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학은 일상과 다른 상상력을 통해 다른 가능성을 생각해보게 합니다. 구석기에서 살아가려면 먼 곳에서도 물을 구할 천리안, 웬만한 도구는 만들 수 있는 손, 간단한 도구를 복합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머리가 있어야 하고, 무리 가운데 살기 위해서 빠르게 자기 역할을 찾는 맥락 파악을 해야 하고, 무엇보다 남에게 군림받거나 군림해서도 안됩니다. 한마디로 자연학적 지식, 기술, 사회적 지능이 뛰어나야 살 수 있습니다. 산다는 것은 남의 돈 벌기가 싶냐는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며 무기력하게 사는 것 말고도 다른 옵션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상상해봅니다. 어쩌면 나도 몰랐던 다른 가능성, 이를테면 효율, 이익과 무관하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무엇을 만드는 데에 집중하고, 그저 친구들과 아무런 이해나 계산없이 즐겁게 시간을 보낼 수 있는 힘이, ‘이미’ 내 안에 있는, 그런 멋진 상상을 말이죠.
[빙하 이후(7)] 『라스코 혹은 예술의 탄생/마네』 잉여생산과 예술의 문제
먹고 살만하니 공부하는 것 아니냐, 먹고 살만하니 예술도 하는 것 아니냐는 ‘흔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말만 들으면 선(先)생존 후(後)예술이라는 선후가 분명하게 느껴집니다. 하지만 과연 공부나 예술이 한가하고 여유로운 특별한 사람들의 특별한 취미에 불과할까요. 빙하 이후> 시즌에서 석기 시대 토기 문양, 옻칠, 창던지개 문양, 답사에서 만난 반구대 암각화를 비롯한 많은 유적 등 놀라움을 자아내는 예술품을 통해 석기 시대 사람을 만났습니다. 차분히 ‘흔한 이야기’ 속에서 먹고 살만하다는 기준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됩니다. 어쩌면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먹고 살만하다는 증거이고, 살아 있다면 예술을 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을 해봅니다. 거의 본능적으로요. 생산, 제의, 놀이가 구분될 수 없는 사회라면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 사회의 생산, 제의, 놀이의 구분을 생각하게 됩니다.
이번 글은 자신의 이름을 건 <진진 트레블>책임자이자, 답사의 꼼꼼한 회계, 기획에서 맹활약하고 계신, 물 만난 고기 이진진 선생님의 예술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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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여생산과 예술의 문제
노동의 잉여가 예술이냐, 노동의 안티테제가 예술이냐.
이 문제는 ‘기후가 온난해지자 동굴벽화가 출현했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예술은 그래도 조금은 먹고살 만해야 할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한 질문와 함께 시작되었습니다. 저 또한 책의 한 부분에서 그렇게 읽히는 지점(아래 인용)이 있다고 생각되었는데요.
“라스코 변화에 그려진 동물들은 상대적으로 기후가 온화한 지역에 서식하던 동물들이다. 이 시대의 물질문명, 즉 도구와 노동의 수준은 호모사피엔스 출현 이전과 큰 차이가 나지는 않는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이전의 세계는 전복되었다. 말하자면, 이전 세계에서처럼 생존에만 급급해하지 않게 된 것이다. 어쨌거나 도구들은 더욱 정교해졌고, 이제 평온해진 인간의 활동으 ㄴ곧장 노동으로만 연결되지는 않게 되었다. 바로 이때부터 예술 활동이 더해졌다. 생존에 유용한 활동만 있던 터에 놀이라는 활동이 더해진 것이다.”(『라스코 혹은 예술의 탄생/마네』, 조르주 바타유 지음, 차지연 옮김, 워크룸프레스, 50~51쪽)
먹고살 만해져서 예술을 한다, 여유로워져서 예술을 한다, 목적이 충족되었기에 예술을 한다면 예술은 노동의 부정항이 아니라, 노동의 잉여가 됩니다. 하지만 이 책의 저자 조르주 바타유 논지에 따르면 그렇게 이야기되고 있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이 책 전체에서 바타유는 금기(도구, 생존, 노동)를 작동시키는 방식이 위반(놀이, 예술, 제의)과 함께라고 말하며 둘을 반대항으로 동시작동하는 것으로 놓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해석하고 이해해야 할까요.
이에 세미나지기 오선민 선생님은 이 책에서 라스코 동굴벽화를 강조하고는 있지만 동굴벽화의 출현은 4만 년 전부터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시는 기후가 온난해지기 시작한 지점이 아니지요. 즉 예술의 출현은 기후온난화 이후의 결과적 측면이 아닙니다. 또한 ‘기후가 온난해졌다, 그래서 풍요로워졌다’는 노동의 목적이 더 강하게 부여되는 조건이 됐음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생산력이 증대되면서 목적이 오히려 더 강하게 부여된 것이지요. 이는 사실 지금 우리의 풍요를 떠올려보면 쉽게 이해되기도 합니다.
호모사피엔스는 이전부터 도구, 노동과 함께 목적에 대한 거부를 계속 생각했습니다. 빙하의 마지막 온난화 무렵에 생산력이 증대되면서, 예술이 노동의 반대항으로써 브레이크를 거는 작용을 하게 된 것이지요. 그들은 생산력이 많아져서, 힘이 남아돌아서 예술을 한 것이 아니라, 생산력 증대에 대한 확고한 거절 활동으로서의 예술을 했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바타유는 이전의 동굴벽화보다 특별히 라스코 동굴벽화에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선민 선생님은 예술은 노동의 부정항이지만, 그래서 예술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술이라는 부정항과 함께만이 노동이 활력을 갖는다고 하셨습니다. 다르게 말해 노동에 치여 활기를 잃어가는 지금 해답은 예술, 축제, 놀이에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생산력 과잉의 시대, 목적이 강하게 돌아가는 시대, 지금이야말로 예술이 브레이크를 걸어야 할 때가 아닐까요.
조르주 알베르 모리스 빅토르 바타유(Georges Albert Maurice Victor Bataille, 1897~1962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