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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일리치 Ivan Dominic Illich

공생의 삶을 생각하다

 

[학교 없는 사회] 세미나 후기

작성자
coolyule
작성일
2024-07-14 13:58
조회
213

이반 일리치 『학교 없는 사회』 7장 후기 2024-7-14 김유리

 

 

  이반 일리치의 『학교 없는 사회』 마지막 세미나 후기를 쓴다. 그동안 과제 하고 세미나 내용 따라가기에 급급했다. 시작할 땐 참석하는 것만으로 마냥 좋았는데, 칠 주 만에 수심에 차 있다. 내가 제대로 이해한 거 맞나 싶은 게 늘어간다. 기억하고자 하는 결의로 후기를 적어 본다.

  이날 “에피메테우스적 인간의 부활” 장을 다루었다. 오선민 선생님은 이 장에 대해 “탈학교 사회의 인간형은 희망과 함께 하는 인간이다” 라고 한 줄로 정리하셨다고 나는 생각한다. 여기서 일리치의 인간론, 희망에 대한 관점, 탈학교 사회에 벌어질 일의 상상, 에피메테우스 신화 등 줄줄이 해석하고 이해를 요하는 내용들이 딸려 나온다.

  일리치는 함축적으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여기서 왜 이 단어가, 왜 이 이야기가 나오지 하는 물음표 부자가 되어 글을 읽게 된다. 오 선생님은 몇 번이고 좋은 책이라 했고, 아마 읽을 때마다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기 때문인 것 같았다.

  세미나에서는 일리치의 책을 천천히 읽어나가며 요약하고 정리하고 문제를 구성하는 작업을 한다. 글쓰기와 토론에 대한 중요한 조언을 여러 가지 들었다. 요약을 할 때는 누가 하는 말인지 구분해서 적어야 한다. 한 가지 방법은 저자의 주장을 한 문장 적었다면 내 해석을 한 문장 이어 적으면서 글을 진행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세미나를 할 때 해서는 안 될 것 두 가지가 있다. 자기 경험으로 돌아가는 것과 다른 텍스트로 돌아가는 것이다. 지금 세미나에서 공부하는 책은 그 자체로 이해해야 한다. 바깥의 것에 바로 갖다 붙일 수 없다. 둘은 결코 같지 않다(라고 강조하셨다). 물론 다른 텍스트와의 비교를 글감으로 삼을 수는 있지만 그것은 나~중의 일이다. 자기 경험으로 돌아가는 것은 같이 토론할 수 없는 내용으로 가는 것이라서 더 안 좋다. 그리고 책을 천천히 읽는다는 것은 충분히 음미하면서 읽는 것을 뜻한다. 조금만 읽겠다는 뜻이 아니다. 책 한 권을 7주에 걸쳐 읽는 이 세미나의 의도를 짐작하게 하는 조언이라고 생각된다.

  책의 결말부인 7장은 판도라 신화를 줄기 삼아 진행된다. 판도라의 “판pan”은 “모든 것”을 의미하고, 고대의 숲의 신(Pan)도 상기시킨다. “도라dora”는 그리스어로 “주는 자”라는 의미다. 사전을 찾아보면 선물(gift), 또는 신의 선물이라는 뜻이라고 나오지만 일리치는 주는 자(giver)라고 해석한다. 판도라는 대지의 여신이다. 오샘은 ‘대지의 여신이 “갖가지”(207) 모든 것을 “풀어놓는다”(209)’ 라고 문장을 구성하셨다. 모든 것 중에는 좋은 것도 나쁜 것도 다 들어 있는데, 이미 다 있다는 점에서 결핍된 것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한다. 지상의 존재들에게 주어진 과제는 주어지는 것들과 결합할 것인가의 여부일 뿐이라고 한다.

  마지막 장의 제목에 등장하는 에피메테우스는, 오샘에 의하면 갖가지 풀어져 나온 것들과 결혼하는 남자이고 대지를 걸으며 시를 낳는 자이다. 그의 형은 대지와의 결혼에 반대하는 자다. 프로메테우스가 빠르게 생각하는 기술자 모델이라면, 동생 에피메테우스는 천천히 지혜롭게 되는 자, 즉 배우는 모델이다. 이 책의 주제인 탈학교 사회 상황에서 부활하는 인간형이 바로 에피메테우스다.

  대지로부터 배우는 자가 대지의 손에 이끌려 들어간 세상은, 오샘의 표현대로 ‘이해의 과제로 충만’하다. 그 모든 이해의 과제를 만나서 탄생하는 것은 바로 “시적 경이”(213)이고 그 경이감이 “창조적 상상력”(213)을 촉발시켜 뱉어진 말과 행위가 “시”다. 시는 이들의 결혼으로 새로 태어나는 아기다. 아기들의 탄생으로 에피메테우스는 기쁘다. 그는 충족감으로 가득 차 자연의 선함을 적극적으로 믿게 된다.

  오선민 선생님은 결혼이라는 말로 표현된 ‘결합력’에 대해 말했다. 감응하는 능력이라고도 했다. 아니, 그건 동화인류학 세미나에서 하신 말 같다.

  그런데, 선하다는 건 뭐고 악하다는 건 뭘까? 에피메테우스는 처음부터 선을 추구한 것도 아니고 기쁨을 얻어내려고 한 것도 아니다. 오샘은 그가 ‘주로 하는 일’은 생각하는 것이고 배우는 것이라면서, 어떤 경우에도 해석을 멈추지 않되 풍요의 방향으로 해석한다고 한다. 이것은 아마, 일리치가 말한, 스스로 “가치를 창출하는 힘”(213)일일 것이다. 그의 가치 창출력이 선한 것이라면, 그건 별도의 목적을 두지 않은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에피메테우스는 목적이 없다. 왜냐면, 그는 다 주어진 세계의 인간형이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그는 그 무엇도 도구화하지 않는다. 그래서 도구제작자 프로메테우스와 상당히 다른 길을 간다. (아참, 에피메테우스는 인간도 신도 아니다. 제우스 신의 통치 이전에 온 타이탄이다. 일리치가 말하려는 건, 탈학교 사회의 인간형이자 그러한 에토스를 말하는 것임에 주의! 제우스가 인간의 악행이 도가 넘었다고 판단해 홍수로 인간 세상을 종식시킨 이후, 작은 배를 타고 살아남은 마지막 남자와 여자로부터 새 인류가 시작되는데 그 부부가 에피메테우스 형제의 딸과 아들이다.)

  프로메테우스는 미리 앞서서 생각하는 자다. 세상에 풀려나온 재앙을 통제하는 것이 그의 목표다. 그러기에 해봐야 알게 되는 동생과 달리 그의 결혼을 앞서서 반대하는 것이다. 목적론의 세상엔 ‘선재하는 옳음’이 있다. 목적이 따로 있는 세상이란, 아직 만족이 없는 불만족 상태의 세상이다. 그는 초조하고, 계획대로 되지 않았을 때 자책과 원망에 휩싸일 것이다. 내가 예상하고 기대했던 결과를 성취하는 것을 방해하는 일이 발생하면 화가 난다. 나를 이글이글 타오르게 하는 것, 그 옳고 바라마지 않는 것, 바로 그것이 악이라고 오선생님은 말했다. 이럴 수가! 옳은 것이 악이란 말인가! 아니, 옳은 것을 목적으로 할 때 악이 발생한다고 다시 써본다.

  목적을 따로 두지 않는다는 것은 존재 자체로 충만한 세계를 상정한다. 목적을 가지면 지구라는 대지조차도 그 목적론의 도구가 된다. 목적론의 세계는 채워지지 않는 결핍의 세계다. 결핍된 상태로 집단적으로 거주하는 장소가 있다면 그건 불타는 지옥이다.

  여기서 잠깐, 에피메테우스는 안달하지 않고 ‘빈둥거리’며(213) 자유시간(여가, schole, 200)을 일상적으로 누리면서 주로 생각을 하고 경탄한다고는 하지만 그가 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선생님은 겉으로만 볼 때 형제는 비슷해 보인다고 한다. 기술이든 시이든 ‘끊임없이’ 무엇인가 발견해나가고 있는 행위자들이기 때문이다. 오선생님은 우리 세미나 참가자들이 목적을 상실하고 공부에서 손을 놓거나 정처없이 표류할 것을 상상하지는 않으시겠지만 위와 같이 덧붙이셨다. 사실, 일리치가 학교 없는 사회를 이야기하는 이유를 따져보면 학교 때문에 공부를 할 수 없으니 학교 제도에 반대하는 것이다. 학교교육이 배움의 권리를 빼앗으니, 더 많이 더 깊이 더 공부할 수 있는 길을 찾아가자고 말하는 것이다. 오샘은 목적은 없지만 방향이 있다면서, 방향이 있는 길 위에서 ‘단기 목표’는 계속 있다고 한다. 예를 들면, 세미나 과제는 한 장을 넘기지 말고 정해진 시간 내에 제출하기 같은 종류의 단기 목표 말이다.

  무기력에 대한 토론도 있었다.(진진샘) 일리치는 학교 같은 제도적 돌봄에 의존하는 상태는 “심리적 무력감”이나 “스스로를 지키지 못하는 무능력”을 가중시킨다고 주장한다. “스스로 가치를 창출하는 힘”을 빼앗기는 것이 무능력화이다. 무기력은 신체 활력만이 아니라 심리적 무력감을 포함한다. 이 장에서도 “만능의 도구들에 둘러싸인 채” “우리가 만든 도구의 도구로 전락”한 사람들의 좌절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그들이 키우는 능력은 “좌절하는 능력”이다. 그렇다면 활력은 어디로 가버렸는가? 오샘은 ‘사려 깊음’이야말로 가장 활기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생각거리가 널린 곳에서 쉬지 않고 놀라고, 해석하고, 시를 발견해가는 힘에 대해서 말했다.

  일리치는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돌보고 기다리는 능력”(226)을 향상시키는 것을 중시한다. 이 부분을 읽으며 ‘배려와 돌봄’이 갑자기 여기서 왜 나올까 생각했다. 사실, 앞에서 줄곧 일리치는 인간적 가치를 비-인간인 제도의 과정에서 얻을 거라고 기대하는 현대인에 대해 말해왔다. 제도에 의지한 나머지 “개인 선의”가 필요치 않다고 여겨지고 이것은 인간이 처한 위험이다.

  그런데, 선한 의지는 누가 갖는 것인가? 자연의 선의, 인간의 선의, 그리고 ‘나의 선의’(오샘)를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믿어야 한다. 나는 내가 선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있는가? 타인이 악의를 가지고 있지 않을 거라고 희망할 수 있는가? 선의라는 말 앞에서 이런 질문들을 하게 된다. 한편, 개인의 선의를 믿는 것은 하나의 “사회적 힘”(208)이 될 수 있다. ‘공동의 감각’(오샘)으로서 자연과 인간의 선의를 믿을 때, “인격적 행위 자체가”(200) 제도와 관료의 비-인간적 힘보다 “더 높은 가치를 갖는 사회”(200)를 만들 수 있다.

  “지구의 유한성에 대한 새로운 감각”을 갖는다는 표현이 이해하기 어려웠다. 유한성이 뭐지? 샘은 유한하다는 것을 유일하다라고 바꿔 말할 수 있다고 했다. 유일하다는 것은 이 세상에 오직 그것 하나뿐 그 외의 다른 것은 없다는 뜻이다. 대체할 수 있는 것이 없다. 그리고 이 땅 밖에 없다는 것은 그것에 대해 초월적인 입장이 될 수 없다는 뜻이다. 내재적으로 함께 할 수 있을 뿐이다. 다시, 목적을 별도로 두지 않는다는 관점으로 오샘과 함께 돌아온다. 유한하다는 것은 결핍이 아니다. 있는 것으로 만족하고 다른 것이 더 필요하지 않은 세상에 대한 감각이다. 거기서 마주치는 사실과 운명과 필연은(211) 인간으로서 도전할 수는 있겠지만 제도로 차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에피메테우스의 필연은 어떤 이유가 선재하지 않는 필연이라서 우연과 유사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에게는 오직 해석의 과제일 뿐이다.

  세상의 선함을 적극적으로 믿는 사람들은 일어난 일들을 돌아보고, 사려 깊게 해석한다. 샘이 지나가는 듯 언급하셨던 것 같은데, 그 해석 속에서 인간은 재구성된다. 선민샘은 과거를 돌아보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물었고, 일리치의 책 쓰기 방식에서 어떤 식으로 구성 또는 구조적으로 구현되는지 생각해보라고 요청하셨다. 그리고 희망에 대해서 말했다. 나는 판도라의 상자(또는 항아리)에 남은 희망에 대한 이야기에서 연상하여 ‘희망은 어디에 있는가?’를 묻고 싶었는데, 샘은 희망이란 해석의 행위 중에 떠오르는 것이라고 말했다. 바람과 함께 비로소 출현하는 것이라고 시적으로 말씀하셨다. 그래서 일리치는 “기다리는 능력”(226)에 대해서 말한 것일까?

  “기대”와 “기다림”을 구분할 수 있을까? 어떤 결과치를 요구하는 것이 기대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겪게 될 현상들을 문제거리로 보고 전문가에게 해결책을 요청하는 것이 기대다. 그런데 기다리는 것은, 아마도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보는 것일 것이다. 흥미로운 상태다. 오선민 선생님은 “흥미롭다”는 말을 흥미로워 하시며 음미하셨다. 바람처럼, 상상력처럼, 일으키는 운동성을 표현한 “흥”이라는 글자를 새롭게 보게 된다. 샘이 쓰시는 표현들을 포함하여, 흥미로워 하다. 흥을 느낄 줄 알다. 마음이 끌린다. 마음이 동한다. 감흥을 일으키다. 감발되다. 촉발하다. 재미있어 하다. 관심을 느끼다. 감응하다. 접촉하여 변용되다. 분발하게 되다. 같은 단어들이 표현하는 어떤 상태다. “예기치 않은 문제에 놀라서 새로운 출구를 찾는 과정에서” 배움이 일어난다고 본 것이 일리치의 교육관이다.(48) 놀라거나 흥미를 느끼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배움에 대한 이미지는 이 책의 머리과 꼬리에서 그가 인용한 예브게니 옙투셴코(1932~2017)의 시 「민중」에서도 나타난다.

 

이 세상에 흥미롭지 않은 사람은 없다

사람의 운명은 별의 역사와도 같은 것(7과 226)

 

누군가가 어둠 속에서 살아왔고

그 어둠 속에서 친구를 얻었다면

어둠도 흥미롭지 않은 것이 아니다.(226)

 

  샘은 세상과 사람을 “흥미롭게” 만나는 순간에 길러지는 힘이 배움의 능력이라고 말한다. 배우는 자의 눈에 포착된 세상은 ‘별처럼 빛난다(오샘).’ 각자의 순간순간이 특별하고 고유하게 빛난다. 배우는 자의 “비밀스러운 세계”(226)에서는, 달 탐사선에 실려 우주로 쏘아올려지지 않아도 갖가지 별들로 가득 찬다.

  에피메테우스가 된다는 것은, 인간성의 회복이다. 인간적인 것이 상품보다 가치를 갖는 세상의 출현이다. 에피메테우스가 된다는 것은, 제도에 묶여서 심리적 무력감으로 내장을 파먹히는 프로메테우스의 고통으로부터 풀려나, 대지를 걷는 힘 있는 거인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샘은 에피메테우스를 만나는 것이 아니라 되는 것이라고 하셨다. 동사가 중요하다. 방향키는 동사인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해서 오선생님의 안내로 『학교 없는 사회』를 끝까지 읽었다. 선생님은 판도라 신화를 정리해보라고 했고 더 볼륨 있는 책을 읽는 세미나를 해보라고 개인 과제도 내주셨다. 볼륨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궁금해 하면서, 일리치가 하려는 말이 이런 거였을까 저런 거였을까 하고 이해하려고 애쓰면서 지나온 지난 시간들이 소중하다고 말하고 싶다. 고맙습니다~

전체 2

  • 2024-07-14 22:13

    아. . 정말 최고의 후기입니다. 엄청난 집중력과, 해석력을 활활 태우셨습니다.
    질투가 날 정도로 훌륭한 후기. . 정말 감사합니다. 선생님. 에피메테우스의 대지에서 우리, 함께 걸어요.


  • 2024-07-15 21:54

    우와! 숙제에 앞서 선생님의 후기를 읽으니 지난 셈나가 복기되네요! 교과서로 써야겠습니다 ㅎㅎ
    꼼꼼한 정리 감사합니다! 유리샘의 사유 상자를 배우고 싶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