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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채식주의자 후기] 먹히는 자에서 먹는 자로

작성자
진진
작성일
2024-12-01 15:11
조회
57

<동화인류학으로 채식주의자 읽기> 후기 / 2024.12.1. / 진진

 

먹히는 자에서 먹는 자로

 

한강의 채식주의자는 채식주의자, 몽고반점, 나무불꽃으로 구성이 되어 있습니다. 세 작품은 화자와 시점(時點)이 다르지만 이어지는 하나의 이야기로, 채식을 고집하다 결국에는 곡기까지 끊어버리는 영혜를 중심으로 그려집니다. 인문세에서 진행된 채식주의자 특강에서는 이 작품들을 동화인류학적 관점으로 해석해보는 시간을 가졌는데요. 두 시간 반 동안 동화인류학자 오선민 선생님이 들려주신 이야기는 너무나도 풍성해 그 많은 이야기를 어떻게 담을 수 있을까 시작도 전에 아득해집니다. 저는 그중에서도 인물을 중심으로 세미나를 정리해보려고 합니다.

이야기는 영혜의 고기를 먹지 않겠어로부터 시작됩니다. 영혜는 각 이야기에서 채식을 고집하고, 어느 정도 먹기도 했다가, 마지막에는 물만 먹고 나무가 되겠다고 하며 죽음으로까지 치닫습니다. 오선민 선생님은 이런 모습이 우리 시대의 절식이고 금식이며, 가부장제나 사회제약으로부터 자기 신체에 대한 통제권을 가지기 위한 행동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동화에서는 어떨까요. 동화에서 이런 자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먹는 자와 먹히는 자만이 있을 뿐이지요. 또한 동화에서 먹는 자는 주는 대로 먹어야 합니다. 먹고 싶은 것을 먹고 먹기 싫은 것은 안 먹고 할 수가 없습니다. 이를 염두에 두면서 세 작품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채식주의자

어릴 적 자신을 물었던 개를 가혹하게 죽였던 죄의식이 어느 날 영혜에게 꿈의 환영으로 떠오릅니다. 개는 아버지의 오토바이에 매달려 동네를 여러 바퀴 내달리다 피를 토하며 죽어갔고, 동네는 그 개로 잔치를 벌이고 영혜 또한 아무렇지 않게 한 그릇을 해치웠습니다. 영혜는 이 죄책감에 붙들려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채식을 선언합니다. 자기만 안 먹는 데서 끝나지 않고, 그녀는 냉장고에 있는 고기를 모두 내다버리기까지 합니다. 오선민 선생님은 내가 원하지 않는 것, 내가 아닌 것은 다 갖다버리려고 하는 자기 중심적인 사고가 문명의 모습이라고 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영혜는 자기 집중력이 강하고 자기 욕심으로 가득한 문명의 얼굴이라고도 했습니다. 죄책감이라고는 하지만 자기 집착이라고 볼 수 있다고 말이지요.

영혜는 자신이 원하는 것에 집착하고 자신에게 맞지 않는 것을 거부하고 뱉어내는 식으로 행동합니다. 이는 그녀의 토플리스에서도 볼 수 있다고 합니다. 그녀는 결혼 전부터 브래지어를 싫어해 후크를 풀고 다니거나 브래지어를 하지 않습니다. 신체에 대한 사회제약에 갑갑함을 느껴 그것을 벗어버리려고 합니다. 개에게 가해를 했다는 자기 죄의식으로 채식을 고집하는 그녀는 상의를 벗은 채로 감자를 쌓아놓고 깎고, 엄마가 준 흑염소를 모두 게워냅니다. 이렇게 자기를 몰아세워 다다른 모습이 이상합니다. 아무 것도 해칠 수 없어 좋아했다던 그녀의 젖가슴은 점점 야위어만 갑니다. 뭘 찌르려고 이렇게 날카로워지는지 모르겠다던 그녀는 결국 남자인지 여자인지도 모르는 몸이 되어 동박새를 뜯어먹고 맙니다.

 

몽고반점

예술가인 영혜의 형부는 어느 날 떠오른 예술적 이미지를 현실화시키는 데 골몰해 있습니다. 그 영감은 남녀의 교합을 이미지로 하고 있으며, 자신의 성적 쾌락과도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여자의 몸은 몽고반점이 있는 처제의 몸이어야 했고, 그는 결국 영혜를 이용해 자신의 이미지를 확인합니다. 오선민 선생님은 자신이 고집하는 것을 강박적으로 붙들려고 한다는 점에서 형부가 영혜와 같다고 했습니다. 둘은 자기 이미지를 현실화시는 데 집착하고, 이를 위해 아이는 뒷전이라는 점에서 같다고 말이지요. 영혜는 조카가 보는 앞에서 자살을 시도하고 형부는 자는 아이를 혼자 두고 집을 나갑니다. 둘 다 주위를, 자기를 둘러싼 관계를 보지 않고 자기에게만 집중합니다. 비슷한 자와 반대되는 자 찾기 같은 오선민 선생님의 캐릭터 해석은 이전에도 그랬듯이 저한테는 소설을 함께 읽을 때의 색다른 묘미입니다.

먹는 이야기로 돌아가, 오선민 선생님은 이 이야기에서 영혜가 먹는 모습이 세 번 나온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아니, 적어도 저는 오잉? 어디? 하며 의아했지만요. 영혜가 형부와 아이스크림을 먹는 장면, 사찰음식을 먹는 장면, 형부를 먹는 장면이 그것입니다. 그렇게 안 먹었던 그녀를 생각하면 영혜는 이 이야기에서 과식하고 편식(자기 같은 형부를 만나서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먹고 자기와 비슷한 것형부을 먹는다는 점에서)하며 배고픔을 충족시키고 있다고 했습니다. 저는 이 해석이 흥미롭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를 기준으로 별로 안 먹는다고만 생각했는데, 영혜는 이야기의 맥락에서 분명히 폭식과 과식을 하고 있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책을 읽으며 하얀 아이스크림에는 우유가 들어갈 텐데, 육식이 아닌가 라고도 생각했습니다.)

 

나무불꽃

마지막 이야기의 화자는 영혜의 언니, 인혜입니다. 오선민 선생님은 동화인류학적 관점에서 이 책의 주인공은 인혜라고 해석했습니다. 띠용~ 인혜가 주인공이라니요. 세미나 전에 이 결론을 스포당한 저는 사실 처음 이 이야기에 동의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마 이 글을 읽는 여러분도 그러지 않을까 싶은데요. 세미나를 마치고는 완전 설득되고 말았습니다. 이 흥미진진한 해석을 끝까지 읽어봐 주세요. 인혜는 앞의 이야기들에서 남의 이해에 자신을 맞추는 존재라는 점에서 줄곧 먹히는 자였습니다. 선생님은 그랬던 그녀가 여기에서는 왜 그랬을까 과거를 이해하고, 이랬다면 달라졌을까 미래를 전망하는 노력 속에서 먹는 자가 된다고 했습니다. 후진하는 질문을 통해 먹히는 자가 먹는 방식으로 자신의 삶과 동생의 삶을 해석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영혜와 인혜는 같은 문제를 다른 방식으로 푼다는 점에서 도플갱어라고도 했습니다. 하지만, 영혜는 뱉는 방식으로, 인혜는 먹는 방식으로 자신의 문제를 풉니다. 인혜도 자살을 기도하려 했던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아이 때문에 그녀는 자신의 과속에 제동을 걸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기를 보고 있는, 자기가 웃기를 바라는 아이를 돌아보는 순간 그녀는 지금 여기, 시간이 흐르는 현실로 돌아옵니다. 동화에서도 그렇다고 합니다. 피해자도 가해자도 모두 그런 자기 조건에서 시작한다고 합니다. 자신이 입은 해나 자신이 가한 해에 빠져서 한 자리를 맴돌며, 그곳이나 그곳이 아닌 곳을 고집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풀지 않는다고요. 인혜는 동화의 주인공처럼 자신이 품은 조건 안에서 문제를 풀어갑니다. 가족 모두가 버린 동생을 보살피고 자신의 아이 지우의 미래를 생각하면서요.

 

저를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채식주의자를 읽으며 영혜에 몰입했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왜 이렇게 영혜에게 연민을 느꼈을까요? 그녀가 이야기의 표면상 주인공이기에 그랬기도 하겠지만, 오선민 선생님은 시대적으로 우리의 일반적 포지션이 피해자라고 했습니다. 힘을 받는 것에 대한 강한 부하감이 있다고요. 그래서인지 저는 책을 읽으며 모든 등장인물들이 안쓰러웠습니다. 모두가 뭔가에 짓눌린 듯한 느낌을 받았는데, 이게 피해자의 자리에서 나를 바라보는 관점에서 비롯됐다는 점이 세미나에서 저의 머리를 세게 쳤습니다. 인혜는 자신이 토하는 장면에서 거울을 보며 스스로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바보같이저는 그녀의 이 말이 우리에게, 영혜에게 하는 말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슬퍼라. 이렇게 제 자리값을 알고도 연민이 밀려오니, 피해자의 자리에서 벗어나 우리 모두를 보기 참 어렵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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