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학은 일상과 다른 상상력을 통해 다른 가능성을 생각해보게 합니다. 구석기에서 살아가려면 먼 곳에서도 물을 구할 천리안, 웬만한 도구는 만들 수 있는 손, 간단한 도구를 복합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머리가 있어야 하고, 무리 가운데 살기 위해서 빠르게 자기 역할을 찾는 맥락 파악을 해야 하고, 무엇보다 남에게 군림받거나 군림해서도 안됩니다. 한마디로 자연학적 지식, 기술, 사회적 지능이 뛰어나야 살 수 있습니다. 산다는 것은 남의 돈 벌기가 싶냐는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무기력하게 사는 것 말고도 다른 옵션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상상해봅니다. 어쩌면 나도 몰랐던 다른 가능성, 이를테면 효율, 이익과 무관하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무엇을 만드는 데에 집중하고, 그저 친구들과 아무런 이해나 계산없이 즐겁게 시간을 보낼 수 있는 힘이, ‘이미’ 내 안에 있는, 그런 멋진 상상을 말이죠.
[빙하 이후(5)] 『몸 테크닉』 구체적인 “총체적 인간”
걸음걸이, 앉는 자세는 개인의 개성에 불과할까요, 아니면 사회적 현상을 반영한 것일까요. 우리에게 『증여론』으로 익숙한 마르셀 모스는 눈여겨 보지 않고 넘어갈 수 있는, 생활 속 걸음걸이 등 ‘잡다한 것’, ‘몸’에 주목합니다. 사소하거나 개인적인 습관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던 앉는 자세에도 우리기 무엇을 능력이라고 생각하고 있는지가 드러납니다. 앉는 자세와 능력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궁금하시죠.
이번 글은 인류학팀 강평옥이 쓴 마르셀 모스의 『몸 테크닉』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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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체적인 “총체적 인간”
강평옥
쪼그려 앉을 수 있나요
중년에 접어들면서부터 사진에 내 얼굴이 나오는 것을 꺼려하게 되었다. 생각해보니 인물 사진 거부는 턱이며 볼에 붙은 군살에다 어쩐지 아줌마같은 포즈를 직시하기 싫은 심리가 반영되었던 것 같다. 누구나 나이 들면 서글프지만 ‘자연스러운’ 군살이 생기는 것이라 위안했다. 하지만 마르셀 모스의 『몸 테크닉』을 읽어보니 몸은 누구나 때 되면 대체로 비슷해진다고 퉁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다. 몸은 사회적 기준, 개인의 심리, 생리가 복잡하게 얽혀 나타나는 구체적인 장이다. 몸에는 내가 속한 사회, 그간의 나의 활동에, 휴식 자세까지 고스란히 새겨져 있다. 직관적으로는 군살만 눈에 띄지만 조금만 더 뜯어봐도 내 몸 곳곳에는 책상에만 앉아 있고, 될 수 있으면 움직이지 않고 힘든 일을 하지 않았던 이력이, 무능력한 신체라는 증거로 드러난다. 내 몸은 움직이지 않는 것이 능력이라고 포장하는 사회의 척도, 그리고 선택적으로 이를 모방한 나의 심리, 생리가 깎아 놓은 현주소이다.
마르셀 모스는 네안데르탈인의 아치형 다리가 유전이라는 신체적 유인이 아니라 쪼그린 자세로 살았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이를 통해 유전이라고 막연하게 생각했던 것이 실제로는 생리적, 심리적, 사회적 요인에 의한 것임을 밝혀낸다. 그간 ‘나이가 들면’ 유연성이 떨어져서 ‘누구나’ 쪼그리는 동작이 안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자세가 나오는 부분을 읽다가 인문세 선생님들과 쪼그린 자세를 해봤다. 나는 쪼그리면 자세가 불편할 뿐만 아니라 뒤꿈치를 들어야 그나마 가능하고 뒤꿈치까지 붙이려고 시도하면 1초도 버티지 못하고 뒤로 넘어졌다. 놀랍게도 나를 제외한 모든 이가 나에게 왜 이 자세가 어렵냐며, 보란 듯이 쪼그려 앉았다. 얼마나 안정적인 자세이던지, 그 자세로 종일 밥도 먹고 공부도 할 태세였다. 나만 안됐다, 나만. 생각해보니 나도 대학 때까지만 해도 쪼그려 앉는 변기에서 뒤꿈치를 붙일 수 있었다. 이후 편한 의자만 찾고, 바닥에 앉아야 하는 식당은 가지 않다 보니 햄스트링이 고무줄이 아니라 막대기가 되어버렸다. 나의 몸은 그런 습관의 기록지였다.
나는 편리한 의자 생활을 지향하는 사회적 조건과, 다른 사람보다 훨씬 그 조건을 모방했던 나의 심리적, 생리적 매개가 결합된 행동을 보이는 “총체적 인간‘이다. 막연히 직장인, 중년, 여성으로 묶여지지 않는다. 나는 내가 속한 사회의 비슷한 양상으로 나타나는 객관적 사실로서의 사람이 아니라 심리적, 신체적인 결합에 따라 무엇이 될지 아직은 알 수 없이, 여전히 만들어지고 있는 중이다. 몸은 사회 조건에 따라 지대한 영향을 받고 그에 따른 한계도 분명히 있지만 중요한 심리적, 신체적 결합이 있기 때문에 구체적인 양상은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
잡다한 사회현상
그런데 겨우 쪼그려 앉기가 뭐라고, 이런 잡다한 이야기도 사회를 연구하는 대상이 될 수 있을까? 모스는 앉는 자세, 걸음걸이, 수영, 자는 모습 등 ’몸‘과 관련된 ’잡다한 일‘을 살펴본다. 흔히 인간이 의지의 주체이고, 몸은 그런 의지를 실행하는 수단이라고 한다. 그래서 몸이 따라주니 마니 하는 이야기도 나온다. 하지만 몸은 정신의 보조물에 그치는 수단이 아니다. 이 책의 제목은 <몸 테크닉>이다. 정신이 아니라 몸을 주제로 한다. 모스는 “몸이야말로 인간의 최초이자 가장 자연스러운 도구입니다”(87페이지)라고 한다. 몸은 도구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다. 모스는 걷기, 수영 등 모든 활동이 사회, 세대마다 다른 “잡다한” 사회활동으로 나타난다고 한다. 각자의 몸이지만 몸은 ‘우리 시대에 양성된 체조술’이라고 한다(77페이지). 모스는 군대만 해도 나라마다 보폭, 행군 방법, 삽 사용 방법 등 몸의 자세나 손재주가 모두 다르다는 점을 지적한다.
모스는 ‘총체적 인간’ 개념을 뉴욕 병원에서 일종의 계시와도 같은 깨달음으로 얻었다고 말한다. 젊은 간호사들의 걸음걸이가 어딘지 익숙했는데 기억을 더듬어보니 그 걸음걸이를 영화관에서 본 적 있다는 것을 알았고, 후에 파리에 와서 그곳 젊은 여성들도 미국에서 본 걸음걸이를 시작한 것을 보게 된다. 이를 보고 걸음걸이가 순전히 심리적,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형성된 특이성(영화로 전파된 사회적 변화)에 해당한다고 본다. 행위는 교육, 모방, 유행 등 사회적으로 형성된다. 즉, 객관적, 사회적 사실이 이미 정해진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인간의 심리적, 생리적 매개의 결합을 통해 행동으로 나타난다고 한다. 그러니 숲을 봐야 한다며 큰 것만 찾아다닐 것이 아니라, 걸음걸이 등 잡다하고 구체적인 것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모스의 ‘총체적 인간’ 개념은 그의 삼촌이자 동시대 사회학자인 뒤르켐이 ’객관적‘인 사회제도, 경제를 연구하며 ’거시적 관점‘에서 ”사회적 사실“이 있다고 주장한 것에 대한 반론에서 나왔다. 뒤르켐은 가장 개인적인 선택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자살의 성격을 사회적이라고 한다. 사회적 연결 고리가 너무 느슨해서 생기는 이기적 자살, 반대로 너무 밀착되서 생기는 이타적 자살, 또 사회적 기준이 급변해서 발생하는 아노미적 자살 등으로 구분하며 자살을 사회적인 현상으로 분석한다. 이렇게 거시적인 관점으로 객관성에 주목한 뒤르켐과 달리 모스는 사회를 분석할 때 구체적인 몸에서 논의를 출발하며 추상적인 논의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한다(73페이지). 객관적 사회적 사실이 이미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연스러운 몸은 없다
누워야만 잘 수 있는가, 애는 산부인과에서 누워서만 낳을 수 있는가? 모스에 따르면 자거나 낳는 자세도 그냥 자연스러운 자세란 따로 없다. 이 역시 사회적 조건과 개인의 심리, 생리적인 구체적인 결합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모스는 군대에서 서서 자기도 하고, 어느 부족은 서서 애 낳는 자세가 자연스럽다고 한다. 그렇다면 되도록 걷지 않고 무거운 것을 전혀 들지 않으려는 현대인들의 자세는 어떤가. 시대상을 반영하기도 하면서 모방하려는 자세에 따라 구체적인 양상은 다르게 나타날 수 있다. 몸은 쓸수록 힘이 생긴다. 안쓰면 더 녹슬게 된다. 몸에 너무 녹이 많이 슬게 되면 녹을 제거하기도 어려워진다. 쪼그려 앉기가 중년부터 되지 않은 것을 방치했다가 노년이 시작되면 걷는 것도 힘겨워질 수 있다. 사회가 능력으로 무능력을 둔갑시킨 뒤 몸을 더 편하게 할 수 있는 상품을 팔려할 때 현혹되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얼마 전 파리 올림픽 역도 경기를 시청했다. 인간의 신체 능력이 경이로웠다. 스쿼트 자세로 자기 몸무게 두 배 이상의 역기를 들어 만세를 부르는 역도 선수의 흔들리지 않는 하체는 사람이 아니라 차라리 코끼리였다. 보통 사람은 역기로 만세는 고사하고 자기 몸무게 정도의 물건을 바닥에서 1센티 위로 움직이기도 어렵다. 아니, 무릎과 발목을 수직으로 하고 엉덩이를 무릎보다 낮게 앉는 준비 자세 자체도 할 수 없다. 게다가 용상에서 턱밑 쇄골에 역기를 올려두었다가 만세를 부르기 직전에 힘을 모으느라 잠시 쉬는(!) 중간 동작을 보면 손등이 손목에 닿는다. 나는 손등을 손목에 닿으려고 해보니 90도도 어려운데 역도 선수는 거의 180도 각도의 유연성을 가지고 있는 셈이다. 역도를 힘이 센 사람들의 경연이라고 생각했는데 스쿼트를 할 때 햄스트링이나 손의 관절까지 고무줄처럼 늘었다 줄어드는 어마어마한 유연함이 있었다.
물론 모든 사람이 언제고 노력하면 엄청난 무게의 역기를 들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타고난 몸이 일단 있어야 한다. 그 타고난 유전자에는 그 조상들의 살아온 이력이 그대로 들어가 있다. 또 되도록 어릴 때 시작해야 하고 오랜 시간 고된 훈련을 고쳐야 한다. 파리 올림픽 역도 경기를 보며, 인간의 몸이 어디까지 파워, 스피드, 유연성을 늘릴 수 있는지 경이와 환희를 느꼈다. 몸은 생각한다고 만들어지지 않고 움직이고, 또 그 동작을 계속해야 만들어진다. 모방하고 싶은 것이 몸을 덜 쓰는 방식이 아니라 쪼그려 앉기를 하고 팔등을 팔목까지 완전히 붙이지 못하더라도 지금의 90도에서 120도 정도로 만드는 것으로 바뀐다면 전혀 다른 몸으로 변모할 수도 있다.
구체적인 몸에서 출발
총체적인 인간을 논증하기 위해 모스는 1장 <감정 표현의 의무>에서 원시 오스트레일리아 장례식 관습을 예로 든다. 그들의 장례식은 선율과 리듬을 갖춘 비명과 울부짖음, 되풀이 노래가 특징이다. 모스는 뒤르켐이 속죄의식의 집단적 성격으로서 “애도란 개인감정의 자발적 표현이 아니라”는 원칙을 제기한 것을 검토한다. 모스는 비명과 노래의 주체가 개인이 아니라 캠프이고 일정량의 비명 지르기를 충족해야 하고, 리듬, 후렴, 삽입음, 합창 등의 일정한 규칙이 있다는 점에서 울음과 감정이 ‘사회적’이라고 한다. 하지만 관습과 규칙이 있다고 해서 감정의 진정성이 배제되는 것은 결코 아니라고 한다(25페이지). 구두표현이 집단적 특성만을 지니지만, 이 집단적 특성이 감정의 강도를 조금도 떨어뜨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집단적 울음, 비명 등의 경연, 역할극, 대규모 공연 같은 규칙이 필요했을까. 이에 대해 우아한 서정적 문구 없이 유치한 서사시에 가까운 내용의 언어를 그 집단이 이해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즉, 집단적 사회 현상으로 겉으로 보이지만, 리듬과 언어를 집단이 이해하고 있다는 점에서 생리적이고 심리적인 것과 결합되었다고 한다.
2장은 <집단이 암시하는 죽음 관념이 개인에게 미치는 신체적 효과>이다. 모스는 여기서 ‘암시’를 강조한다. 실제로 죄를 지었거나 주술에 걸린 것은 논의의 대상이 아니다. 그렇다고 ‘믿는 것’만으로 한정한다. 오스트레일리아나 뉴질랜드인 모두 신체적으로는 뛰어난 치유력, 회복력, 지구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토템을 먹는 등의 금기를 어겼을 때 그는 일종의 형벌로서 주술에 걸렸다고 ‘믿고’ 정신적 ‘동요’를 겪고 급격하게 허약해지다가 ‘죽음’에 이른다. 주술에 걸렸다고 믿는 것으로 죽음이 촉발되었기 때문에 축귀의식 또는 저주를 푸는 주술이 행해지면 치유가 된다.
사회적인 금기가 곧바로 죽음으로 신체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그 둘 사이에는 ‘심리적 매개’가 존재한다(37페이지). 집단의 암시(사회적)가 개인의 죽음이라는 암시(심리적)에 이어 실제의 죽음(신체적)으로, 총체적으로 연결된다. 모스는 이러한 연결이 심리적인 것, 심리–신체적인 것에 대한 고찰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것도 함께 고찰해야 하는 이유라고 설명한다.
마르셀 모스(Marcel Mauss, 1872~1950년)
막대기가 된 햄스트링을 고무줄로! 그날 세미나실의 풍경이 다 떠오릅니다. 한 번씩 쪼그려 앉아 보면서 느꼈던 인류의 몸!
쪼그려 앉을 수 없는 몸을 관통한 사회, 역사, 그리고 감정의 거대한 힘을 느낍니다. 인류학이란 역시 체조! *^^* 좋아요.
사소하고 구체적인 것들로부터 내가 속한 사회, 그것이 만든 나를 를 보게 됩니다.
쪼그려 앉기에 그렇게까지 골몰하신 스토리가 몸테크닉과 연결되어 내 몸, 우리의 몸에 더욱 흥미를 갖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