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채식주의자] 숲과 나무, 차가운 물기, 젖는다
『채식주의자』에 나오는 나무와 숲의 의미를 찾아보고 나무 불꽃을 해석해보려고 한다. 더불어 물, 비, 젖는다, 차가운 물기의 의미도 찾아본다.
1. 인혜가 정신병원을 찾아간 날
○ 늦은 6월 비가 온다.
늦은 유월의 숲이 도로변으로 펼쳐진다. 폭우에 잠긴 숲은 포효를 참는 거대한 짐승 같다. 축성산으로 접어들면서 도로는 차츰 좁고 구불구불해진다. 그럴수록 숲은 더 가까이 다가와 젖은 몸을 넘실거린다. 영혜가 발견되었다던 숲이 저 산기슭 어디쯤이었을까. 빗발 속에 흔들리는 나무들 하나하나를, 그 아래 숨겨져 있을 캄캄한 공간들.
○ 빗속의 병사들은 고적하다. 짙은 회색의 콘크리트 벽면은 비에 젖은 탓에 평소보다 어둡고 육중해 보인다.
○ 병원 안뜰의 느티나무를 내다본다. 수령이 사백 년은 되어 보이는 고목이다. 맑은 날에 수많은 가지들을 펼치고 햇빛을 반사하던 저 나무는 그녀에게 무엇인가를 말하는 것 같았는데, 비에 젖은 오늘은 할 말을 안으로 감춘 과묵한 사람 같다. 늙은 밑둥의 껍질은 흠뻑 젖어 저녁처럼 어둡고, 잔가지의 잎사귀들은 말없이 떨며 비를 받아들이고 있다. 그 형상 위로 귀신처럼 겹쳐지는 영혜의 모습을 그녀는 조용히 쏘아본다. 여전히 침묵하는 나무가 시야에 가득 찬다. 영혜의 목소리, 검은 비, 눈에서 선혈이 흐르는 자신의 얼굴.
○ 비는 아무래도 그친 것 같다. 그러나 여전히 하늘은 흐리고, 젖은 나무들은 침묵하고 있다. 그 비탈의 거대한 숲도 침묵하고 있다.
○ 조금씩 하늘의 짙은 회색이 엷어지며 사위가 환해지고 있다. 축성산의 여름 숲도 제 빛을 찾으며 살아나기 시작한다. 그날 밤 영혜가 발견된 곳은 저 비탈 어디쯤이었을 것이다.
○ 울창한 여름 숲이 펼쳐진다. 오후의 기우는 햇빛 아래, 비에 젖었던 모든 나뭇잎들이 다시 태어난 듯 맹렬히 반짝이고 있다.
○ 활활 타오르는 도로변의 나무들은, 무수한 짐승들처럼 몸을 일으켜 일렁이는 초록빛의 불꽃들을 쏘아본다. 대답을 기다리듯, 아니, 무언인가에 항의하듯 그녀의 눈길은 어둡고 끈질기다.
2. 숲으로 간 영혜
○ 산책을 나갔다가 영혜는 병원으로 돌아오지 않음. 늦은 오후에 비가 오기 시작.
깊은 산비탈의 외딴 자리에서 영혜는 마치 비에 젖은 나무들 중 한그루인 듯 미동도 하지 않고 서 있었다고 한다. 숲에 다녀온 후 영혜의 식사 거부
○ (인혜의 꿈) 그녀는 혼령처럼 어른거리는 빗속의 숲을 보았다. 검은 비, 검은 숲, 흠뻑 젖은, 희끄무레한 환자복, 젖은 머리칼, 캄캄한 산비탈, 귀신처럼 우뚝 선, 어둠과 물의 덩어리가 되어버린 영혜.
○ 영혜를 이 병원에 처음 데려오던 날–초겨울의 청명한 오후
창문 밖 느티나무를 발견한 영혜, 세상의 나무들은 모두 형제 같다.
○ 부르는 소리가 들려서 간 것뿐이야. 비에 녹아서 전부 다 녹아서 땅속으로 들어가려던 참이었어. 다시 거꾸로 돋아나려면, 그렇게 할 수밖에 없거든.
○ 내가 물구나무서 있는데, 내 몸에 잎사귀가 자라고, 내 손에서 뿌리가 돋아서. 땅 속으로 파고들었어. 끝없이, 끝없이. 사타구니에서 꽃이 피어나려고 해서 다리를 벌렸는데.
○ (숲으로 사라지기 직전) 나무들은 똑바로 서 있는 것이 아니다. 모두 두 팔로 땅을 받치고 있는 것. 몸에 물을 맞아야 한다. 물이 필요하다.
3. 인혜의 나무
○ 시간은 가혹할 만큼 공정한 물결이어서
○ 그 성실의 관성으로 그녀는 시간과 함께 모든 것을 극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지난 삼월 영혜가 갑자기 사라지지 않았다면, 비 내리는 밤의 숲에서 발견되지 않았다면.
○ 온몸의 습기가 바싹 말라버린 것 같다고 그녀는 느꼈다. 건조된 육신
검푸른 어둠 때문에 뒷산은 평소보다 깊게 느껴졌다. 자신을 집어삼키는 구멍 같은 고통을, 격렬한 두려움을, 거기 동시에 베어든 이상한 평화를 그녀는 느꼈다.
○ 빈 욕조에 누워 눈을 감으면 캄캄한 숲이 덮쳐온다. 검은 빗발이 영혜의 몸에 창처럼 꽂히고, 깡마른 맨발이 진흙에 덮인다. 그 모습을 지우려고 고개를 흔들면, 어째서인지 한낮의 여름 나무들이 마치 초록빛의 커다란 불꽃들처럼 그녀의 눈앞에 어른거린다. 살아오는 동안 보았던 무수한 나무들, 무정한 바다처럼 세상을 뒤덮은 숲들의 물결이 그녀의 지친 몸을 휩싸며 타오른다. 도시들과 소읍들과 도로는 크고작은 섬과 다리들처럼 그 위로 떠올라 있을 뿐, 그 뜨거운 물결에 밀려 어디론가 서서히 떠내려가고 있을 뿐이다. 그것들의 물결이 대체 무엇을 말하는지. 그 새벽 좁다란 산길의 끝에서 그녀가 보았던, 박명 속에서 일제히 푸른 불길처럼 일어서던 나무들은 또 무슨 말을 하고 있었는지.
따뜻한 말과 위안 아님. 오히려 무자비한, 무서울 만큼 서늘한 생명의 말이었다. 어디를 둘러보아도 그녀는 자신의 목숨을 받아줄 나무를 찾아낼 수 없었다. 어떤 나무도 그녀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마치 살아 있는 거대한 짐승들처럼, 완강하고 삼엄하게 온몸을 버티고 서 있을 뿐이었다.
하늘에서 빛이 내려와, 땅에서 솟아나온 물은 거꾸로 헤엄쳐 올라와.
○ 고개를 들자, 거울에 비친 그녀의 얼굴이 물에 젖어 있다. 피를 흘리고 있던 눈. 그러나 지금 그 여자의 얼굴을 울고 있지 않다.
○ 박명 속으로 일어서는 뒷산의 나무들에게서, 바랜 보라색 티셔츠 차림의 그녀가 뒷걸음질쳐 내려왔던 그 아침이었다.
○ 그날 새벽 걸어 내려오던 산길. 샌들을 적신 이슬이 맨발에 차갑게 스몄었다. 그녀는 눈물 따위 흘리지 않았다.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너덜너덜한 몸뚱이를 적시는, 바싹 마른 혈관으로 퍼지는 그 차가운 물기가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 결코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모든 것이 다만 그녀의 몸속으로, 뼛속까지 스며들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