇가지를 향해 하강하며, 이렇게 하여 인간에게 내려온 신의 에너지는 창조주의 주변에서 꽃을 피우기 위하여 근원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다.

 

자기 희생, 재생의 조건

게르만 신화의 오딘이 이그드라실나무에 매달려 물과 양식을 갈구하며 제의적·입문적 죽음을 받아들이고, 이 죽음을 통해 최상의 지식, 즉 또 다른 세계의 신비한 언어인 룬 문자를 얻는다. 오딘은 지혜의 샘 미미르에게 한쪽 눈을 주고 정신의 눈을 얻는다. 룬 문자의 마술적 힘에 의해 자유의 몸이 되어 부활한 오딘은 무사의 신으로서뿐 아니라 시인과 현자, 다시 말해 샤먼들의 신이 된다.

인도의 붓다는 나무 아래에서 꿈을 꾸다가 너무도 인간적인 악몽에서 깨어난다. 신성한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명상에 잠기는 동안 인간이 끊임없이 분리되려고 하는 우주에 대한 직관적 이해가 존재의 저 밑편에서 떠오른다. 그것은 인간이 점유하고 있는 장소에 대한 이해요. 그가 수행하고 있는 역할에 대한 이해이다. 그것은 모든 생물체가 소유하고 있으나 단지 인간에게만 거부당하는, 아니 오히려 인간만이 거부하는 자연적이며 필요충분한 이해이다. 붓다는 무화과나무인 우주목 아슈밧다아래에서 스스로를 제물로 바쳤다. 불영속적이고, 덧없으며, 고통 받는 존재로서의 인간을 스스로 포기한 붓다는 이제 우주목과 같은 존재이다. 그의 내부에는 우주목으로서의 본질이 감추어져 있다.”

그리스의 디오니소스는 인간의 자연에의 귀속, 동물과 식물에게 생기를 주는 에너지와 인간에게 동력을 제공하는 에너지의 동일성을 우리로 하여금 재발견토록 하였다. 디오니소스적 광기는 인간들로 하여금 자아의 울타리를 부수고 완전한 자연 속으로 침잠하도록, 또한 인간과 동식물의 삶이 서로 소통할 수 있도록만들었다.

신과 자신을 동일시함으로써 모순까지도 수용하여 자신이 갖고 있는 조건을 초월할 수도 있는 인간과 가까운 신에 대한 제의는 도시 국가의 합리적이며 비인격적인 공식적 의식들과 대립된다. “자유로운 사상의 소유자인 디오니소스 덕택에 오래된 기원과 현재가, 의식과 무의식이, 질서와 혼돈이, 삶과 죽음이 서로 하나가 되었고, 디오니소스를 거쳐 인간은 우주목의 보편적이고 근원적인 전형을 재발견하였다.

신은 우주목의 전형을 가지고 있었으며, 우주목은 끊임없이 존재해 왔다. , 우주목의 뿌리는 땅 속 가장 깊은 곳인, 씨앗과 죽은 자들과 과거와 가능한 모든 미래의 세계에까지 뻗어 내려가 고통스럽고 위험한 행로를 걸어야 한다. 이러한 고행은 죽음과 부활의 순환에 복종하는 나무와 신이 하늘을 향해 팔을 뻗기 이전에, 즉 겨울이 지나고 난 뒤에 올 모든 새로움의 봄을 미처 알지 못하는 시기에 이루어진다.(159)

오딘과 붓다 디오니소스의 자기 희생은 생래적인 것이며, 제물이 된 자는 모두의 행복을 위해 스스로 희생된다.(142) 그러나 제물로 바쳐진 뒤 그는 다시 부활한다.

 

궁극적으로 하나인 존재

에리고네는 디오니소스의 나무인 소나무에 목을 메고, 헬레네는 자신에게 바쳐진 나무인 플라타너스에 목을 맨다. 이들이 자신의 나무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사실은, 봄에 그들이 태어난 곳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희생은 얼핏 죽은 것처럼 보이는 나무의 겨울잠과 일치한다. 이는 스스로를 내면화하는 작업이다.

전설 속에 등장하는 신성한 교수 행위와 인간을 제물로 바치는 고대인들의 이 같은 제의는 둘 다 희생 제물이 되는 대상에게 더 나은 삶, 즉 불멸을 약속하고 있다.(143)

타로 카드의 전통적인 상징에 따르면, 매달린 자는 자발적인 희생과 자아의 망각을 나타낸다고 한다. 이것은 또한 자신이 태어난 정신적인 희생과 자아의 망각을 나타낸다고 한다. 이것 또한 자신이 태어난 정신적인 세계와 결합하기 위하여 모든 물질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킨 신비한 영혼을 묘사하는 것이기도 하다. “자신의 고유한 에너지를 포기한 이 신비주의자는 우주의 영감을 더 잘 받아들이고자 스스로를 무화無化시킨다.” 여기에는 지상 세계의 새로운 재생을 촉진시키고자 하는 의도가 포함되어 있다. “목을 매다는 것은 궁극적인 회귀의 비밀이다……. 그러나 이러한 회귀는 재생의 조건이다.”(143)

나무에 매달린 여신들을 보면 풍요와 제의와 일치한다. 이 신들을 숭배하는 민족들에게 있어서 이러한 제의들은 겨울의 한파와 여름의 가뭄 같은 표면적인 죽음 저편에 존재하는 자연으로 되돌아가는 것, 인간들을 짓누르는 기근의 위협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그 목적으로 하였다. 이러한 제의들 한편에는 희생 제물이 된 신들이, 또 다른 한편에는 제물의 도구가 있었다. 이것들은 서로 뒤섞여 있으나 궁극적으로는 하나다. 희생된 혹은 스스로를 희생한 나무 그 자체라는 것이다.(204)

인간을 제물로 바치는 제의는 필연적으로, 인간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제공하는 나무의 제의로부터 그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205) 나무와의 접촉은 나무에 접근하는 사람들이 선조들에 대해 잊고 있던 기억들을 일깨우기에 충분했다. 나무를 통해 인간은 삶에 이르고, 생의 기원을 재발견하며, 동시에 불멸에 이른다.(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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