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학은 일상과 다른 상상력을 통해 다른 가능성을 생각해보게 합니다. 구석기에서 살아가려면 먼 곳에서도 물을 구할 천리안, 웬만한 도구는 만들 수 있는 손, 간단한 도구를 복합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머리가 있어야 하고, 무리 가운데 살기 위해서 빠르게 자기 역할을 찾는 맥락 파악을 해야 하고, 무엇보다 남에게 군림받거나 군림해서도 안됩니다. 한마디로 자연학적 지식, 기술, 사회적 지능이 뛰어나야 살 수 있습니다. 산다는 것은 남의 돈 벌기가 싶냐는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무기력하게 사는 것 말고도 다른 옵션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상상해봅니다. 어쩌면 나도 몰랐던 다른 가능성, 이를테면 효율, 이익과 무관하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무엇을 만드는 데에 집중하고, 그저 친구들과 아무런 이해나 계산없이 즐겁게 시간을 보낼 수 있는 힘이, ‘이미’ 내 안에 있는, 그런 멋진 상상을 말이죠.
[빙하 이후(4)] 신석기, 혁명 아닌 선택
『빙하 이후』를 읽은 뒤 가장 큰 변화는 신석기 혁명으로 농경이 시작되면서 인류의 발전이 시작되었다, 그 전은 암흑기였다는 생각이 와장창 깨졌다는 것입니다. “사냥하던 미개인이 이리저리 살다보니 깨달음을 얻어 농사를 짓게 되는 놀라운 진보의 길을 걸었다는 것이다”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신석기 혁명이었던 것 같습니다. 사실 신석기는 ‘혁명’이 아니라, 선택하지 않을 수도 있었던 여러 선택지 중 하나였습니다. 신석기 혁명에 대한 재고는 신석기 이전 세계를 완전히 새롭게 보게 합니다.
이번 글은 인류학팀의 기술자 이기헌 선생님의 ‘신석기 혁명’이라는 명칭에 대한 재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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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석기, 혁명 아닌 선택
이기헌
몇 년이 지난 지금, 인류학 세미나에서 스티븐 마이든의『빙하 이후』를 읽고 공부하면서 내가 알고 있던 상식과는 전혀 다른 구석기와 신석기를 발견하게 되었다. 또 구석기와 신석기 사이에 도구의 차이를 보이는 중석기도 있었다고 한다. 과거 공부했던 내용은 장구한 인류의 역사를 한마디로 ‘퉁쳐서’ 구분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연한 사실이라며 암기에만 급급했는데 생각해보면 정말 이상한 일이다. 전 세계에서 구석기와 신석기 사람들은 수만 년에 걸쳐 변화를 거듭해왔는데 변화의 지점이 몇 단어로 간결하게 구분된다는 것이 말이다. 더 놀라운 것은 구석기부터 신석기로 이행에 있어 진보가 아니라는 점이다. 스티븐 마이든은 구석기인들이 의도적으로 농경을 거부했다고 말한다. 인류의 삶의 방식은 내 생각처럼 진보의 길을 걸은 것이 아니고, 경제적인 논리로 선택된 것도 아니다. 또 그 변화의 이유도 다양하다.『빙하 이후』는 서아시아에서 여행을 시작하여 유럽, 아메리카, 오스트레일리아 등으로 구석기에서 신석기 여행을 그리는 책이다. 이 긴 여행의 경유지에서 나는 구석기인과 신석기인이 함께 살았던 유럽에 주목하여 내가 그간 상식이라고 믿었던 역사의 이행과 진보를 생각하며 달라진 나의 관점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그에 앞서 이 책에서 스티븐 마이든이 그의 여정에 ‘러복’이라는 사람을 앞세운 점은 특별한 생각거리다. 왜 자신을 대신해 러복이 여행해야 했을까? 가상의 인물인 러복은 자신과 같은 이름을 가진 고고학자의 『선사시대(Prehistoric Times)』(1865)라는 책을 들고 여행한다. 이 책은 실제로 20세기 선사시대 연구의 근간이 된 베스트셀러이다. 하지만 스티븐 마이든이 보기에 지금의 기준으로 석기시대의 연대나 생활 양식, 환경 등을 알지 못하고 쓴 것이다. 그는 러복에게 이 책을 들고 세계 구석구석 여행을 하면서 150년이 지난 시점에서 어떤 변화가 있는지를 보게 한다. ‘역사’는 단순히 고고학자가 찾는 유물이 아니라 사람들의 삶에 대한 것이기 때문에 현재의 시점에 갇히는 자신의 시야를 러복의 눈을 통해 ‘버려진 석기와 음식 잔존물, 텅 빈 집과 식어 버린 화덕자리 너머까지’(26) 자세하게 보고 싶은 것이다. 우리는 자신이 보고 듣고 느끼는 것에 기반하여 사고하기 때문에 우리의 관점은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내가 믿음직한 기관이 인증하는 시험에 의심하지 않았던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스티븐 마이든에 따르면 우리는 더 상상할 수 있다. 러복을 따라 구석기에서 신석기로 여행하며 너무 당연하다고 생각해서 주목하지 못했던 두 세계의 변화의 지점을 바라보자. 이곳은 유럽의 수렵채집민과 농경민이 사는 두 마을이다.
수렵채집민의 정주
서기전 6500년 레펜스키비르(Lepenski Vir) 아이언 게이츠(Iron Gates). 이곳은 다뉴브강 유역의 발칸 산맥과 카르파티아 산맥 사이 삼림 지대 해발 1000 미터에 위치하고 있는 수렵채집민이 사는 마을이다. 빙하시대 수렵민은 이곳을 주기적으로 찾아와 살면서 산양을 사냥하고, 연어를 잡았다. 기후가 온난해지고 비가 자주 내리면서 나무들은 광합성을 더 많이 할 수 있도록 넓은 잎을 가지게 되었다. 숲은 붉은사슴, 멧돼지, 수달, 비버 등 사냥감과 먹을거리를 풍족하게 담고 있다. 초가을에 들어와 겨울 캠프를 차리고 늦봄에 떠났던 사람들은 여름이 되면 물고기를 선사하는 이 강 유역을 떠날 필요를 느끼지 못하게 된다. 임시 야영지였던 이곳은 유럽에서 수렵채집민들이 사는 첫 번째 정주 마을이 되었다. 수렵채집민은 곧 이동하는 사람들이라는 이미지가 있었는데 그들이 꼭 그렇게만 살았던 것은 아니다. 그들은 필요에 따라 캠프를 만들고, 필요에 따라 집을 지었다.
고고학자들에 의해 발견된 레펜스키비르 유적에서, 이동하며 살던 수렵채집민의 발을 묶은 것은 숲과 강이 제공하는 풍부한 식량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 식량은 고기와 물고기뿐 아니라 견과류와 버섯, 베리와 씨앗까지 다양했다. 하지만 이들에게 풍부함은 내가 생각하는 것처럼 부족함이 없고 잉여를 남기는 것이 아닌가 보다. 아이들의 무덤에서는 영양실조의 흔적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마을에는 구루병이 만연하고, 아이 가운데 영양실조로 치아가 자라지 못한 경우도 있다. 아이들의 죽음은 여자들에게는 감당하기 어려운 슬픔이었을 것이다. 성인들의 무덤은 집 바깥(사이)에 묻었지만 아이들은 집 안 바닥이나 화덕, 제단 안에서 발견된 것을 보면 아이를 차마 떠나보내기 어려웠던 여자들의 마음을 알 수 있다. 여자들은 석회암을 으깨 모래와 자갈을 섞어 사다리꼴 단을 만들고 주변에 돌덩어리를 돌려서 아이의 영혼을 쉬게 하는 신성한 자리를 마련했다. 이 부분에서 스티븐 마이든이 ‘엄마’가 아니고 ‘여자들’이라고 한 것은 어떤 이유에서일까? 세라 블래퍼 허디의『어머니,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 수렵채집민 어머니들은 출산 후 다른 사람들이 아기에게 가까이 오거나 아기를 안아주는 것을 거절하지 않았다고 한다. 수렵채집민의 보살핌 방식은 어디서 어떻게 생계를 꾸려가든지 아기들을 따뜻한 관용으로 대하고, 절대 혼자 있게 하지 않으며, 어머니가 아니어도 꼭 누군가(여자)가 안아준다는 것이다. 아이들은 농업사회보다 여자 어른과 접촉하는 시간이 더 많았다.
어느 고고학자는 강 주변에서 살던 레펜스키비르 유적의 무덤을 관찰하고, 어른의 무덤에서 죽은 자의 머리는 하류를 향하게 두어 영혼도 강을 따라 흐르게 했다고 말한다. 강은 식량의 원천이면서 그 흐름은 탄생과 죽음의 통로를 상징한다. 레펜스키비르 사람들은 봄마다 철갑상어가 부화를 위해 상류로 올라오는 것을 보며 강의 생명력, 태어남을 보았고 물고기와 사람이 혼합된 조각을 만들어 망자의 영혼이 다시 태어나기를 바랐다. 이곳에서 만물은 영을 품고 생동한다. 이것은 곧 애니미즘을 의미하는데, 자연을 의인화하여 그 끝없는 세계를 이해하는 것이다. 물고기, 나무, 돌에게 나와 같은 마음이 있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거센 파도를 보면서 화가 났다고 믿는 것처럼 말이다. 나무에게 나와 같은 마음이 있다고 믿지만, 나무의 성질을 배제시키지 않는다. 구석기인들은 우주 속에서 내가 어떻게 타자와 관계 맺는지에 대한 계산을 멈추지 않았다. 그들은 늘 마주치는 자연을 나인 것처럼 생각하고, 반대로 나 역시 자연인 것처럼 생각했다. 이러한 믿음 체계에서 핵심은 끊임없이 고정된 자기에서 탈피하는 것이자 우주 전체의 질서와 균형을 잃지 않는다는 것, 즉 대칭적인 사고에 있다. 나에게 죽음은 끝이고, 당면하지 않은 현실이자 거리가 먼 일이라면 오래전 영이 있다고 믿었던 인류에게 삶과 죽음은 다르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농경민의 이주
서기전 7500년 즈음 사람들이 서아시아 오할로에서 배를 타고 씨앗, 양, 염소를 태워 유럽 최초의 농경 마을은 네아 니코메데이아(Nea Nikomedeia)로 들어왔다. 그리스에 처음 도착한 농경민은 사람이 거의 살지 않은 곳에 자리 잡았다. 학자들은 이에 대해, 분명한 것은 아니지만 그리스에서 보이지 않던 잘 만들어진 토기가 등장하는 것으로 이주민이 들어왔음을 추측한다. 이주민들은 숲을 개간하고 양과 염소에게 풀을 뜯게 하고 집을 지으며 유럽 선사시대의 새 장을 열었다. 기존에 살던 사람들이 농사를 시작한 게 아니라 멀리 떨어진 곳에서 배를 타고 들어온 뉴페이스가 농사를 시작했다는 것은 흥미로운 사실이었다. 농경민 각 가구는 별도로 밭을 가꾸고 가축을 기르고 토기와 도구를 만든다. 갈대다발과 어린 참나무 가지 위에 진흙을 발라 집의 벽을 만들었다. 이제 바깥으로부터 고립된 이곳은 아늑함을 주는 가족들의 거주 공간이 되었다.
가구는 따로 생활하면서도 바깥에 화덕을 피워 공동으로 식사를 하면서 서로에게 호의적인 문화를 유지한다. 추운 계절이 오면 가물고 늦게까지 땅이 얼어붙은 탓에 온전한 수확이 이루어지지 못한다.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양과 염소를 잡아 근근이 살아간다. 가구 사이에 호의적 관계가 있어 어려울 때 서로 돕는다. 한 가구가 식량이 부족할 때 다른 가구에 의지하여 도움을 받는다. 겨울 동안 비가 내리고 습지가 호수가 되고 밭에 물을 주고 고운 실트가 쌓이면서 다음 해 곡식의 비료가 된다. 참나무 싹이 나오면 사람들은 삽과 괭이를 들고 밭을 일구고 씨를 뿌린다. 사람들은 계속 풀을 뽑고 물을 대고, 곡물을 갈고, 땅을 파고, 숲을 헤친다. 일손이 부족할 때는 어린아이들까지 총동원되어 김을 매고 거름을 주어야 한다.
죽음에 대한 의례는 수렵채집민에 비해 간소화되었다. 죽은 사람을 아무런 시설 없이 묻거나 버려진 집 안에 안치한다. 부장품은 없고 가능한 ‘최소한의 의례’로 시신을 처리한다. 스티븐 마이든은 이를 ‘실용적 행위’라고 표현했는데 영혼에 대한 강한 믿음이 있던 수렵채집민에 비해 농경민은 그 믿음 체계가 약해진 듯하다. 소유와 축적을 사고하는 농경민에게 죽음을 맞이한 육신은 노동할 수 없기에 쓸모를 다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일까. 죽음이 경제적 논리로 계산된 것처럼 느껴졌다. 시간이 흐를수록 마을에 새로운 집이 늘어나고, 밭도 계속 넓어진다. 마을의 인구는 곧 한계에 이른다. 경작할 수 있는 땅으로는 인구를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이 되자 몇 가족은 염소떼와 새끼 돼지 무리를 데리고 새로운 땅을 찾아 떠난다. 이런 식으로 농경민은 비옥한 땅을 찾아 떠나면서 새로운 농경문화를 발달시켰다.
경계가 사라지는 두 마을
농경민은 넓은 평야에서 비옥한 토양을 찾고, 수렵채집민은 식생이 풍부한 숲과 해안에 의존하며 살았기 때문에 서로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그들은 천 년 동안이나 공존했다. 하지만 환경변화, 이주, 교역 등의 이유로 두 마을은 어느새 그 거리를 좁혔다. 프랑티 동굴 유적 최상층에서 농경민 마을에서와 비슷한 토기와 석기가 나왔다. 동굴 밖에도 집을 짓고 곡물 재배를 위해 터를 닦기도 했다. 이것은 농경문화가 중석기 수렵채집문화를 압도하게 되었음을 증명한다. 두 마을의 경계가 점점 사라지기 시작한 것이다. 스티븐 마이든은 이에 다음과 같은 가설을 제시한다. 첫째, 수렵채집민은 새로이 들어온 농경민에게 밀려 동굴을 버리고 인구가 점점 줄어 결국 사라졌을 수 있다. 둘째, 동굴에 살던 수렵채집민 스스로가 농경민이 되었을 수도 있다. 셋째, 농경민과 수렵채집민이 긴밀하게 혼인으로 연결되어 서로를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교류했을 수도 있다. 그가 포착한 이 가설을 토대로 그 경계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 러복의 여정에서 살펴보자.
서기전 6000년이 되면 북유럽의 중석기시대 수렵채집민은 커다란 나무집을 짓고 농사를 짓고 동물을 기르는 농경민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 농경민은 중부 유럽까지 들어와 개인적으로든, 아니면 교역을 위해서든 선주민과 접촉했다. 농경민이 필요로 했던 땅과 여자, 모피, 야생 동물은 수렵채집민이 원한 세련된 돌도끼 같은 새로운 위세품과 교환되었다. 이런 위세품은 수렵채집민 사회의 내부 경쟁에 필요했다. 수렵채집민은 곧 이웃들의 도구가 점점 변화하고 있음을 느낀다. 마치 이불 깔고 자던 생활에서 오늘날 대부분 침대 생활로 변화한 것처럼 삶을 유용하게 해주던 것들은 차근차근 그 모습이 달라지는 것이다. 이제 수렵채집민들 가까이에 농경민들의 거주도 눈에 띄게 되었다. 전통적인 수렵채집민의 관점에서 농경민의 삶은 해야 할 일이 많고 매일이 바쁘고 고되다. 처음 농경민의 생활을 목격한 수렵채집민들은 노동하는 삶을 거부했다. 자신의 배를 채우는 것은 자연에서 주는 만큼 얻을 수 있었고, 그것은 곧 삶의 지혜이기도 했다. 그들은 어디서 사냥감을 찾을 수 있는지, 어디서 익은 열매를 얻을 수 있는지, 멧돼지를 어떻게 사냥하는지, 물고기떼를 어떻게 잡는지와 같은 지식 같은 것이다. 하지만 자연에 능동적으로 대응하는 방식을 보여준 수렵채집민의 삶은 점점 다른 국면을 맞이한다.
중부 유럽의 나이 든 수렵채집민은 마지못해 사냥터였던 곳을 버리고 숲으로 더 들어가 더욱 많은 시간을 들여 자연 자원을 얻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역사의 물결을 거스르는 일이었다. 젊은 세대는 다른 생각을 가졌을 것이다. 많은 젊은이들은 이이 멧돼지를 사냥하고 견과류와 베리를 채집하는 일만큼이나 농경민과 토기, 가축, 밀의 존재가 자연스러운 세상에서 태어났다. 그러면서 새로이 들어온 사람들과도 접촉한다. (스티븐 마이든, 성춘택 옮김 『빙하 이후』(사회평론아카데미), 237쪽)
이제 그들은 세대별로 시대를 다르게 경험할 수밖에 없었다. 태어나면서 농경민과의 교역품을 보고 자란 젊은 세대들은 농경민의 토기나 노동에 대한 거부감이 없었다. 젊은이들 눈에는 농경이 기존의 삶보다 더 안정적이고 어린아이들의 생존율도 높이는 듯 보였다. 수렵채집 생활을 이어갔던 사람들도 점점 식량을 밭에서 얻게 되는 패턴으로 바꾸어 갔다. 모피, 사냥감, 벌꿀 같은 숲에서 얻은 생산품을 교역에 쓰게 되었다. 야생 자원은 더 얻기 힘들어지고 고갈되어 갔다. 교역에 종사하며 토기를 만들고 밭을 가는 법을 배우고, 딸은 농경민과 혼인하고, 아들도 곧 스스로 농사를 짓게 되었다. 그런 접촉으로 농경 마을은 번성했던 반면, 수렵채집민 사회는 분열과 경제 문제가 더 심화되었다. 수렵채집민의 모습은 긴 시간에 걸쳐 농경마을에 흡수되거나 사라졌다. 흐려지는 구석기의 흔적 위에 신석기의 흔적은 더 뚜렷하게 남았다.
상식을 깨는 공부
내가 상식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분명한 진실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기 때문에 더 알려고 하거나 의심하기 어렵다. 공부는 그것에 대해 질문할 수 있는 통로가 되어준다. 이번 인류학 <빙하 이후> 시즌에서 나는 구석기와 신석기의 다른 생각을 가져볼 수 있었다. 처음 이 공부를 시작할 때 나는 스스로에게 ‘왜 우리가 구석기를 배워야 하지?’ 급변하는 세상에 새롭게 등장하는 지식이 차고 넘치는데, 철이 지나도 한참 지난 것 같은 과거 인류에게 우리가 배워야 할 게 과연 있을까 했다. 공부는 어떤 대단한 지식을 뽐내는 것이 아님을 알면서도 번번이 그 양과 질을 계산하고 있었음을 깨닫는다. 생각해보면 나는 나와 전혀 다른 사람 앞에서 내가 더 잘 보인다. 나와 거리가 멀수록 생각의 폭은 더 넓고 다양해지는 것이 아닐까. 구석기인으로 시작된 이번 인류학 공부가 너무 당연해서 주목하지 못했던 현실을 보게 했다.
내가 생각하기에 진보란 기술이 발전하는 것, 과거‘보다’ 편리하고 안전한 것, 생활 수준이 나아지는 것이다. 나는 예전에 구석기에서 신석기로 흐름이 진보라는 것이 당연했기에 의문을 가져보지 못했다. 구석기 사람들은 살면서 시행착오를 겪었고, 수많은 데이터가 쌓여 과거보다 더 스마트해져 신석기 ‘농경’이라는 혁명을 이룬 것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인류는 점점 발전을 거듭하여 현대에 최고의 문명의 신화를 이룩한 것 같았다. 이런 생각 방식이라면 구석기인들은 상대적으로 미개하고 뒤떨어진 사람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름에서도 구석기의 ‘구’는 낡은 것, 후퇴한 것이라는 이미지를 동반했다. 하지만 러복이 안내하는 여정에서 본 구석기인들은 오늘날과 견주어 결코 구닥다리 이미지를 떠올리게 하지 않는다. 그들은 내가 생각한 안정된 삶을 거부하고 오히려 자연에 조응하는 삶을 살고자 했다. 지금의 나로서는 범접할 수 없는 능력자들이다. 구석기인들이 훌륭하고 오늘날 사람들이 덜 그렇다는 이야기와는 다르다. 어떤 인류도 자기가 처한 상황에서 더 좋은 방향으로 삶의 방식을 선택하며 살았다. 그렇다면 내가 해야 할 질문은 ‘왜 사는가?, 왜 이걸 배워야 하는가?’가 아니라 나에게 주어진 이 환경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어떤 방식을 선택할 것인가?’여야 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