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니미즘
만물에 깃든 영을 보다
[동화 인류학 에세이] 대나무, 달, 소녀
동화인류학1기 최종 과제(수정) 2024-7-27 김유리
대나무, 달, 소녀
타카하타 이사오 감독의 지브리 애니메이션 《가구야 공주 이야기–공주가 지은 죄와 벌》을 보았다. 동화 인류 연구회에서 같이 세미나를 하고, 타카하타 이사오 감독 주제 전시회를 나중에 따로 봤다. 보고 듣고 고민하는 과정 끝에 정리하고 싶은 것을 이 글에서 적는다. 생각을 여러 번 바꾸었기 때문에 이 글도 잠정적인 해석이 될 것 같다. 가벼운 마음으로 영화를 즐기려고 했는데 어떻게 된 건지 심각해져 버렸다. 가구야 공주 이야기의 본질을 생각하다 보면 삶의 태도에 대한 물음을 만나게 되기 때문이다. 말문이 막혀서 소박하게 쓸 수밖에 없다. 진지한 내용을 그렇지 못한 태도로 대한 죄로 진도가 별로 나가지 못한 벌을 받는 거다.
직선, 동그라미, 얽힘
인문세 특별 세미나 덕분에 읽게 된 팀 잉골드의 ‘선’(line) 시리즈는 세상을 선으로 바라보는 시력으로 우리를 끌어들인다. 가구야 공주 이야기의 주요 소재인 대나무, 달, 소녀의 행보를 선의 관점에서 보면 직선, 동그라미, 얽힘을 그릴 수 있다.
쭉쭉 뻗어 올라가는 대나무의 직선
대나무는 수직적이다. 지상에서 하늘로 곧게 뻗는다. 무당집이나 논에서 하늘 기운을 받으려고 대나무를 꽂아 놓은 장면을 볼 수 있다. 추락과 상승은 수직의 운동이다. 가구야 공주는 금기를 어긴 벌로 하늘에서 추락한 자로 설정된다. 대나무를 통로로 지상에 온 가구야가 만난 첫 사람은 나무꾼이자 공예가인 대나무장이다. 자식 없이 늙은 대나무장이는 가구야를 하늘이 내려주신 선물로 받는다.
때 이른 죽순으로 솟아나서 어린 대나무처럼 무섭게 자라나는 발생과 성장의 선과 함께, 고귀한 귀족 아가씨로 갖추어지는 신분 상승의 선도 수직적이다. 함께 자란 두메산골 아이들이 따르지 못하도록 부, 명예, 인기, 아름다움, 재능의 사다리를 타고 높은 위치에 오른 가구야는 왕의 배필감이 된다. 그런데 상승의 선은 멈출 줄을 모른다. 왕을 지나쳐 천상으로 올라가 버리는 것으로 이야기가 끝나기 때문이다.
돌고 도는 동그라미, 달
가구야 공주의 집은 어디인가? 가구야 공주는 여기저기 집이 많은데, 공식 소속은 달이다. 달은 돌고 돈다. 동그란 달이 동그란 지구 주위를 자전하면서 공전하는 동안 밀물과 썰물이 교대하고 만월과 삭월이 갈마든다. 달이 그리는 선은 닫힌 원이다. 달에서 온 가구야 공주가 지상에서 그리는 동선은 달이 움직이는 궤도를 닮았다. 핵심점에 다가가지 않는 왕복이기에 직선이 아니고 중심점의 둘레를 도는 원운동이다. 산골과 수도를 오가는 그의 행보는 돌아가고, 다시 돌아오기의 반복이다. 짧게는 벚꽃놀이 나갔다가 허무하게 집으로 돌아오는 궤적도 앞의 경우와 같은 원운동이다. 만개한 벚꽃 아래서 가구야 공주는 빙글빙글 돌면서 혼자 춤을 춘다. 이때 어디선가 나타난 아기가 공주를 툭 건드린다. 가구야 공주는 현타 온 사람처럼 멈춰 생각에 빠진다. 도중에 일정을 취소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가구야 공주가 머물러 있는 곳은 회전하는 궤도 위인 것 같다.
원과 나선의 운동은 다르다. 원운동은 닫힌 고리 안에서 영속되는 반복 운동이다. 윤회를 연상시킨다. 한편, 나선 운동은 소용돌이 속으로 주변 사물을 끌어들이면서 어디론가 이동시킨다. 진공을 도는 달의 원운동과 다르게 지상에서의 삶은 돌개바람이나 물의 소용돌이처럼 사물과 관계를 끌어들이고 출발점을 찾을 수도 없고 원상으로 돌아갈 수도 없다. 그래서 가구야 공주가 달로 복귀하려면 지상의 관계를 끊고 기억을 지워야 된다. 어쩌면 달의 거주민들이 금기를 깨고 지상과 맺은 인연 때문에 달은 지구와 더 멀어지지도 못하고 지구의 주변을 영원히 맴도는 자리에 처하게 된 것이 아닐까? 그 덕분에 지상의 사람들은 영원한 순환에 대한 꿈을 꿀 수 있다.
선의 얽힘, 제작과 양육
달세계 선녀님에게 금단의 열매는 무엇일까? 그건 바로 ‘사람의 정을 키우는 것’, 아마도 지상에서 인연을 맺는 것일 것이다. 지상의 삶이 시작되자마자 가구야 공주는 여러 인연에 휘말린다. 팀 잉골드의 표현에 따르면 사회생활은 선의 얽힘이다. 저마다 펼쳐가는 선들이 서로 얽히고 풀리고 하면서 고유한 행로를 이어가는 것이 사회적 삶이다. 그렇게 얽히는 와중에 자기 경로가 바뀌고 속도도 변한다. 선의 행로에서 핵심은 두 가지다. 연속과 변화. 선은 끊어지지 않고 이어진다. 멈춘 듯해 보인다면 그것은 펼쳐갈 에너지가 응축되어 긴장된 상태이다. 선은 반드시 더 나아가고,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얽힘으로 새로워진다.
대나무장이 부부가 가구야 공주를 양육하는 이야기는 제작과 양육 사이의 공통점을 시사한다. 팀 잉골드는 『모든 것은 선을 만든다』에서 제작이란 자연물의 생명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 그 생명의 성장 방식에 새로운 주기를 개시하는 역할을 한다고 본다. 팀 잉골드가 예로 든 카누 제작자는 숲에서 자라던 나무의 삶의 과정을 끝내고 바다의 배라는 또 다른 삶의 방식을 개시한다. 항아리도 마찬가지다. 땅에 속한 물질인 점토가 도공의 ‘어루만지고 달래는 손길’을 통해 항아리로서의 삶을 시작한다. 팀 잉골드는 자연물을 새로운 생활 주기로 진입시키는 제작자에 빗대어 부모의 양육을 설명한다. 인간 부모는 뱃속에서 자라던 아기를 세계 속 새로운 생활로 수월하게 이행하도록 돕는다.
나아가, 소녀가 여자로 성장하는 것은, 팀 잉골드가 인용한 인류학자 빅터 터너의 말대로 ‘존재론적 변환’을 일으키는 것이다. 이러한 변환은 통과의례를 거쳐 일어난다. 가구야 공주는 성인식에 해당하는 명명식과 옷 입기 의식을 마치고, 생존과 소통을 위한 기예들을 전수 받는다. 이것으로 결혼할 짝을 찾아 아이를 낳을 준비를 마친다. 소녀의 시기를 끝내고 성인 여자의 삶의 주기를 여는 문턱을 통과하는 순간이다.
귀족 여성의 난제
헤이안 시대 귀족 여성으로 성장한 가구야 공주는 난제를 안고 있다. “도대체 내가 왜 결혼을 해야 하나?”하는 문제이다. 대체 왜인가? 사실 이 질문은 헤이안 시대 귀족 여성들과 현대의 산업화된 사회를 사는 여성들에게 공통된 난제인지 모른다.
가구야 공주가 결혼하지 않고 심지어 지상의 삶을 중단하는 이유들을 영화에서 찾고 있던 나는 세미나 마지막 날 다시 충격에 빠졌다. 달님은 그 어떤 이유도 이유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가구야 공주가 결혼을 거부하는 것은 낳음을 거부하는 것이다. 낳음을 거절하는 것은 더 이상 살아가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가구야 공주가 왕의 구혼을 거절하며 차라리 죽겠다고 부모 앞에서 말할 때 나는 딸과 부모의 사이에서 곤혹스러운 입장이었다. 양쪽의 입장이 다 이해되면서 내가 입장을 정하지 않고 살아가고 있구나 하고 깨달았다.
낳음을 거부한다는 것은 말 그대로 출산과 양육 행위의 거절이다. 출산과 양육은 왜 하는 건가? 그것은 생명이 왜 지속되어야 하는 건가 묻는 것과 같다. 삶을 이어가는 것에는 앞서 존재하는 목적이 따로 있지 않다. 어떤 목적에 봉사하기 위해서도 아니고 손익을 따져서 조건부로 생명 쪽을 선택하는 것도 아니다.
개념을 더 확장시키자면, 인간이 된다는 것은 인간으로 낳아지는 것이다. 삶의 주기에 따라 다가오는 사물과 사람들과 합류하여 소용돌이 치며 새로이 겪는 사태들이 사람의 삶을 형성한다. 이러한 겪음의 과정에서 그동안 받아온 양육과 교육들이 기억나면서 고유한 길을 열어가는 솜씨로 발휘된다. 겪어보지 못한 일들을 통과해 가보지 못했던 지점에 도달하고 본 적 없는 시야와 예상 못한 능력을 장착하며 한 차례 새로운 인간으로 변모하는 것, 그런 것을 성숙이라고 하며, 가구야 공주가 겪지 못한 바인 성인기에 펼쳐질 차원이다.
시련을 통한 재생, 즉 낳음을 거부하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망각과 무감응의 세계로 진입한다. 불필요하니까 기억력, 결합력, 소통력, 감응력이 모두 쇠퇴한다. 유령처럼 살아가면서 왜 흘리는지도 모른 채 눈물을 흘린다. 달나라는 참 우울한 세상이다.
왜가 아니라 어떻게
이 작품은 타카하타 이사오(1935~2018)의 유작이다. 딸을 키운 아버지이자 애니메이션 디렉터로서 그는 가구야 공주 이야기를 통해 어떤 메시지를 전하는 것일까? 옛이야기 속 결혼하기 싫어하는 아가씨는 이 시대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영화 속에는 많고 많은 신화적 상징이 죽순 껍질처럼 겹겹이 포개져 있다. 등장인물들은 저마다의 시행착오와 자기 한계 속에서 살아간다. 작품 속에서 펼쳐지는 하늘과 바다, 산천초목, 시골과 도시 사람들이 지은 집, 옷, 도구들이 모두 너무 아름답다. 해석할 거리를 많이 담아 놓은 영화다.
가구야가 이별하는 지상의 면면이 얼마나 생생하게 그려져 있는지 모른다. 작품 속에서 작은 존재들의 몸짓과 날씨와 풍광의 변화가 다양한 색감과 필치로 그려지고 있다. 산속 짐승처럼 나무의 주기에 따라 이동하며 살면서, 주어진 도구를 기막히게 사용해서 그릇을 제작하는 사람들, 거지에게 서슴지 않고 밥을 내주지만 경계를 늦추지 않는 오막살이집 아기 엄마, 아가씨를 보필하는 일에 빈틈이 없는 하녀 아이의 마음가짐이 다 전달된다. 나그네가 나무 아래 돌부처에게 손을 모아 기도 하는 장면은 몇 초 안 되지만 감흥을 준다. 힌트를 얻고 싶어서 찾아본 동영상에서 타카하타 이사오 팀이 공을 들이는 장면의 사례는 정말 의외였다. 그들은 칼로 참외를 자르는 장면을 리얼하게 만들기 위해서 진지하게 논의하고 실험하고 있었다! 참외에 칼 들어가는 장면이 두부 썰 듯하지 않아야 한다며 시간을 들여 상의하고 이렇게저렿게 시도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들이 일을 대하는 이런 태도가 작품에 반영되어 전달이 된다. 그 연장선으로 이 작품은 삶 자체를 어떤 태도로 대할 것인가 되묻는다. 삶에서 정말로 문제가 되는 것은 ‘어떻게’이지 ‘왜’가 아닌 것이다.
작품 의도
작품이 담은 메시지는 주인공의 말과 행동을 둘러싼 세상, 그리고 작품을 제작하는 태도와 손길을 통해 우리에게 전달된다. 가구야 공주는 기억을 잃기 직전 짧은 해방의 비행을 감행한다. 결혼을 거부하며 날고 뛰는 이 맹랑한 아가씨를 하늘과 땅이 감싸 안는다. 가구야 공주는 햇빛, 창공, 비를 감촉하고 땅 위에 인간과 자연이 이루어낸 풍광에 접촉하며 바다 속에 풍덩 몸을 담근다. 파노라마처럼 그려지는 이 모든 장면들을 고증하고 손 작업으로 하나하나 그려낸 작가 팀이 있다. 가구야 공주가 인식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그의 지상에서의 삶은, 요새 유행하는 밈에서 말하듯이 하늘에서 코코넛처럼 뚝 떨어진 것이 아니다. 겹겹이 둘러싸고 이어진 작품 안팎의 모든 맥락 안에서 그가 움직일 수 있는 것이다.
작품의 의도는 분명해진다. 자기 한 몸을 넘어서는 시야를 확보하라. 삶의 소중함을 느껴보라. 온갖 상상력을 동원해 지금의 어둠을 뚫고 나가라. 세상을 만나라. 겪을 가치가 있어서 겪는 것이 아니라, 네가 겪음으로써 세상에 가치를 낳는 거란다.
결혼을 거부한 귀족 아가씨로 지상에서 보낸 하늘나라 선녀님의 짧은 생은 이렇게 끝난다. 가구야 공주는, 웃지도 달리지도 않는 것은 인간이 아니라고 부르짖고 슬픔과 아픔도 결코 더러운 것이 아니라고 외친다. 마치 반항하는 사춘기 소녀처럼. 직접 겪고 발견한 그 가치들을 열쇠로 더 이상의 낳음과 겪음을 풀어가지 못한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끝)
세상살이의 기예는 깔끔함이 아니라 ‘낳음과 겪음’에서 나오는 것이네요.
시작하지 않으면 겪지 않으니, 이 꼴 저 꼴 안보겠지만, 낳을 수도 없는 것 같습니다.
‘왜’대신 ‘어떻게’ 살 것인지.
참외를 칼로 썰 때 두부 써는 것처럼 보이지 않기 위해 상의하는 ‘태도’도 생각해봅니다.
‘설마 그렇게 자세히 보는 사람 있겠어, 중요한 장면도 아닌데, 그걸 하는 시간에 다른 데 집중해야지’라는 식의 생각을 자주 하는데요.
‘중요한 것, 다른 데’에 대한 생각도 묻게 되는 후기입니다.
동화 인류학팀은 잘되는 집이네요. 덕분에 독자로서 저도 즐겁습니다.
샘,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