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채식주의자 2] 시간의 운동성
시간의 운동성
한강 『채식주의자』의 마지막 책장을 덮고, 마음속에서 ‘오래 살고 싶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생각은 올해 동화 인류학을 공부하면서 문득문득 올라왔었다. 동화 인류학을 공부하기 전에는 ‘잘’ 살고 싶다는 소망이었는데 이제는 ‘오래’ 살아야겠다는 결심으로 변했다. 이런 마음의 변화를 『채식주의자』의 주인공 영혜와 언니 인혜를 보면서 확인할 수 있었다. 『채식주의자』는 영혜가 냉장고에서 모든 고기를 꺼내고, 육식을 거부하면서 이야기가 전개된다. 이야기는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화자는 영혜가 아니다. 1부의 화자는 영혜의 남편, 2부의 화자는 영혜의 형부, 3분의 화자는 영혜의 언니 인혜이다. 3부에서는 다른 방향으로 영혜와 인혜의 시간이 치열하게 움직인다. 그 둘의 시간은 서로를 끌어당기고, 밀어내고 있고, 여러 관계는 여전히 뒤얽혀 있다.
저항하는 영혜
영혜는 꿈을 통해 뒤엉킨 관계들을 일찍 깨달았다. 그동안 자신은 가부장제 폭력의 피해자로만 생각했지만, 자신이 육식을 통해 엄청난 폭력의 가해자라는 충격이었다. “너무 많은 고기를 먹었어. 그 목숨이 고스란히 그 자리에 걸려 있는 거야. … 목숨들만은 끈질기게 명치에 달라붙어 있는 거야” (한강,『채식주의자』, 창비, 72쪽) 영혜는 채식, 예술, 단식을 통해 그 엉킨 관계를 풀어내려고 했다. 하지만, 되돌아오는 건 주변 가족들의 또 다른 폭력이었고, 또한 자기 행동으로 누군가에게 고통을 주었다.
3부에서 영혜는 시간을 거꾸로 돌리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정신병원에 들어간 영혜는 모든 음식을 거부했고 그녀의 몸은 삼십 킬로그램도 안 나갔고, 생리도 멎었다. 영혜는 “이차성징이 사라진 기이한 여자아이의 모습” (같은 책, 220쪽)이었다. 병원 중간에서 그녀는 물구나무서기를 하고 있었고, 나무들의 팔을 뻗고 서 있는 모습이라고 설명했다. 이제 자신은 동물이 아니고, 나무로서 물과 햇빛만 필요하다고 말한다. 아이, 꽃, 나무는 영혜가 생각하는 순수하고 아름다운 모습이다. 그것들은 폭력적이지 않다. 영혜는 자신이 믿는 순수함으로 흘러가는 시간에 저항하고 있다.
질문하는 인혜
인혜에게 주어진 시간은 단 30분이다. 30분 안에 영혜를 설득시켜 튜브로 미음을 주입해 영혜를 살려야 했다. 물구나무를 서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인 영혜와는 다르게 인혜에게 밥벌이, 육아, 돌봄 등등 주어진 일이 아주 많다. 그러므로 시간은 언제나 부족했고 정신없이 살아갔다. 인혜는 주어진 역할에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아갔지만, 한 번도 질문을 던지지 않았다. 질문을 던지지 않았다는 건 인혜의 시간은 언제나 앞으로만 향했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인혜는 영혜의 아이 같은 몸 앞에서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 ‘막을 수 없었을까.’ ‘모든 것은 달라졌을까.’ 30분 동안 영혜에 의해 잠깐잠깐 시간은 되돌아간다. 영혜의 어린 시절, 결혼의 순간, 아이와의 대화를 되돌려본다. 인혜는 영혜가 잡아당기는 시간 속에서 뒤엉킨 관계를 뒤늦게 깨닫는다. 남편의 예술, 영혜의 두려움, 자신의 무책임함 등등… 이해할 수 없다고 덮어두었던 일에 끊임없이 질문을 던진다.
나무의 진실성
영혜는 시간에 저항했고 인혜는 시간에 끌려갔지만, 시간은 절대 멈추지 않는다. 인혜는 지우를 키우며 이 사실을 가슴 깊이 깨닫고 있었다. 영혜의 생사가 결정된 30분이라는 짧은 시간에 인혜는 옆집 여자에게 전화를 지우가 맡겨야 하는 전화를 걸어야 했다. 아이는 자라고, 시간은 흐른다. 영혜는 순수함과 아름다움이라고 생각한 나무와 아이에서 인혜는 서늘함과 잔인함을 본다. 인혜는 나무들을 바라보며 “마치 살아있는 거대한 짐승들처럼, 완강하고 삼엄하게 온몸을 버티고 서있을 뿐이었다.” (같은 책, 248쪽) 라고 말한다. 인혜가 바라본 나무는 바로 영혜가 거부한 짐승이었다.
영혜는 나무가 되고자 했지만, 뿌리가 없다. 꿈속에서 자신이 물구나무를 서 있으니, 손에서 뿌리가 나왔다고 말했지만, 실제로는 뿌리가 없다. 그리고 그녀가 원하는 오직 물과 햇빛이다. 하지만, 땅에는 엄청나게 많은 미생물, 곤충, 동물의 목숨들이 깔려있고, 그것들이 썩어 나무의 뿌리로 영양분이 된다. 인혜가 보았던 것처럼 자연의 순환에 따라 나무 또한 하나의 거대한 짐승이다. 인혜는 얽혀있는 관계를 늦게 깨달았지만, 영혜보다 더욱 깊게 삶과 자연을 바라보았다.
기억하는 마음
이전에 ‘잘 살고 싶다’라는 나의 소망은 어딘가에도 어떤 폭력과 고통에도 얽히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컸다. 영혜가 원하는 순수함과 아름다움, 그리고 인혜의 책임감과 닮아있다. 이제 오래 살고 싶다. 아니 오래 살아야만 한다. 동화 인류학을 통해 내가 누군가의 목숨을 먹으며 내 목숨이 유지되고 있고, 나 또한 누군가의 거름과 먹이가 될 수 있는 것을 깨달았다. 어떤 폭력, 고통, 순수함, 아름다움까지도 모두 나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기억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