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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학은 일상과 다른 상상력을 통해 다른 가능성을 생각해보게 합니다. 구석기에서 살아가려면 먼 곳에서도 물을 구할 천리안, 웬만한 도구는 만들 수 있는 손, 간단한 도구를 복합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머리가 있어야 하고, 무리 가운데 살기 위해서 빠르게 자기 역할을 찾는 맥락 파악을 해야 하고, 무엇보다 남에게 군림받거나 군림해서도 안됩니다. 한마디로 자연학적 지식, 기술, 사회적 지능이 뛰어나야 살 수 있습니다. 산다는 것은 남의 돈 벌기가 싶냐는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무기력하게 사는 것 말고도 다른 옵션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상상해봅니다. 어쩌면 나도 몰랐던 다른 가능성, 이를테면 효율, 이익과 무관하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무엇을 만드는 데에 집중하고, 그저 친구들과 아무런 이해나 계산없이 즐겁게 시간을 보낼 수 있는 힘이, ‘이미’ 내 안에 있는, 그런 멋진 상상을 말이죠.

[빙하 이후(2)] 『건축가 없는 건축』 울퉁불퉁한 땅에 숨겨진 차이들

작성자
강평
작성일
2024-07-27 12:00
조회
156

해외 여행을 가서 사진을 찍을 때면 입이 떡 벌어질만한 크기의 궁전, 성당, 박물관이 나오는 인증샷을 찍고는 했습니다. 건축물이라면 우뚝’, ‘창의적인 건축가라는 단어가 떠올랐는데요. 건축가 없는 건축은 자연에 적응하며, 자연 지형을 그대로 활용한 다양한 건축물을 이야기합니다. 그간 건축가들의 건축만 바라보느라 경이로운 자연을 당연한 배경쯤으로만 생각한 것은 아닌지 돌이켜봅니다.

 

이번 글은 현직 조각가로 활약하고 계시는 조재영 선생님의 건축가 없는 건축의 발제문입니다. 조재영 선생님은 한계의 인식이야말로 우주 전체를 배우고 이해할 수 있는 태도라고 합니다. 이 글을 통해 하면 된다는 익숙한 생각을 되돌아봅니다. 생각해보면 자연의 어떤 것도 직선은 없습니다. 자연은 모두 울퉁불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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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가 없는 건축] 울퉁불퉁한 땅에 숨겨진 차이들

 

조재영

 

건축가 없는 건축1964119일부터 196527일까지 MoMA(Museum of Modern Art)에서 전시된 건축가 없는 건축과 함께 출간된 책이다. 저자 Bernard Rudofsky는 서문에서 기존의 건축 계보에 포함되지 않았던 생소한 세계를 소개함으로써 그동안 우리가 가졌던 편협한 건축 예술의 개념을 무너뜨리고자’(8) 한다고, 이 책의 목표를 분명히 밝히고 있다. 저자는 공식적’(formal)’이지 않은 토속 건축과 함께 이 목표를 실현하려 한다. 저자가 말하는 공식적인은 권력과 부의 업적에 따라, 또 그런 건축을 디자인한 건축가의 이름을 중심으로 서술된 건축 역사 앞에 붙는 수식어이다.

공식적인 근대 상업 건축과 토속 건축의 가장 눈에 띄는 차이는 자연, 환경을 대하는 태도였다. 근대 이후 과학이나 기계문명은 자연에 대해 일방적이다. 각 지형이 가지고 있는 차이들은 중요하지 않다. 기온도 큰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 어떤 땅, 어떤 산도 갈아엎을 수 있다. 심지어 바다 심연에 흙을 퍼 날라, 없던 땅도 만들지 않는가?

반면 토속 건축은 자연 발생적이다. 인간은 자연에 순응하거나 도전하며 상호작용한다. 여기에는 건축을 디자인한 주체, 유명 건축가가 따로 있지 않다. 자연과 공동체의 합작품에 가깝다. 누군가는 토착 건축이 형성될 당시에 기계와 과학이 발달하지 않아서라고 말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자연과 함께 자신들의 살 집을 손수 만들어간 이들에게 과연 그것이 필요할까? 그들에게는 지나치게 넓은 땅, 높은 집, 그것을 순식간에 뒤엎어 금세 다시 올려세우는 기계와 기술은 필요하지 않다. 무엇보다 그들의 건축은 그들에게 지금 그대로 충분해 보인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어떤가? 하늘을 찌르는 몇백 층의 고층 건물을 세우고도 우리는 여전히 부족하다고 느낀다. 만족을 모른다.


도시성(urbanity)이라는 말 자체는 성벽과 연결되어 있고 라틴어 ‘Urbs’도 성벽으로 에워싸인 도시를 뜻한다. 따라서 예술작품이 되기를 지향하는 도시는 한 폭의 그림, 한 권의 책, 한 곡의 음악처럼 분명한 한계가 있어야 한다. 우리는 도시의 생성 단계에 있었던 이러한 사연들을 잘 모른 채, 건축물의 확산에 기력을 소진하고 있다. 우리의 도시들은 공허한 모습으로 아무런 제약 없이 성장하고 있으며, 어떤 치료법으로도 손댈 수 없는 건축적 습진으로 변하고 있다. ( 건축가 없는 건축Bernard Rudofsky, spacetime, 16)


 

우리는 어떤 때 만족할까? 어떤 때 부족하다는 느낌을 중단할 수 있을까? 나는 저자가 말한 한계인식이 이와 관련 있어 보였다. ‘위대한 건축가들이 만든 토속 건축의 많은 수가 휴먼 스케일임을 알 수 있다. 인간으로서 자신의 신체를 감각하고 이 신체와 함께 공간을 감각하는 것이다. 토속 건축의 휴먼 스케일이 내포하는 바는 내가 혹은 우리 공동체가 감당할 수 방식으로, 감당할 수 있는 만큼만 넓힌다는 것이 아닐까? 즉 자신들의 한계를 안다는 것이다. 나 자신의 한계를 안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만큼 짓는다는 것은 나의 신체적인 가동 범위, 능력치, 혹은 관계 사이에 허용되는 정도 등을 잘 파악하고 있을 때 가능하다. 내 신체적 역량을 잘 알아, 주어진 범위 안에서 그 능력을 최대치로 사용한다는 말이기도 하고 환경에 맞춰 점차 키워가고 넓혀간다는 말이기도 하다. 자신의 한계에 대한 인식은 또한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구분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내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존재라는 인식과 내가 모든 것을 다 할 수는 없다는 인식에는 분명 차이가 있다.

한때 하면 된다는 구호가 대한민국을 뒤덮기도 했다. 근대 기계 문명은 우리가 감당하는 그 이상을 계속 꿈꾸게 한다. 한계를 모르게 한다. 아파트 15층에 사는 우리 집의 짐이 한가득이면 어떤가? 이사 갈 때 사다리차를 부르면 되지 않는가? 그런데 기계들이 우리 거주 공간으로 들어오면 올수록, 사물과 신체, 공간과 신체, 그 사이 간격은 점차 멀어진다. 현대 건축은 우리 신체와 관계의 개입을 거부한다. 거대한 상업 건물 앞에 소외된 채 우리는 점차 사물과 공간을 내 신체로 부딪히며 감각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있다. 나를 둘러싼 사물과 공간을 감각하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현대의 건축가들과는 달리, 자연을 정복하려 하지 않고 기후의 변덕과 지형의 도전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있다. 우리들은 평탄하고 특색 없는 땅(지형에 어떤 결함이 있으면 불도저로 쉽게 밀어버린다)을 가장 좋아하는 반면, 보다 정교한 사람들은 험준한 땅에 매료된다.(같은 책, 15)

 

그러고 보면 공간을 감각한다는 것은 한계를 감각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현대를 사는 우리는 늘 스스로의 한계 정도를 벗어난다. 아니 그 정도가 어디까지 인지 실상 잘 모르고 있다. 현대 건축은 기본 값이 평지이다. 자연이 가진 어떤 조건도 지워버리고 영토를 제로로, 무화시킨다. 이 백지 위에서, 대응할 조건이 사라진 상태에서 신체는 무엇과 어떻게 대응할 수 있을까? 신체와 관계의 범위 밖에서 존재하는 기계 및 기술의 무한한 힘 앞에서 우리들의 신체 능력은 무용한 것이 된다. 현대 건축은 그 과정에서 무한을 꿈꾸며 옆으로 위로 자신의 몸집을 키워가지만 정작 그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창조성을 유한한 것으로 고정시켜 버린다. 더 이상 창조할 수 없는 자로 만든다.

반면 토속 건축들이 서있는 땅은 울퉁불퉁하다. 거칠고 투박하다. 친절하지 않다. 끊임없이 우리를 실험한다. 토속 건축들이 가르쳐 주는 창조는 내 조건을 벗어나 외부, 내가 서 있는 영토 밖을 보는 것이 아니라 내 영토를, 내가 관계 맺고 있는 것들을 잘 이해할 때 가능한 것이다. 나와 나를 둘러싼 조건들의 한계를 직면할 때 창조가 가능하다. 자연에서 대면하고 있는 여러 재료들의 성질, 그 마다의 다름, 한계와 가능성을 동시에 알아 적재적소에 쓰는 것, 또 같은 재료와 형태이지만 계절에 따라 그 쓰임을 달리하는 것 거기서 창조가 시작된다. 쓰임은 그 안에 잠재되어 있는 가능성을 보기 위해 부단히 애쓴다는 말이기도 하다.

토속 건축의 재료와 제작방식은 온전히 자연으로부터 온 것이기에 자연의 변화와 흐름 파악은 필수이다. 한계를 인지하는 것이 곧 우주 전체를 배우고 이해하는 것으로 나아간다. 자연 속의 조건들은 한시도 가만히 있지 않다. 나뭇가지도 비가 와 수분을 먹었는가, 햇빛이 강해 수분이 바짝 말랐는가에 따라 쓰임이 다르지 않는가? 그리고 그때 내 신체 역량은 얼마 만큼인가? 내 공동체에는 얼마만큼의 사람들이 있는가? 이 조건들이 교차하는 지금이라는 한계는 자연과 일상이 품고 있는 무수한 차이를 알아차리게 하고 또 다른 차이를 생성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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