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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붓다佛陀  

[유쾌한 불교] 메시아와 기식자

작성자
5dalnim
작성일
2025-02-22 09:57
조회
29

토요 아침 낭송_유쾌한 불교_250221


 

메시아와 기식자

 


붓다 :

# “붓다는 깨달은 사람입니다. 이미 거기에 인간의 이상 상태가 실현되었다는 사건입니다. 그래서 붓다가 구원입니다.

그것은 누구에게 있어서일까요? 붓다 본인에게는 구원이 됩니다. 붓다 이외의 사람에게 있어서는 아직 자신은 붓다가 아니기 때문에 구원이 될 수 없습니다. 다음은 자신의 차례이고, 다음에는 자신이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좋은 메시지일 수도 있어요.”[41]

 


종교의 정의 : 인간에게는 누군가에게 간절히 빌고 의지하지 않으면 안 되는 순간이 있다. 그 최종적인 의지, 발원의 순간이란 죽음이며 곧 내 존재의 의미에 대한 질문과 관련되어 있다. 여기에 대해 깨달음이라고 답하는 것이 종교다. 무엇을 깨달을 것인가? 그에 대해 존재함의 모든 의미를 쥐고 있는 을 답으로 가져가는 종교(일신교)가 있고, 그 자신을 가져가는 종교(불교)가 있다고 할 수 있다.

 

# “즉 간단히 말하자면 예언자는 인간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인간을 구원하는 것은 God이니까요. 붓다는 인간을 구원하지 않습니다. 본인을 구원하고 있지만, 타인을 구원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인간을 구원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라는 것이 불교의 사고방식이죠.

[오사와] 그렇군요. 아주 명쾌한 해석이네요. 예언자는 아무도 구원하지 않고, 붓다는 자기 자신만을 구하고, 그리고 신은 타인(인간) 모두를 구원하는 거군요. 그리스도는 타인을 구원하고 있기 때문에, 특히 인간의 원죄를 대속해 주고 있기 때문에 신이 되는 거죠.”[41]

 


나우시카는 예언자인가 구원가인가?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미야자키 하야오, 만화판) : 만화판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에는 끊임없이 고뇌하는 나우시카가 나온다. 영화판에서와 달리 나우시카는 오무를 구하는 일에도 거신병을 돕는 일에도 인류의 생존과 같은 거대한 대의를 들이밀지 않는다. 오직 즉각적으로 도울 수 있는 구체적 존재 하나하나에 대한 애정만을 발휘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자신도 예외일 수 없는 우주적 업보의 사실을 알고 고뇌한다. 타인을 구조한다는 생각도 그 자신을 구원한다는 생각도 없다. 다만 고통받는 누군가 앞에 몸을 움직이지 않을 수 없다. 나우시카는 그렇게 돕고 그렇게 고뇌하며 생멸에 대한 이치, 자연의 거대한 인과에 대해 깨달아간다.

그런데 이런 나우시카 주위로 신도들이 모이고, 자신들을 도와달라며 외치는 무리가 생긴다. 그들에게 나우시카는 메시아다. 젖과 꿀이 흐르는 지복의 땅으로 직접 데리고 가 줄 예언자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깨달음의 자기 구원의 길을 걷는 나우시카와 구원의 대리자를 찾는 신도들 사이의 긴장을 곳곳에서 제시한다. 하지만 작품의 대단원에서 나우시카는 여전히 작고 작은 존재들을 돕는 자로서만 살아간다고 한다. 나는 오늘 아침 낭송에서 깨달으려는 자 주위로 몰려드는 맹신자들의 드라마를 생각했다.

 

안티 기독교와의 비교 : 안티 흰두교라는 점/ 그리고 불교의 발상지 인도에서 불교는 왜 쇠퇴했는가? [53의 중요성] : 불교는 철저하게 합리적인 자기 깨달음을 강조하므로 세계 변혁과 같은 역사적 차원이 구원의 본질적 문제로 들어오지 않는다. 게다가 불교는 국가의 외부라 할 수 있는 출가자들의 공동체(상가)를 만들었는데, 이 상가는 비즈니스 즉 생계 활동을 금한다는 규칙을 만들었다. 먹고 사는 문제 전부를 외부에 깊이 의존하도록 했기에 불교도들은 기본적으로 기식자(寄食者)가 된다. 그래서 불교는 힌두교의 카스트 사회를 어떤 의미에서는 통째로 긍정”[58]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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