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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미즘

만물에 깃든 영을 보다 

 

[최종 에세이] 애니미즘에 이끌려가기

작성자
남연아
작성일
2024-07-17 17:58
조회
133

애니미즘에 이끌려가기


  서점, 광고, 티비 여기저기 나다움을 강조하는 시대이다. 나를 존중하고, 나를 사랑하고, 나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어디서든 성공할 수 있다는 이론이 팽배한다. 학연지연과 스팩을 넘어서 SNS에 사진과 영상으로 나를 증명하는 시대이다. 이런 시대의 육아는 아이를 주인공으로 만드는 것이 목표다. 생일파티에 마술사를 부르고, 태어난 지 천일, 이천일, 삼천일도 축하해준다. ‘앞으로는 나르시시스트 사회가 될 거예요’ 유명한 아동 정신의학과 교수님이 말씀하셨다. 부모는 아이를 언제나 기쁘게 만들고, 아이가 불쾌함을 느끼면 그 감정을 해결해 주기 위해 전방위적으로 노력한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가 학교에 가면 엄마처럼 나를 맞춰주는 사람이 없어 적응하기 힘들어진다고 한다. 나르시시즘이 강화되면 거울과 셀카를 바라보는 시간이 늘어난다. 나만 바라보면서 세상은 협소해지고, 개인의 기준과 취향이 뚜렷해져 타자와의 관계를 맺기 힘들어진다.

  원시 시대 애니미즘은 나를 넘어서 넓은 관계로 들어가게 도와준다. 19세기 영국 인류학자인 에드워드 타일러는 전 세계의 신화와 문화를 수집해 『원시문화』라는 책을 집필했고, 애니미즘 이론을 정립하였다. 애니미즘의 정의는 “만물에 영이 있다”이다. 만물은 사람, 자연, 사물 등 모든 물질을 포함하고 그 안에 영이 있다. 영들의 특성은 인격적인데 첫째 무엇을 하고 하자 하는 욕망이 있고, 둘째 쾌와 불쾌감을 느끼며, 마지막으로 대화한다.

  애니미즘 이론을 들으면 첫인상은 비과학적이고 미신이라고 판단할 수 있다. 하지만, 잘 살펴보면 현대인의 삶, 생활, 그리고 문화까지 애니미즘은 스며들어 있다. 제사를 지내고, 물건에 이름을 붙이고, 점을 보러 가고, 최근 인기 있는 오컬트 영화와 드라마까지 모두 애니미즘으로 해석할 수 있다. 현대인은 볼 수 없는데 어떻게 믿냐고 주장한다.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있는 빛의 파장은 오직 가시광선인 400~700nm 범위이다. 새는 가시광선과 자외선까지 볼 수 있어 300~700nm까지 보기 때문에 인간보다 더욱 화려한 세계를 본다. 우리가 볼 수 없다고 존재하지 않다고 믿는 건 인간중심주의의 치명적 오류이다. 현대 시대의 이성의 논리를 잠시 내려놓고 온몸으로 자연과 교감했던 원시 부족들의 세계로 접속해 보자.

죽으면 사라진다는 착각

  죽으면 어떻게 될까? 애니미즘은 죽음에 대한 깊은 사유에서 출발한다. 원시 부족들은 죽어도 몸으로부터 분리된 환영이 죽음 이후에도 계속 존재하며 사람들에게 나타난다고 믿었다. 이런 믿음을 보여주는 의식은 바로 죽은자를 위해 공물을 바치는 것이다. 투란 인종들 가운데 추바시족은 무덤에 음식과 냅킨을 갖다주고, 밤에 일어나 음식을 먹고, 냅킨으로 입을 닦으라고 말한다. 휴론족 또한 망령들이 밤마다 마을로 와서 솥 안에 남은 음식을 먹기 때문에 사람들은 남은 음식을 먹지 않는다. 서아프리카의 에피크족 요리사는 무덤 근처에 있는 오두막에 음식을 두면서 고인의 영들이 그것을 먹는다고 생각했다.

  원시 문화뿐만 아니라 문명사회에서도 영들을 위한 의식을 치렀다. 프랑스 왕의 장례식에서 실제로 왕이 살아있을 때와 똑같은 절차로 식사했는데 여기서 다른 점은 식사 후 위령 기도가 덧붙였다고 한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케이크와 꼬챙이에 꽨 오리를 무덤 안에 넣었고, 힌두교에서는 죽은자에게 장례식 케이크를 주고, 목욕할 물과, 우유를 놓아둔다고 한다. 스페인 사람들은 기일 빵과 포도주를 무덤에 놓아준다. 또한 러시아의 동방교회에서 거지들을 위한 물고기 파이를 두고, 친구들과 사제들을 위한 우아한 식사를 준비하고, ‘영원한 기억’의 성가를 부른다.

  타일러는 이런 원시 문화가 응고되어 종교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문명을 이루기 전부터 인류 무의식에 뿌리내려져 있던 애니미즘은 불교의 윤회론, 기독교의 사후세계, 유교의 조상숭배로 각 문화권에 정착되었다. 죽음을 사유하는 것은 바로 종교의 역할이지만, 과학이 발전하면서 현대사회에서 무신론자들의 비율은 점점 증가하고 있다. 최근 통계에 의하면 한국 사람들은 사후세계를 믿지 않는다는 비율이 44%였고, 확실하지 않다는 비율은 20%이다. (이수지, “신은 있다?” 61개국 평균 72% 그렇다 한국은?, 뉴시스) 현대 도시에서 종교의 가치는 희석되고, 죽음은 표백되었다. 우리는 죽으면 사라진다고 굳게 믿는다. 이런 세계관에서 인간은 죽음 앞에서 두려움을 느끼며 죽음을 피하고자 엄청나게 노력한다. 죽음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삶을 두려워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영의 동등성과 자연의 위계

  애니미즘의 관점에서 죽음과 삶은 연결되어 있다. 죽은 영은 사라지지 않고 누군가의 몸 또는 물체 안으로 들어간다. 태즈메이니아에서는 사고에서 구출된 것은 죽은 아버지의 영인 수호천사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에스키모들은 사망한 부모의 영혼이 친밀한 귀신 ‘토른가크’ 영이라고 믿는다. 많은 부족은 내가 살아남은 것은 누군가의 영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죽어서 누군가의 ‘수호령’이 된다고 생각하면 죽음은 다르게 경험할 수 있다.

 인간의 죽음뿐만 아니라 동물의 죽음에서도 원시 부족들은 예의를 갖추었다. 다양한 부족은 곰을 사냥한 후에 곰에게 용서를 빌었다. 아이누족은 곰을 죽인 후 사체를 자르기 전에 절을 하면서 예의를 갖추었다. 코리아크족은 곰을 죽이고 가죽을 벗겨 한 사람에게 가죽을 입힌 뒤 자기들이 죽인 게 아니라 러시아인들이 죽였다고 변명한다. 사모예드족 또한 살해된 곰에게 사과한다. 골디족은 곰을 산 채로 잡았을 때 우리 속에서 살찌우면서 ‘형제’ ‘아들’이라고 부르다가 희생물로 잡아먹는다. 자신이 먹고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죽인 곰의 영에게 사죄하는 마음을 갖는다.

  애니미즘에서 만물이 영이 있기 때문에 모든 존재는 동등하다. 하지만, 먹고 살아야 하는 생명 시스템 안에서는 죽은 것을 잡아먹어야 살 수 있다. 먹고 먹히는 자연의 위계는 어떤 존재가 더 높다는 우월함이 아니라 다른 존재로 인해 내가 살아있다는 감사함이다. 그런 감사함을 기억하면 나 또한 언젠가 다른 존재를 위해 내어줘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나르시시즘은 불안하고 위태롭다. 반면에, 애니미즘은 분주하고 활기가 넘친다. 애니미즘에서 나는 고유한 정체성이 아니라 많은 영들이 함께하는 공공재이다. 자의식은 비워지고, 영들에게 나를 내어주면, 활기는 차오른다. 애니미즘은 어떻게 자기를 내려놓을지, 어떻게 영역을 증식할지 안내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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