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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일리치 Ivan Dominic Illich

공생의 삶을 생각하다

 

[학교 없는 사회] 가마지 할아범과 숯검댕이(최종)

작성자
덕후
작성일
2024-07-24 18:28
조회
144

가마지 할아범과 숯검댕이

 

이반 일리치 세미나에서 에피메테우스의 사려 깊음에 대해 더 생각해 보라는 과제를 받았다. 사려 깊음이란 현상만을 보지 않고 그 이면을 보는 것이고 나만 생각하지 않고 주변을 두루 함께 보는 것이다. 앞을 보는 프로메테우스에 대비하여 어리석음으로 비유되기도 하는 에피메테우스는 당장 현명하고 유용해 보이는 선택을 하지 않는다. 사려 깊음이란 눈앞의 것만을 보고 달려가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우주로 나가 지구를 바라본 프로메테우스가 비로소 에피메테우스의 선택을 이해할 수 있듯이 거리를 두고 멀리서 전체를 보고 다양한 각도로 사유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자를 사려 깊다고 할 수 있다.

이반 일리치는 제도화된 사회가 프로메테우스적 인간을 길러냈고, 이로 인해 세상은 목적만을 쫓다가 인간성을 잃어버렸다고 말한다. 예측하고 계획한 결과에 대한 기대만을 할 수 있는 프로메테우스들은 희망을 잃어버렸다. 이반 일리치는 우리가 희망을 되찾을 수 있는 방법은 에피메테우스적 인간이 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가 말하는 희망이란 우리가 바라는 선물을 가져올 사람에게 바람을 갖는 것이다. 에피메테우스는 어떤 목적이나 결과를 결정하지는 않지만 우리라는 네트워크의 목표를 향해 가면서 제도가 아닌 사람에게 바람을 갖는다. 제도나 상품에 의존하는 마음이 아니고 사람에게 바라는 것이 희망인 것이다.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희망의 결과를 좋은 것과 나쁜 것으로 구분하지 않고 어떤 결과에서든 배울 점을 찾아내는 것이 에피메테우스의 사려 깊음이다.

전형적으로 학교화되어 프로메테우스적 삶을 살던 나에게는 에피메테우스적 인간상을 떠올리는 것이 쉽지 않다. 대지의 여신인 판도라와 결혼하여 대지에서 태어나는 것들을 자식으로 여기고 긍정한다는 것이 무슨 뜻일까? 자연의 베풂에 의해 이럭저럭 살아갈(subsist)’ 수 있다는 믿음을 갖는다는 것이 어떤 것일까? 남들보다 뒤처질까 봐, 더 많이 갖지 못할까 봐 전전긍긍하는 프로메테우스적 사고에 익숙한 나에게 에피메테우스의 사려 깊음은 시대에 뒤떨어진 것처럼 느껴진다. 앞으로만 움직이던 발길을 머뭇거리고 혼자 가지 않고 친구와의 네트워크를 만들어 함께 걷는 것, 주변에 일어나는 일들을 여러 관점에서 바라보고 사유하려는 노력 등 말이다. 게다가 과거를 돌아보고 전통을 지키며 고전을 공부하라니 이반 일리치가 말하는 사려 깊은 인간이 되는 길은 멀고 어렵다.

인문세 영상팀은 기헌 선생님이 맡아서 지휘하고 있다. 세미나 영상뿐 아니라 각종 답사 영상의 촬영도 기획하고 편집한다. 선생님은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 나오는 가마지 할아범처럼 팔이 여러 개인 것처럼 한 번에 여러 일을 진행한다. 유바바 온천의 모든 탕약을 관리하면서 자신의 주변도 깔끔하게 정리하고 린을 통해 센의 취직 자리도 얻게 해준다. 사려 깊음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 기헌 선생님을 도와 영상 편집을 하던 나는 가마지 할아범을 돕는 숯검댕이와 비슷하다. 시키는 일만 하는 것도 벅차 틈만 나면 게으름을 피우고 일이 많다고 느껴지면 불만도 갖는다. 눈앞의 일만 하기에도 급급하니 사려 깊음과는 거리가 멀다.

그런 숯검댕이가 영상팀을 맡게 되었다. 지금까지 내 일만을 보던 시야에서 벗어나 팀 전체를 봐야한다. 영상의 촬영뿐 아니라 편집과 회계의 구성까지 영상과 관련된 일 모두를 염두에 두지 않으면 안 된다. 전체를 조망하는 리더의 자리인 것이다. 이는 이반 일리치가 말하는 자율적 학습자, 즉 스스로 정한 공동의 목표를 향해 네트워크 구성원과 함께 걷다가 발생하는 모든 것들은 좋은 것과 나쁜 것으로 구분하지 않고 거기서 배울 점을 찾는 사람이다. 시키는 일만 겨우겨우 해내던 숯검댕이는 가마지 할아범처럼 사려 깊은 자가 될 수 있을까? 이반 일리치의 책들을 계속 읽으며 사려 깊음을 찾아가는 숯검댕이의 모습을 상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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