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9] 예술을 향한 사랑
화자에게 사랑은 질투가 있을 때에만 되살아나는 감정이다. 아무것도 의심할 것 없고 불안하지 않을 때는 대상에 대한 관심과 애정은 사라지고 권태만 남는다. 발베크에서 돌아오기 전 화자는 지루함만 남은 알베르틴과의 관계를 정리하기로 하고 어머니에게 얘기한다. 그러나 알베르틴이 과거 뱅퇴유의 딸과 아는 사이였다는 얘기를 하자마자 그녀에 대한 질투와 사랑이 되살아난다. 겉으로는 그녀가 여성을 좋아하는 악덕 취향을 드러내지 못하도록 자신이 막아야 한다는 의무를 지닌 것처럼 말하지만 알베르틴이 다른 여성들을 만나지 못하게 해야 한다는 질투심이 가장 크다. 어머니는 그런 화자가 못마땅하지만 드러내놓고 아들에 반대하지는 못한다. 그렇게 파리의 집에서 화자는 알베르틴을 감시하면서 머물게 한다.
알베르틴의 친구 앙드레에게 외출한 곳의 보고를 받고 나중에는 심지어 자동차 운전사에게까지 그녀를 감시하게 만든다. 그러나 9권의 마지막쯤에는 운전사와 알베르틴이 말을 맞추고 운전사도 화자를 속였던 것임을 암시한다. 자신은 단지 알베르틴을 악덕으로부터 구하려는 것이라고 줄기차게 변명하지만 결국 자신이 알베르틴을 ‘아름다운 감옥’에 가둬둔 것임을 인정하는 듯하다. 이런 권태가 가정을 이룬 사람들이 갖게 되는 어쩔 수 없는 ‘가족 감정’이며 알베르틴을 갇힌 여인으로 보이게 할까 봐 괴로워한다. 그래서 다시 헤어질 결심을 하게 된다.
샤를뤼스에게 갇힌 모렐은 신경쇠약에 걸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 재능 있는 예술가임에도 하인의 아들인 자신의 신분 상승을 위해 매사 예민하게 반응하면서 신경쇠약에 걸려버린 모렐은 제 꾀에 넘어간 것만 같다. 샤를뤼스의 돈이 필요하지만 그에게 구속받고 싶지 않은 마음이 충돌하고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에게 욕설을 퍼부으며 차버림으로써 자신의 우월성을 인정받으려고 한다. 그런 모렐을 화자는 미쳤다고 표현한다.
반면 알베르틴은 미치지 않았으며 단지 거짓말을 할 뿐이라고 말하는데, 자신이 원하는대로 복종하는 알베르틴에게서 평온함이 느껴지자 화자는 다시 헤어질 결심을 한다. 그가 잘 모를 때 그를 흥분시켰던 알베르틴의 모습은 사라졌고 이제 아무 흥미도 끌어내지 못하는 그녀에게는 질투도 불안, 그리고 사랑도 없어졌다고 느낀 것이다. 베르고트의 죽음을 듣고 알베르틴이 한 거짓말을 알게 되자 또 다른 감정의 변화가 일어난다.
알베르틴이 일거수일투족을 자신에게 감시당하는 줄 모르면서 감시당하고 있기에 화자는 그녀를 가뒀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점차 그녀가 그것을 깨닫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그녀를 사랑하지도 않는데 결혼해야 하는 자신의 처지를 오히려 비관한다. 화자가 그녀에게 행사하는 것은 주인이 노예에게 하는 그것과 같다. 그러나 자신이 ‘더 주인’이고 ‘더 노예’라는 말로 그녀가 밖에서 누굴 만나고 어딜 가는지 질투심에 휩싸여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자신이 오히려 갇혀있다고 느낀다.
화자는 알베르틴과의 관계가 마치 자신이 결심하면 언제든 헤어질 수 있는 주인과 같은 자리에 있다고 생각하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질투 없이는 사랑이 지속되지 않고 권태만이 남는다. 그러나 질투는 불안하게 만들어 고통스럽다. 알베르틴이 없다면 거리에서 만나는 여종업원들 중 누구와도 사귈 수 있는데, 왜 사랑하지도 않는다면서 그녀에 집착하고 의심하고 질투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 예술에 미련을 갖고 있던 자신이 예술에 대해 잘못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알베르틴을 향한 미련도 거둬들일 수 있었다. 화자에게 알베르틴은 스완이 살아있는 예술품처럼 느꼈던 오데트처럼 예술을 향한 열정을 대신할 대상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 같다.