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반 일리치 Ivan Dominic Illich
공생의 삶을 생각하다
[학교 없는 사회] 희망과 기대의 차이
이반 일리치 『학교 없는 사회』 7장 2024-7-11 김유리
판도라의 항아리
이반 일리치는 현대인의 역사가 ‘희망’(hope)이 사라지고 ‘기대’(expectation)만 증폭되어온 과정이라고 주장한다. 일리치의 희망과 기대 개념을 살펴보자.
잘 알려진 신화에 따르면, 판도라가 호기심인지 부주의인지 알 수 없는 이유로 열어서는 안 될 상자 뚜껑을 열어 세상에 재앙이 풀려나왔다.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희망이 달아나기 전에 뚜껑을 닫았는데, 그렇다면 희망이 우리에게 남겨졌다는 것인지 아니면 상자 속에 갇혔다는 것인지 모호하다. 이후로 인간의 삶은 위태로워졌고 그 책임은 판도라에게 있는 것 같다. 프로메테우스는 판도라와 자기 동생이 인연을 맺기를 원치 않은 신인데, 판도라가 초래한 위험으로부터 인간을 보호할 인공물들을 제작하도록 도운 ‘기술의 신’이다. 프로메테우스는 신들로부터 불을 훔쳐다가 인간에게 쇠를 만드는 기술을 전수했다. 법, 도시, 예술품, 교육, 군대 등 인간이 만든 문명의 제도들은 세상의 악을 통제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었다.
유사 이전 고대로부터 연원한 판도라는 모든 것(pan-, all)을 주는(dora, giver) 대지의 여신이다. 원시의 환경 속에서 사람들은 자연의 은혜와 신의 은총과 부족의 본능에 의존해서 삶을 꾸려갔다. 이들은 판도라가 인간에게 모든 것을 선물한 대지이자 ‘희망의 수호자’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고전기 그리스인들이 각색한 판도라의 신화는 재앙의 원인으로 그녀를 기억했다. 문명의 모든 제도들은 인간과 자연의 유한성으로 인한 운명과 필연성에 도전하며 구축해간 인공 세계의 틀이었다. 항구하고 보편적인 법으로 통치되는 도시 국가 안에서 인간도 시민이라는 제작물로 개조되어야 했다.
일리치는 희망이란 말을 ‘적극적으로’ ‘자연의 선함을 믿는다’는 뜻으로 사용하고, 기대를 ‘인간의 계획과 통제에서 나온 결과에 의존한다’는 의미로 쓴다. 희망이란, 바라마지 않는 것을 선물로 들고 올지 모를 사람을 기다리며 꿈꾸는 것이다. 기대란, 시민의 권리로 요구할 수 있는 생산물을 통해 얻게 될 만족을 예상하는 것이다. 기대는 프로메테우스적이고 목적론적인 것으로서, 희망이라는 ‘사회적 힘’을 무력하게 만든다.
그런데 프로메테우스가 본인이 전수한 기술로 제작된 쇠사슬에 결박당하는 아이러니는 현재 제도들의 ‘역기능’을 상징적으로 표현한다. 현대 제도들은 점점 더 애초의 목표를 배반하면서 비인간적인 것이 되어가는 모순에 빠져 있다. 이 제도들은 기대된 것 이외의 것을 희망하는 인간 능력을 퇴화시킨다. 제도가 생산할 수 있는 것만을 기대하도록 교육 받는 아이들만 올바른 시민이자 소비자로 인정되며, 인간은 제도에 의존한다. 제도가 시행하는 과정들이 사람이 가진 선의를 대체하는 상황에 이르면, 인간성은 상자 같은 관에 유폐되고 만다. 비인간적 힘에 의해 운명이 결정되는 원시의 상황이 되살아나는 것만 같다.
일리치는 불과 기술의 신 프로메테우스의 극단적인 형태를 현대인에게서 본다. 현대사회의 인간은 자기가 제작한 도구로 생산한 가치를 태워 없애는 ‘용광로’로 정의된다. 또한 경쟁적으로 자원을 소비하는 거대한 제도들에 묶인 채 이 세계가 없어질 때까지 세계를 제도의 과정 속으로 투입하는 도구로 변해 있다. 소각 도구가 되어 소비자로서 살아간다는 현실은 아무것에도 만족하지 못하는 탄탈로스의 저주 상태나 지옥 그 자체에 비견될 만하다. 프로메테우스적 인간상은 자연과 사람에게 의탁하는 대신 인간이 제작한 제도에 의존한 상태로 자연과 인간으로부터 멀어져있다. 원하는 ‘가치’를, 직접 미리 계획한 ‘과정’이 가져다 줄 거라는 기대는 ‘프로메테우스적 오류’다.
그렇다면 우리가 꿈꿀 희망은 어디에 있는가? 일리치는 프로메테우스의 아우인 에피메테우스에게서 답을 찾고자 한다. ‘먼저 생각하는’ 프로메테우스와 달리 ‘나중에 생각하는’ 에피메테우스는, ‘과학의 황금시대’의 종말에 새롭게 부상하는 인간상이다. 에피메테우스는 형 프로메테우스의 만류에도 판도라와 결혼한다. 사실, 뒤늦게 눈을 뜬 프로메테우스가 바로 에피메테우스인지도 모른다. 프로메테우스적 현대인은 상자 같은 우주선을 만들어 타고 지구를 벗어나서야 비로소 푸른 지구가 가진 유한성에 대해 새로운 감각을 갖게 된다. 희망은 오히려 그 유한성 안에 있다. 여기서 판도라의 각색된 신화는 원본 신화로 돌아간다. 판도라의 상자는 알려진 것과 달리 본래 모든 것을 주는 항아리(암포라, 퓌토스, 뚜껑 달린 항아리로 두 개의 손잡이가 달림)다. 이 항아리는 신에게서 받은 선물(소명)이고 선의의 인간들이 서로 만나는 방주인 것이다. 항아리를 가진 판도라는 그녀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서로 친구로 연결되는 장소인 지구 자체다.
일리치는 기대보다 희망에 가치를 두는 사람들에게 붙일 이름으로 에피메테우스를 떠올린다. 이들은 상품보다는 사람을 더 사랑하는 사람들이라고 덧붙인다. 이 사람들은 ‘다수의 신화’를 경계하며 의혹을 나누려 하는 자들이다. 그리고 이들이 새 땅에 만들 제도는 사람됨과 자연이 균형을 이루는 ‘정주’의 ‘양식’이 될 것이다. 이런 제도를 만들어가는 것은 사람이 가진 에피메테우스적 능력, 즉 ‘배려, 돌봄, 기다리는 능력을 향상’시키는 희망에 찬 협업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