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철학 사상
[일본 철학사상 자료집] 근대 강단 철학(수업 후기)
『일본 철학사상 자료집』 마지막 시즌이 시작되었습니다. 첫번째 시간에는 이연숙 선생님께서 메이지 유신 전후의 일본 상황과 일본의 계몽 사상가들과 철학자들이 어떻게 서양 사상을 받아들였는지 알려주셨습니다.
1614년 도쿠가와 막부는 쇄국정책을 펼쳤지만 나가사키의 데지마라는 지역에서 네덜란드인들이 무역을 할 수 있도록 허용했습니다. 여기서 일본인들이 네덜란드어를 배우고 그들의 학문을 배운 것이 일본 근대 知의 메이지 유신을 가능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때 스키다 겐바쿠는 네덜란드어를 모르면서 사전도 없이 해부학 책을 번역하기 위해 사형수시체의 해부 광경을 봐가면서 10년 이상의 시간을 들였다고 합니다.
일본 근대화의 주역들은 주로 1830-1850년에 태어난 분들이라고 합니다. 교토에는 철학자의 길이 있는데 어떤 철학자는 서양 사상이 이해하기 어려워 한겨울에도 땀을 뻘뻘 흘리며 이 길을 걸었다고 합니다. 이때 만들어진 것이 요즘 우리 학문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단어들입니다. 자유, 객관, 주관, 사회, 개인 등. 학문이 소개되려면 번역 작업이 먼저였을 것이고 번역은 그에 걸맞는 단어를 창조하는 일이었습니다. philosophy를 ‘철학’으로 번역했지만 유럽의 philosophy와 일본의 ‘철학’에는 간극이 존재했겠죠.
서양을 빨리 따라가기 위해 중국어를 폐지하자, 일본어를 쓰지 말고 로마자어를 쓰자, 간단한 영어를 쓰자 등 논의가 많았다고 합니다. 1860년대 우리나라에서 중국어를 쓰지 말자고 누군가 건의했다면 목숨이 날아갔을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중국과 사대관계 속에서 학문적 유연성이 많이 부족했지만, 일본은 중국의 직접적인 침략은 받은 적이 없었기 때문에 학문적 전환이 더 쉬었다고 합니다.
빠르게 유럽을 이식하여 제국주의의 길을 걷고자 했던 일본. 근대화 후발주자로서의 조급함이 일본의 근대를 일그러지게 만들었고 천황제로 똘똘 뭉쳐 동아시아 민중을 수탈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습니다. 일본이 타발적이면서 자발적으로 받아들인 서양사상과 자본주의. 일본에서 우리나라로 이식된 서양사상과 자본주의, 그 과정에서 침략과 수탈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지금의 우리 모든 생활을 좌지우지하는 근대화의 뿌리가 여기에 있다고 생각되어 좀 씁쓸한 시간이었습니다.
아래는 이연숙 선생님 강의를 그대로 가져왔습니다. 많은 정보 얻어가시고 유투브 영상(유투브 ‘인문공간세종’을 구독해주세요)으로도 이연숙 선생님 강의를 직접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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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란 최대의 해방과 억압이 서로 등을 맞대고 있는 야누스의 시대이다. 근대에는 특정계층의 전유물이었던 지식을 다양한 계층이 향유하기 시작했고, 의무교육을 통해 교육의 기회를 대폭적으로 개방하였다. 교육 기회의 확대는 동시에 사람들의 사고와 행동을 획일화하고, 지배적 가치를 내면화하는 부작용도 안고 있다.
근대는 서구의 사상과 과학기술이 중심 기둥을 이루고 있다. 또한 근대는 서구중심의 제국주의와 자본주의 안에서 탄생하고 형성되었다. 그리고 근대의 이분적 사고는 식민지 지배와 약육강식의 논리를 대놓고 정당화시켰다. 빛과 어둠, 문명과 야만, 근대와 전통, 이성과 감정, 정신과 신체, 생과 사, 성인과 아이, 과학과 미신, 청결과 불결, 건강과 질병 등의 이분법적 논리는 좋은 것과 나쁜 것이라는 대립하는 이미지를 각인시킨다. 이런 이분법적 대립은 <여운>과 <침묵>과 <기다림>의 세계를 분쇄했다. 현재도 우리는 의상과 헤어 스타일, 라이프 스타일, 심성, 언어, 몸짓 등에서 근대의 세례를 흠뻑 받고 살고 있다.
먼저, 일본의 제국주의 역사를 살펴보자. 일본은 1869년 홋카이도 「북해도」를 설치하여 아이누 사람들의 토지와 문화를 빼앗고, 1872년 류큐왕국을 강제로 폐지하고 류큐번을 설치하여 오키나와 문화와 언어를 억압하고 그들을 일본화하였다. 1889년에 제국 헌법을 공포하고 1895년 청일전쟁 후 대만을 식민지화하고 1910년 조선을 식민지화하였다.
일본 근대의 초점은 근대화 후발주자로서 신속하게 서구를 모방하고 배워서 식민지가 되지 않고 제국주의 대열에 들어가는 것이었고, 부국강병과 문화개화가 시급한 과제였다. 일본 근대는 천황을 숭배했지만 동시에 <제국주의>와 <자본주의>의 신을 독실하게 숭배했다. 이것은 전근대부터 내려온 일본의 실용주의적 측면이다. 이때 많은 우국충정의 지식인들이 등장하고 활약하여 일본은 위로부터의 근대화가 가능해졌다.
일본 知의 근대화와 知의 메이지 유신은 강단 철학으로부터 도래하였다. 강단 철학은 거리의 철학, 재야의 철학과 대비되는 개념으로 대학에서 유래한 철학을 말한다. 그들은 시행착오와 고뇌의 시간을 통과하여 서양철학과 사회사상을 충실하게 수용하였다.
먼저, 서양철학과 사회사상을 수용한다는 것은 서양 知의 언어를 일본적 언어로 번역하는 것이었다. 많은 서양의 개념들(예를 들어 사회, 개인, 철학, 연애, 주관, 객관, 자유 등)은 일본에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번역은 知의 창조 작업이었다.
일본의 근대화는 미련 없이 단호하게 중국 문명에서 벗어나 서구중심의 문명개화로 가는 길이었다. 당연히 한자와 한문 문제는 일본 지식인 사회의 중요한 이슈였다. 이러한 문제는 근대의 여명기(1866년)부터 부각되었다. 막부의 개성소(1856년 에도 막부에 설립된 양학 연구 교육시설)의 번역 담당자(마에지마 히소카)가 쇼군(도쿠나가와 요시노부)에게 ‘한자 폐지의 건의’로 그 막을 열었다. 문자문제는 명륙사(明六社)의 중요한 논점이 되었고 가나문자론과 로마자론을 주장하였다(명륙사란 계몽사상가들의 결사로 1873년에 계몽사상가들이 서로의 의견 교환을 통하여 ‘지를 넓히고 식을 밝힌다’며 이를 제규로 내걸었다). 가나 문자를 주장하든 로마자를 주장하든 중국문명권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해 공통의 적은 한자였다.
근대 일본에서는 수많은 서양 발신의 개념과 용어들을 대개 두 자의 한자어로 번역하였다. 로마론자였던 니시 아마네는 왜 philosopy를 철학(哲學)으로 번역했을까? 왜 한자는 하필 두자가 대부분인가?
일본 근대지(知)의 교량은 난학과 번교였다. 1614년 도쿠가와 막부는 기독교를 탄압하고 쇄국정책을 시행했지만 나가사키의 데지마에서는 네덜란드 무역업자들의 활동을 허용했다. 여기에서 난학이 탄생하였다(일본은 네덜란드를 오란다라고 칭하였다). 스기타 겐바쿠(1733-1817년)는 『解体新書』(1774년)란 책을 내었다. 그는 네덜란드어를 모른 채 직접 시신을 해부하면서 네덜란드 해부학 책을 번역했다.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십이지장(十二指腸)은 그때 만들어진 스기타의 번역 용어이다.
번교는 에도시대 각 번이 설립한 사무라이 자제를 대상으로 하는 교육기관으로 유학, 국학, 의학, 양학(네덜란드에 관한 지식), 무예를 가르쳤다. 18세기 후반에는 각 번에서 행정개혁을 위한 인재양성에 힘을 기울여 번교가 늘어났다. 에도 말기에는 전국에 219개의 번교가 있었고 이곳에서 메이지유신을 이끄는 인재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일본은 강한 타자 유럽과의 만남도, philosophy와의 만남도 당혹스러웠다. 유럽에 대한 열등감과 초조감이 근대 일본의 사회적 잠재의식 깊숙이 침투하였다. 일본의 근대는 ‘일그러진 근대’였다.
일본에서 서양 철학의 도입은 난학자인 다카노 조에이(1804-1850년)가 최초로 그리스와 유럽의 철학 역사에 대한 체계적인 개론서 『서양학사의 설』을 집필하면서였다. 그는 <근대 일본을 만든 105인>의 첫 주자였다.
니시 아마네는 여러 차례 시도 후에 1874년 philosophy를 철학으로 확정하였다. 哲은 서경에 등장하는 <철인>, <철리>에서 가져왔고 學은 공자 논어에서 따왔다. 철처한 서양 지향주의자였던 니시가 왜 동양 고전을 토대로 한자로 번역어를 생성했을까? 니시 아마네가 번교에서 배웠던 학문은 한학과 난학이었다. 그는 사변적인 형이상학보다는 J.S 밀의 귀납논리와 오귀스트 콩트의 실증주의 체계가 일본에 가장 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였다.
철학은 근대 일본 초기에 매우 생경하고 특이한 것이었다. 서양 철학사상의 토대가 되는 서양사회의 역사 및 언어는 일본 사상사에 접목되기 어렵다. philosophy와 철학에는 간극이 있을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그 간극이 새로운 사고와 사상을 탄생시키는 가능성의 장이기도 했다. 그러면서 근대 일본은 서양에 대한 추종에 힘을 쏟았다. 일본은 서양과의 관계 속에서 끊임없는 허탈감과 자괴감을 느꼈다. 그 허탈감과 자괴감을 식민지와 야만적인 아시아에 대한 폭력으로 해소했고, 또한 이 허탈감과 자괴감은 비이성적인 천황숭배와 파시즘으로 치닫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