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학은 일상과 다른 상상력을 통해 다른 가능성을 생각해보게 합니다. 구석기에서 살아가려면 먼 곳에서도 물을 구할 천리안, 웬만한 도구는 만들 수 있는 손, 간단한 도구를 복합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머리가 있어야 하고, 무리 가운데 살기 위해서 빠르게 자기 역할을 찾는 맥락 파악을 해야 하고, 무엇보다 남에게 군림받거나 군림해서도 안됩니다. 한마디로 자연학적 지식, 기술, 사회적 지능이 뛰어나야 살 수 있습니다. 산다는 것은 남의 돈 벌기가 싶냐는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무기력하게 사는 것 말고도 다른 옵션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상상해봅니다. 어쩌면 나도 몰랐던 다른 가능성, 이를테면 효율, 이익과 무관하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무엇을 만드는 데에 집중하고, 그저 친구들과 아무런 이해나 계산없이 즐겁게 시간을 보낼 수 있는 힘이, ‘이미’ 내 안에 있는, 그런 멋진 상상을 말이죠.
[빙하 이후(6)] 『농경의 배신』 체험되는 경관
농경은 식물과 동물 길들이는 일입니다. 경계가 없이 드넓은 자연에 울타리를 쳐서 인공적인 힘을 가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길들이기는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들불과 범람하는 강물로 인한 자연 천이와는 다릅니다. 길들이기는 대상과 주체 모두에게 ‘의존’과, ‘무능력’을 가져옵니다. 우리가 유용하고 뛰어난 발명품이라고 알고 있던 농경의 ‘배신’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번 글은 인류학과 동화 인류학에서 맹활약 중이신 최수정 선생님이 쓴 제임스 C. 스콧의 『농경의 배신』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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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험되는 경관
최수정
『빙하 이후』의 저자 스티븐 마이든은 빙하시대의 경관을 방문한다. 이때의 ‘경관’이란 단순히 눈에 보이는 풍경이 아니라 자연의 풍경 안에서 인간이 경험하는 행위나 실천까지 포함하는 개념이다. 경관을 통해 보는 방식은 스티븐 마이든의 역사관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빙하 이후』를 통해 그는 역사를 보는 방식의 전환을 요구한다. 지배 이데올로기에 의해 문자로 쓰여진 역사에 대한 인식을 ‘역사에 대한 지리학적 시각’으로 보는 방법으로 전환할 것을 제시한다. 그것은 이 세계를 하나의 중심 이데올로기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직접 삶을 꾸려가는 내부자의 체험 현장이라는 관점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는 단순히 종의 집합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종과 종 또는 주변 환경과 무수한 관계에 바탕을 두고 있다. 기후와 지형, 환경조건에 따라 살며 서로가 서로를 바라보는 방식으로 길들여진다. 따라서 지금 우리 앞에 펼쳐진 경관은 우리가 ‘만들어가고 있는’ 사회와 문화, 역사라 할 수 있다.
농경이 수렵채집 방식보다 우월하고 매력적이라는 가정을 의심 없이 믿게 하는 ‘정치 경관’을 언제부터 국가가 명확하게 지배하게 되었는지 말하기는 매우 어렵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앞에 펼쳐진 경관을 국가가 바라보는 방식으로만 바라볼 수 있었다. 특히 관개농업에 의해 최초의 실질적 정착 공동체의 토대가 되었다고 하는 지배적 관점이 그것이다. 하지만 당시 메소포타미아는 건조한 환경이 아니었다. 오히려 채집민들의 습지 천국이었다. 역사가들은 현재 해당 지역이 일반적으로 매우 건조하다는 사실을 1만 년 전의 과거에까지 투사했다는 점만이 아니라 이 충적토 지대가 당시에는 현재보다 10미터 이상 낮았다는 사실을 무시했다. 역사를 국가 지배 이데올로기에 맞춰 결론을 정해 놓고 원인을 유추해내는 방식으로 서술한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국가의 경관 조성이다.
‘길들이기domestication’라는 말은 가구[집]을 뜻하는 라틴어 ‘도무스domus’에서 왔다. 도무스는 경작지, 씨앗과 곡식 저장고, 사람들과 사육되는 동물들이 전례 없이 한곳에 집중된 독특한 장소였다. 이곳은 문화적으로 변형된 인공적 환경이다. ‘길들이기’는 도무스 주변의 작물과 가축의 유전적 구성과 형태를 변화시킨다.
호모에렉투스가 불을 사용하면서 경관 변용을 시작한 것과 호모사피엔스가 준비된 토양에 씨앗이나 덩이줄기를 심던 그 순간은 연관되어 있다. 우리 조상들은 자연발생적 들불이 경관을 어떻게 바꾸어놓는지 보았다. 들불이 어떻게 오래된 초목을 깨끗이 제거하고 빠르게 번식하는 수풀과 관목의 성장을 북돋우는지를 보았던 것이다. 불은 사냥감이 되는 동물들이 길을 잃게 해 몰려나오게도 하고, 숨겨져 있던 짐승의 굴이나 새 둥지를 드러내기도 했다. 불의 경관 조성 기술은 더 많은 생계 자원을 더 좁은 지역으로 집중시키는 성과를 이루어냈다. 야영지 주변의 더 조밀한 원 안에 인간이 원하는 식생이 조성되었고 수렵과 채집은 더 쉬워졌다. 한 끼 식사의 반경이 줄어들었다고 말할 수 있다. 생계 자원이 더 풍부해지고 예측 가능해졌으며 언제나 손이 닿는 가까운 거리에 놓이게 된다.
이는 또한 농경의 시작이 나일강 유역에서 ‘범람–퇴각flood-retreat(데크뤼)’ 농법이 형성되는 원리와도 맞닿아 있다. 강물의 범람은 수렵·채집민이나 화전민이 놓았던 불이 경관을 바꿔놓은 것과 똑같은 역할을 했다. 강물이 범람하면 경쟁 관계에 있는 모든 식물을 쓸어내고 수장시킴으로써 ‘밭’을 깨끗이 정리해준다. 상황이 좋으면 노동을 전혀 투입하지 않고도, 거의 완벽하게 써레질 되고 거름까지 뿌려진 밭이 파종을 위해 준비된다. 우리 조상들은 땅에 불을 놓으면 땅이 깨끗하게 정리되면서 빠르게 번식하는 식물종의 자연천이自然遷移가 이루어진다는 점을 알았듯이, 강물의 범람에 의해서도 똑같이 자연천이가 이루어진다는 점을 알아챘다.
농경이 본격화될수록 호모사피엔스는 종뿐 아니라 환경 전체를 길들여왔다. 곡물과 동물을 길들인 결과는 인류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경관 변용에서 질적 변화가 일어났다. 완전히 길든 식물이란 전문화된 ‘기능이 마비된’ 식물이며, 동물들 역시 반응성과 경계심이 낮아져 인간에게 완전히 의존하게 되었다. 특히 길든 동물은 일반적으로 감정적 반응성이 떨어지는 감정 약화 현상이 일어난다. 인간에게도 이와 유사한 현상이 일어난다. 호모사피엔스가 불을 사용하고, 음식을 조리하고, 곡물을 길들이면서 스스로도 길들었다. 길들이기란 인류와 가축 양쪽 모두에서 작용하는 유비類比과정일 가능성이 있다. 길들이기의 결과로 인간과 동물 모두에게 행동과 감각의 변화가 있었다. 신체적 영역과 문화적 영역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를테면, 정착생활을 하며 곡식을 재배하고 도무스에 거주하게 된 사람들은 자신들이 길들인 가축과 마찬가지로 감정적 반응성이 줄어들었고 주변 환경을 덜 경계하게 되었다. 이는 인류가 자연 세계에 대해 가지고 있는 관심과 실용적 지시의 축소, 식단의 축소, 공간의 축소, 의례 생활의 축소로 나타났다. 자연에서 살아가기 위해 꼭 필요한 능력이었던 기민성과 적응성이 축소되며 가축처럼 온화하고, 느릿느릿한 삶을 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