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미즘
만물에 깃든 영을 보다
[나무의 신화2] 신성과 이익
동화인류학 8번째 시간/『나무의 신화』/24.7.11/최옥현
신성과 이익
숲은 영으로 가득찬 곳이었다. 몇몇 숲들은 인격화되고 신격화되었다. 신은 자신의 신성을 나무에게 부여하고 분배하였다. 나무는 흐느끼고, 피를 흘리고, 사람들 사이의 서약에 대한 증인을 서며, 행진을 하고, 구원의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신전이 생기기 전에, 산꼭대기의 빽빽한 숲은 그 자체가 성소가 되어, 인간들은 그곳에 제단을 만들고 신에게 제의를 바쳤다. 성스러운 숲에서 인간들은 여러 가지 금기를 지켜야 했다. 인간이 어떤 성스러운 숲에 들어가려면 끈에 묶여야 들어갈 수가 있었다. 그곳에서 넘어지면 일어설 수 없었고 뒹굴어서 나와야 했다(인간은 오직 신의 처분에 달려 있을 뿐이라는 퍼포먼스 같다). 성스러운 숲에서 열매를 함부로 먹으면 생명을 잃을 수도 있고 가축 또한 먹여서는 안 되었다. 나무들은 신의 인격의 대변자였으며 숲의 돌멩이와 나뭇잎과 꽃들은 요정들이었다.
이런 숲에 유일신을 믿는 사람들이 도착한다. 그들은 나무와 샘물에 대한 제의를 반대한다. 유일신을 믿는 이들에게 애니미즘을 믿는 자들은 모두 이교도일 뿐이다. 유일신 찬봉자과 애니미스트 사이에 싸움이 벌어진다. 신의 영력을 시험대에 올려 누가 더 힘이 쎈지 대결한다. 그리스도교 전도사들이 이교도들을 개종시키려고 했을 때, 이들이 수행해야 할 최초의 임무들 중 하나는 수목 숭배 제의를 금지하고 성림을 파괴하는 것이었다. 성림 파괴 작업은 4-5세기부터 제국주의 시대까지 계속 어어진다.
그리스도교의 선과 악의 구별이라는 미명 아래, 영은 물질로부터 분리되고 인간은 더 이상 자연에서 영을 볼 수 없게 되었다. 인간의 영혼이 신에게 귀속되자 자연은 육체(물질)와 더불어 불가피하게 신으로부터 버림을 받는다. 인간의 나무와 숲에 대한 숭배의식은 희미해져 갔다. 숲에서 신성을 보던 인간은 숲과 나무를 ‘이익’으로 보게 되었다. 이제는 신성한 의미뿐 아니라 신의 발현으로서 간주되어 온 자연에 대한 존경과 경이로움이 사라져 버렸다. 사람들의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 오로지 이 나무들로부터 얻어낼 수 있는 이익뿐이었다.
이 땅에는 단 하나의 우주목이 남은 듯하다. 생명의 나무를 의미하는 십자가만이 남았다. 자연에서 영을 걷어낸 인간은 참나무를 뿌리째 뽑는 일에 무덤덤해졌다. 그래서 인간은 더 잘 살게 되었을까? ‘이러한 절대적인 인간 중심주의는 인간을 더 이상 인간 그 자체로 인식하지 않는다.’(자크 브로스, 『나무의 신화』, p368) 신성을 빼앗긴 참나무처럼 인간 또한 마구 다루어질 수 있는, 온기가 없는 대상으로 전락하였다.
p206
– 야생이란 말은 ‘숲’을 뜻하는 실바에서 유래하므로 나무들은 살아 있고 ‘영혼’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 같은 믿음은 빠른 속도로 사라져 가고 있는 민속을 통해 매우 막연한 모습으로밖에 남아 있지 않으며, 우리에게는 다소 철 지난 미신처럼 보인다.
– 식물의 심리에 관한 저서(자가디스 챈드라 보스)
p208
설령 신이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다 하더라도 나무들에게는 각각 신성이 부여되어 있기 때문에, 말하자면 신성이 분배되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러한 징후들을 신이 선택한 징표로 해석하였다.
p209
– 신전이 지어지기 훨씬 전에는 분명 성스러운 숲들이 가장 오래된 성소들이었을 것이다. 성소는 종종 성림 한가운데에 우뚝 솟아 있거나, 혹은 도도네에서처럼 신들에게 바쳐진 나무들을 보호하고 에어싼 울타리의 일부였다. 크노소스나 자크로스의 예술가들은 산꼭대기의 성소들을 빽빽이 들어찬 숲에 둘러싸여 있는 것으로 그리고 있다. 제의는 항상 야외에서, 신봉자들이 모여든 성스러운 숲의 제단을 중심으로 올려졌는데, 이 점에 관해 호메로스는 여러 번 언급하고 있다.
– 물푸레나무의 성스러운 총림–제의를 올리던 장소, 드루네메톤–숲 한가운데에 위치한, 사회 집단으로부터 떨여져 있기는 하지만 사회와는 불가분의 정신적 관계에 있는 드루이드교의 신전,
– 이 어두운 성역을 훼손하려는 시도가 있을 때면 그 시도자는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고 전한다.
– 성스러운 숲에서 지켜야 할 금기들 : 끈에 묶여 숲에 들어간다, 일어서면 안된다, 성스러운 숲에서 열매를 먹으면 안된다(생명을 잃는다). 가축도 먹여서는 안된다.
– 몇몇 숲들은 인격화되고 신격화되었다.
p214
그리스도교 전도사들이 이교도들을 개종시키려고 했을 때, 이들이 수행해야 할 최초의 임무들 중 하나는 수목 숭배 제의를 금지시키고 성림을 파괴하는 것이었다.
10세기 프라하의 성 아달베르는 성림들 중 한 곳에서 자신이 전도했던 프러시아인들에 의해 살해된다.
5-6세기에는 지방의 집정관들이 맹목적인 미신들에 대항하여 그리스도교도들을 보호한다.
452년 아를르의 집정관들은 나무와 샘과 돌을 찬미하는 것을 금지하는 법률을 제정한다.
567년 투르와 568년 낭트의 집정관들은 숲 속에서의 불경한 제의를 집전하는 사람들을 향해 비난을 퍼붓고, 악마들에게 바쳐진 나무들을 저주한다.
11세기 초 라울 글라베르가 자신의 『연대기』에서 샘과 나무에 대한 분별 없는 숭배심을 경계함
중세의 사제들은 일요 설교에서 나무 아래에 제단을 만들고, 제물을 바친 신도들을 비난함
4-5세기 최초의 골족 복음 전파자들은 이러한 관습들을 근절시키기에 바빴다.
p219
반인반수 존재에 뿔이 등장하는 이유는 사슴 뿔은 가을에 떨어졌다가 봄이 되면 더욱 크게 새로 돋아나기 때문이다. 이것은 자연의 주기적인 ‘재생’을 암시한다. 나뭇잎이 떨어지면서 없어졌다가, 그 잎들이 다시 돋아나기 시작하면서 사슴에게 생겨나는 것은 뿔이 아니라 바로 ‘나무’이다. 식물의 죽음과 부활의 신을 우리가 이보다 더 잘 떠올릴 수 있겠는가?
p226 모든 나무들은 각각 자기의 고유한 본질에 어울리는 영혼을 가지고 있었다.
p227
나무와 요정을 동일시하고, 이들이 신과 어떠한 관계를 갖고 있으며, 변신을 하기 위해 어떤 조건들이 필요한지 살펴보는 것은 그들이 갖는 미덕과 고대인들이 그 본질에 부여한 인격적 모습을 감지할 수 있게 한다. 우리는 변신 이야기들을 통해 모든 의미의 중심체인 자연을 읽고, 인간이 다른 종들과 맺는 관계와 그 각각의 정확한 용도를 해석할 수 있기 때문에 변신은 뚜렷한 의미를 갖는다.
p247
죽은 자들의 영혼이 나무에 깃들인다는 믿음은 매우 일반적인 것이었다.
– 매장이 끝나면 이들은 모두 하늘을 날아다니면서 심판을 받기 위해 나무로 온다.
참나무는 밤이면 흐느끼는 소리를 냈다.
산사나무 역시 자주 피를 흘리곤 했으며
어떤 나무들은 맹세의 증인 역할을 하여, 이를 어긴 자에게 처벌을 내렸다고 한다.
제의를 올리는 자리에서 구원의 노래를 불러 주는 나무들도 있었고
그 옛날 시인 오르페우스가 자신의 칠현금으로 나무들을 감동시켜 그것들을 움직이게 한 것처럼 행진을 하는 나무들도 있었다.
길을 가던 이야니크는 나무 두 그루가 ‘서로 다투면서 홧김에 나무 껍질을 벗겨 멀리 던지는’ 놀라운 광경을 목격한다.
p250
돌과 샘물에 바치는 제의들은 매우 생생하고(『프랑스의 풍속』이 쓰여진 1905년까지도 최소한 그러하였다) 뚜렷한 모습을 띠었다. 그러나 나무에 대한 숭배 의식은 매우 희미해졌다. 그것은 아마도 그리스도교가 점차 나무 제의를 없애기 시작한 데 그 원인이 있는 것 같다.
수원을 메우고 장애가 되는 수많은 바위들을 치우는 일보다 참나무의 뿌리를 뽑는 일이 더욱 쉽다는 사실을 덧붙일 수 있을 것이다.(식물에 대한 무관심, 제의에 대한 무관심이 만든 세상)
p267
– 모든 동화에서 발견되는 이 요정들은 풀잎과 꽃 사이에 흩어져 있는 부서진 돌멩이와도 같다.
– 동화를 통해 단편적이나마 고대의 지식을 되찾을 수 있다고 믿었던 낭만주의 석학들의 나라 독일에서는 동화를 ‘요정 이야기’라고 부르지 않고 ‘착한 여자 이야기’라고 부른다.
또는 산파, 인간의 출생을 주재, (그림 형제의) 동화에 등장하는 노파가 종종 실을 잣는 여인이라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생명의 어두운 힘과 밀접한 연관을 갖는 산파이자 현인이면서 마법사인 이 ‘현명한 여인’, 골족의 여사제들이 담당했던 역할
p289
막대기건 빗자루건, 모세의 지팡이건 헤르메스의 지팡기건, 마법의 막대기는 결코 일상적인 한 개의 나뭇가지에 불과한 물건이 아니다. 이 나뭇가지가 성목, 생명의 나무 혹은 우주목에서 유래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그것은 권능을 갖는다.
p289
요정들이나 숲 속의 다른 피조물들을 사라지게 만든 것은 종교라기보다는 적극적인 합리주의였다. 교회는 사탄에게 예속될지도 모르는 영혼들로부터 신자들을 보호했을 뿐이지만, 합리주의는 악마의 존재를 부인한 것처럼 요정들의 존재도 부인했기 때문이다. 학교에서는 이것을 도 다른 시대의 미신이라고 가르쳤다. 결국 우리는 마법이 풀린 숲을 새로운 기술을 동원하여 개발할 수 있게 되었다.
p303
이제는 신성한 의미뿐 아니라 신적인 발현으로서 간주되어 온 자연에 대한 존경과 경이로움이 사라져 버렸던 것이다. 이제 사람들의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 오로지 이 나무들로부터 얻어낼 수 있는 이익뿐이었다.
p347
나무는 최초의 인간–완전한 인간–이 선택해야 할 두 개의 길, 즉 종의 보존에 기여하고 인류 역사의 과정에 동력을 제공하는 생물학적인 길과, 신의 말대로 ‘당신의 모습과 형상을 본떠’ 만들었기 때문에 창조주와 분리되어 있지 않은, 그러므로 역사가 존재의 시작점을 갖지 않은 초시간적인 신비의 길이라는 두 개의 길을 상징하는 두 개의 가지로 나누어져 있다.
p348
대부분의 전승들에서 생명(혹은 샘)의 나무는 땅의 끝이나 죽은 자들의 세계에 근접한 곳과 같이, 접근할 수 없는 장소에 위치해 있다.
p349
영원한 생명을 추구하는 최초의 인간 혹은 영웅, 이들에게 그것을 부여하는 생명의 나무 그리고 접근을 금지하는 뱀, 이 삼각형의 구도
p352
종교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개념의 총체를 단일한 하나의 이미지로 압축시키는 데 있이서 나무만큼 훌륭한 상징은 없다.
p354
생명의 나무와 이 십자가를 동일시함으로써 우리는 아담과 ‘새로운 아담’인 예수를 동일한 맥락에서 파악하게 된다.
p358
이제 골고다의 언덕은 ‘세계의 중심’이 되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곳에 에덴 동산의 생명의 나무인 우주목을 심었기 때문에 다시 세계의 중심이 된 것이다.
p360
십자가와 생명의 나무를 동일시하는 이와 같은 믿음들이 비단 그리스도교 사회에 국한된 것만은 아니다. 우리는 스페인의 침입을 받기 이전에 나온 멕시코의 여러 예술 작품들 속에서 그러한 생각을 읽을 수 있다. 원초적인 나무는 코덱스 보르기아에, 혹은 가지가 많고 잎이 무성한 십자가 형상의 여러 부조들에 그 모습이 나타나 있는데, 십자가는 공간의 총체성, 우주 그 자체를 상징한다.
p367
선과 악의 구별이라는 미명하에, 그리고 낡아빠진 사고 방식에 대한 반발로 영혼이 육체로부터 분리되고 인간은 자연으로부터 멀어지게 되었다. 인간의 영혼이 신에게 귀속되자 자연은 육체와 더불어 불가피하게 신으로부터 버림을 받는다. 육체와 자연은 유혹을 부추기기 때문에, 그것들은 에덴 동산에서 인간을 추방시킨 데 책임이 있는 옛날 지식의 나무의 뱀, 즉 악마의 도구들일 뿐이다.
p368
우리는 신화가 이러한 창조의 틀을 원초적인 것으로 보지 않는다는 것을, 즉 인간 조건과 그 조건의 불안정성에서 등장한 초기의 사건 정도로 그것을 인식한다는 것을 알았다. 사실 살아 있는 모든 존재자들의 화합에 근거한 생명의 균형은 파괴되었다. 이러한 절대적인 인간 중심주의는 인간을 더 이상 인간 그 자체로 인식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